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리랑 / 조정래 (174) --완결편--
홍씨는 가벼운 현기증이 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 순간 홍씨는 소
스라치고 말았다. 밤마다 꿈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바로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
던 것이다. 그렇게 바로 대면을 할 줄은 미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너무 당황한 홍씨는 그만 등 돌아섰다. 홍씨의 두 손은 낭자머리를 더듬고 있
었다.
"운봉, 애썼어. 이따가 재미난 의병 이야기를 해줄게."
송수익은 아기중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야아, 재미진 이얘기 밤새 히주씨요. 잉."
아기중은 재빨리 홍씨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송수익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돌아섰다.
송수익은 더 없이 말이 궁색하여 멀리로 눈길을 보냈다. 첫 마디를 어떻게 해
야 좋을 것인지 막연하고 난처할 뿐이었다.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웠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였다. 여인은 등 돌아선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낭자머리를 더듬고 있던 두 손이 앞
으로 모아져 있었다.
담배연기가 푸르게 흩어져 가고, 봄기운 그윽한 창공에 맑은 새소리가 뿌려지
고 있었다. 송수익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마땅한 말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이 만나기를 원했지만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 남자의
역할이 그리도 곤혹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내 이야기를 역어
가지 않고서는 여인은 끝내 몸을 돌려세우지 못할 것이었다. 곰방대에서는 더
연기가 나오지 않고 담뱃진 끓는 소리만 뿌지직거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간에 벌써 1년 세월이 흘러갔군요."
송수익은 이렇게 말하며 몇걸음을 옮겼다. 여인이 몸을 돌리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인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의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붉은 기운 감도는 여인의 귓볼에 부끄러움이 꽃빛으로 돋아있었다.
수그린 목의 끝자리에 가지런한 잔머리털이며, 해맑게 꿰비치는 듯 발그레하
게 돋아오르는 생기이며가 그대로 앳된 모습이었다. 그 청순함을 짓누르듯 하고
있는 낭자머리가 위압스럽고도 서럽게 느껴졌다. 그 낭자 머리는 여인의 일생을
옭아매는 어찌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과부가 되기는 너무 앳된 나이였고, 그 올
가미를 벗아나기란 규범이 너무 엄중했다. 송수익은 괴로움을 씹으며 숨을 돌이
켰다.
세상의 물결이 험악하다 보니 청상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병전쟁
을 일으키고 나서 도처에서 생긴 청상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 수를 짐작하기
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죄로 그 여자들은 일생을 빼앗긴 셈이었다.
며칠 전에 잠깐 만난 아내의 말이 쟁쟁하게 올려왔다.
"지넌 어찌 살어야 허능가요."
아내의 이 절박한 한마디 앞에서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손
을 잡아주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송수익은 여인의 고개를 들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내일 곧 만주로 떠납니다."
"네에?"
그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홍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선 더 이상 의병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된 형편이라 새 방도를 찾아나서
는 길이지요."
여인에게는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서로 쑥스러움을 면하고 여인
이 말문을 열게 하기 위해 송수익은 일부러 그 말을 했다.
"만주로....... 그 먼 만주로......." 낮게 중얼거리는 홍씨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
는 듯하더니, "만주로 가시면 새 방도가 생기능가요." 조심성이 담긴 목소리였지
만 말은 분명했다. 눈길도 송수익의 옆얼굴로 향하고 있었다.
"예, 일찍 만주로 건너간 함경도 평안도 의병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며
잘 싸우고 있습니다."
송수익은 부드럽게 말하며 여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송수익은 엷게 웃었고, 홍씨는 잠시 고정시켰던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나 홍씨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떨구어진 눈길을 따라
가비얍게 내리덮인 눈꺼풀이 파르르 잔 여울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었다.
송수익은 가슴이 요동하는 것을 느꼈다. 도도록한 눈꺼풀의 빠른 떨림은 너무
육감적이었고, 그 떨림이 바로 여인의 심장의 떨림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 뜨거운 듯한 떨림의 파장은 큰 물결로 변해 자신의
가슴을 쳐오고 있었다.
"하오면 앞날얼 나라 찾는 디에 바치신단 말씸이신가요?"
홍씨는 눈길을 들어 송수익을 바라보았다.
"예, 그것이 장부의 바른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송수익은 여인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꽤나 놀라
고 있었다. 여인이 눈을 내려떴을 때와 바로떴을 때와 그 얼굴의 느낌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눈을 내려뜨고 있을 때는 그저 곱상하고 안온한 느낌의 생김새였다. 그런데
눈을 바로뜨자 곱상함은 화사한 생기를 품었고 안온함은 묘한 슬픈 기색으로 변
해 있었다. 눈을 내려떴을 때가 반쯤 열린 꽃망울이라고 한다면 눈을 바로떴을
때는 활짝 핀 꽃송이였다. 사람의 눈이 얼굴에 자리잡은 이목구비 중에서 제일
중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듯 생김새의 느낌을 현저하게 바꾸어 놓는
다는 것은 전에 없던 느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송수익은 더 마땅히 할말이 없었
고, 홍씨는 많은 말을 간추리지 못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다시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그만두고 가는 솔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리고는 솔잎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여리게 풍기는 솔향기를 맡으며 송수익
은 인연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그 깊고 오묘한 세계는 알 듯 하면서도 미궁이었다.
"불교는 믿으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송수익은 솔가지를 입에 물었다.
"예예, 어려서보톰......."
홍씨는 솔가지끝을 잘글잘근 씹고 있는 송수익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을 잘 아시겠군요."
"......"
홍씨의 눈길은 먼데를 바라보고 있는 송수익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연을 맺지 말라 하셨지요. 인연은 괴로운 것이니,
원수는 만나서 괴롭고, 그리운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라고요."
홍씨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무섭게 가슴을 쳤던 것이다.
풀꾹 풀꾹 푸풀꾹 풀꾹
어디선가 풀꾹새가 울고 있었다. 쉰 듯하면서도 애절하고 슬픈 소리였다. 임
그리워 울다 울다 목이 쉬고, 피를 토해 제 피를 되마셔 잠긴 목을 틔워 다시
운다는 새였다.
"저를 만난 일이 없었던 것으로 잊으십시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입니다."
송수익은 씹고 있던 솔가지를 무심하게 마른풀섶 위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해가 기울었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송수익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홍씨는 송수익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홍씨는 그가
떨구고 간 솔가지를 집어들었다.
풀꾹새는 석양빛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