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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와 사랑의 눈부신 메타포--카사블랑카>

이바구아지매 2007. 1. 31. 17:25

 

 

인종개조라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히틀러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많고도 깊다. 인간의 삶에서 <내>가 <너>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 내가 너를 나와 동격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유도 사랑도 한낱 유령들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너를 내가 사랑한다. 그런데 너에게는 이미 사랑이 있었구나. 네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너와 내가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너의 사랑이 다시 너에게 돌아와 있었구나. 그렇다면......

네가 나를 사랑할 때 나를 소유하고자 함이 아니었듯이, 나 또한 너를 사랑할 때 너를 소유하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나는 이제 네가 되찾은 너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사랑에서 삼각의 구도는 영혼이 고통스러워하는 법. 울지 말아라. 나는 괜찮다. 네가 이미 너의 옛사랑을 찾아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사랑은 완결되었으니......

<카사블랑카>의 외적 스토리를 다소 감상적으로 정리하자면 아마도 이쯤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다. 바닥에 자유가 융단처럼 깔린 사랑이다. 야만적인 폭력이 전염병처럼 지구촌을 휩쓸던 시대의, 그래서 더욱더 간절하게 필요했던, 가슴에 눈물을 한웅큼쯤 준비해놓고 보면 더욱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랑 이야기다, 여기에 민족과 자유라는 테제가 덧붙여져,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골치아픈 문제까지 부가적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카사블랑카는.

<내>가 사랑하는 <너>, 그런 네가 사랑하는 <그>, 자아, 이제 어쩔 것이냐. 뒤에서는 야만적인 폭력이 달려오고 있다. 티켓은 두 장뿐이다. 한 사람은 떨어져야 한다. 떨어진다는 것은 죽거나 혹은 좋거나이지만, 어쨌든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결단은 오직 <내>가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너>는 결단을 내릴 수도 없거니와 내린다 해도 그 순간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예 선택의 여지조차 주어져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너>도 알고 <그>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열쇠는, 그것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내>가 만일 <나>와 <너>만을 생각한다면, <그>를 죽음 구렁으로 내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한다면, 열쇠를 갖고 있는 <내>가 위험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주인공 닉으로 등장한 험프리 보가트가 만일 그 상황에서 주저리주절 정의를 뇌까렸다면, 이 영화는 웃기는 비빔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정의보다 한결 민감한 사랑과 자유를 깔고 있었기에, 이 영화는 신파적으로 말하자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문제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눈물은 담담하고, 상쾌하기조차 하다. 청승과는 근본이 다른, 그야말로 카타르시스한 눈물을 카사블랑카는 우리에게 제공한다. 희망이 필요했던 시대에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나>와 <너>가 아닌 <우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 탐욕보다는 욕망을, 욕망보다는 희망을 얘기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의 이미지는 눈부시다.


 


그런데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던가? 우리는 왕왕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영혼까지 지배하고 구속하며 착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곤 한다.

<카사블랑카>에서 중요한 것은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 그 시선이다. 남성 위주의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어차피 선택의 폭이 별로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여자를 바라보되 자신의 눈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여자의 눈이 되어, 그녀의 입장에서 남자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사랑이 무엇인 줄을 아니까. 그녀에 대한 비루한 독점적 소유의 욕망 따위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남자의 이러한 태도는 사실 기독교를 바닥에 깔고 있는 서양인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양의 도교와 탄트리즘에 가깝다. 기독교는 성을 관리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성을 관리한다는 것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관리,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의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반면에 도교에서의 성은, 물이 흐르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서 가듯이 무위(無爲)의 세계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자라 올라가듯 성은 성 자체에 내재한 역동성에 의해 운동을 거듭할 뿐 규제니 관리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탄트리즘은 도교의 그것에서도 한 걸음 더 깊이 그리고 복잡하게 들어간다. 수행자들은 성을 일단 관리와 규제가 필요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관리 · 규제와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므로 성의 문제에 있어서 관리와 규제란 철저하게 타인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억압의 양상을 띠게 된다. 탄트리즘에서의 관리 · 규제란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다.

그들은 응시를 최고의 덕목으로 본다. 서로의 육체와 육체를, 서로의 눈과 눈의 마주침을 통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을 섞는다. 일체의 언술행위를 파기하고 눈으로 말하는 것,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의 시선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탐색의 시선도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라고나 할 수 있을 법한 응시. 탄트라 수행자들의 이 응시의 기술이 영화 <카사블랑카>에는 녹아들어가 있다.

<카사블랑카>는 냉정하게 보기로 하자면 흔해빠진 할리우드식 영웅주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메시지. 실제로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영웅담론들을 대부분 <카사블랑카>에 빚을 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카사블랑카>는 오늘날의 영웅주의적 필름과는 중요한 코드 하나가 다르다. 간단한 대화 한 마디를 들어보기로 하자.

여자 : 어제 밤에 어디 있었어요?
남자 : 그런 옛날 일을 난 기억하지 못해.
여자 : 오늘 밤에 만날 수 있을까요?
남자 : 그건 너무 먼 미래야.

냉소와 위트와 허무가 적당히 버무러진 남자의 이러한 응답은 분명 절대자를 상정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은 아니다. 작위(作爲)를 거부하는 도교의 세계관에 훨씬 가깝다. 억지로 무엇을 하지 말자는 것, 그것은 가짜라는 것,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또 하나의 가짜를 내놓지는 말자는 것, 이것은 확실히 할리우드식 문법은 아니다.

요컨대 현대의 헐리우드 필름은 <카사블랑카>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자신들의 스승을 살해하고 있는 격이다. 유치한 영웅주의로, 자국우월주의로, 때문에 그들은 줄기차게 사랑을 얘기하지만,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 있을 뿐 사랑은 없다. 하긴 지금의 미국은 모종의 국가주의 체제로 전환해가고 있다는 혐의가 있기도 하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며, 세계를 상대로 은밀한 전쟁을 수행중인 미국의 태도는 어찌 보면 히틀러의 프로그램과도 닮아 있다. 적으로부터 배운다고 했던가. 죽은 히틀러가 살아 있는 미국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서 악마의 노래를 속삭여주는 격이다.

소설가 윤영수씨의 작품에 <사랑하라, 희망없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사랑을 하되 희망없이 하라? 이 말은 아마도 사랑을 할 때 계산을 하지 말라는 충고로 읽혀진다. 계산기를 가동하는 순간 사랑은 사라지고 숫자들만 남게 된다는 얘기. 정의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사수하라, 희망없이 계산도 없이. 그러나 미국이 내세우는 정의는 너무도 계산이 복잡해서 금방 터져버릴 지경이다. 어쩌면 미국은 지금, 거대한 제국 로마가 그랬듯이 멸망의 수순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카사블랑카>에서 남자 닉은 여자 일자를 계산없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노랫말은 주제곡

시간이 흐른 뒤

이것은 기억해야 해요

키스는 단지 키스일 뿐이고

후회는 그저 후회일 뿐이라는 걸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처음으로 돌아 가게 되죠

두 연인이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구애한다면

당신은 믿어도 좋아요

미래가 어떻게 되든지 말이에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말이죠

달빛과 사랑의 노래는

절대 시들지 않아요

가슴 가득한 열정

부러움과 시기

여자는 남자를 원하고

남자는 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요

그건 해묵은 이야기에 불과하죠

영광스런 사랑을 얻으려는 싸움은

승리 아니면 죽음이에요

시간이 흘러도 세상은 언제나

연인들을 환영할 거에요(간주 - repeat)





출처 : 산지기의 웰빙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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