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인의 강의를 듣고 나서/백승자
가을이 손 끝에 만져지는 지난 토요일(9월 3일) 오후, 문화원에서는 한 문학강연이 있었다. 마삼말쌈 시낭송회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가뭄 뒤에 오는 단비처럼 촉촉히 가슴을 적셨다. 행사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윽한 연꽃향의 차와 풀빛 노을빛으로 몸을 치장한 다식이, 고운 한복을 입은 회원들의 자태를 한층 돋우며 들어서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강연장이 꽉 찬 가운데 차향을 닮은 분위기 속에서 문정희 시인이 강단에 올랐다. 시인은 40대 여자들도 피하는 긴 퍼머머리를 늘어뜨리고 멋스러운 스카프를 두른, 50대 후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다소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거듭되는 겨울 서리를 버텨내고 피어난 흑장미처럼 원숙미를 풍기는 시인의 모습에 잠시 질투를 느꼈다. 그런데 강연이 시작되면서 나는 시인의 또 다른 면모에 매료되었다.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임을 상기해 볼 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같은 여자로서 너무도 당당하고 힘있는 모습이 작은 놀라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곧 60을 바라보는 황혼이 아니던가. 시인의 당당함이 40대인 내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가 시종일관 얘기하는 페미니즘의 확대를 스스로 실천하고 사는 것 같아서 말이다. 1950년대 말 태동한 신문학, 60년 대 참여와 순수의 극한 대립으로부터 70년 대 민중적이고 상업적 인 몸짓을 바탕으로 한 80년 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지극한 사랑, 90년 대 자유로운 창작권을 확보하기까지 한국문단은 참으로 많은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짚어줄 때는 오늘날 창작하는 사람들의 편안함이 새삼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시인은 한국 여성 문인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가 여성에 의해 지어졌음은 물론 고려가요, 시조, 가사등 고전시가에 뛰어난 여성 작품들이 있음을 확인시키며,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일컬어지는 현대 문학의 다양성에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 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하기도 했다. 다양성, 그것은 당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 대로의 상상과 사상을 나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남의 눈치를 보고 획일화 되어간다는 것은 시대를 맞아 싸우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 문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고정관념에 묶이지 말고 마음껏 쓰라는 시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현대시는 묘사를 중심으로 한 진술의 조화를 지향한단다. 가끔 시집을 뒤적일 때면 어떤 것은 너무 일상적이서 잡스러운 기록 같고, 또 어떤 것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없을 만큼 난해해서 좋은 시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던 차에 갈피를 잡을 수 있어 반가웠다. 잘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독서를 토대로 피나는 습작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어떤 소재를 어떤 그릇에 담든지 정직해야 한다는 충고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 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정직함이 힘을 가질 건 뻔한 이치다. 그러니 그의 문학에 대한 통찰은 정확하고 담백하다 하겠다. 모처럼 알맹이 있는 강연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여름과 씨름하고 있는 내게 팔딱거리는 회를 빨간 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 있는 기회까지 얹어준 주최측 배려가 나를 그 하룻밤 풍성한 가을속에 푹 빠뜨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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