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야기

[스크랩] 양귀비로부터의 교훈

이바구아지매 2007. 6. 7. 21:15

 

양귀비에 대한 내 개인적인 추억은 다서여섯 살 유년기로까지 이어진다 . 외할머니가 절간에 계셨던 까닭에 초등학교 입학 직전까지 절간에서 살다시피 했던 나, 그때 보았던 양귀비는 내게 그저 하나의 꽃이었을 뿐인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외할머니께서 접시 같은 것을 들고 다니시며 꽃봉오리를 잘라 뽀얀 물을 받았는데 그 유백색의 물은 금세 까맣게 변하곤 했다. 그 까맣게 변한 양귀비 진액으로 외할머니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절간을 찾는 신도들 가운데 누군가 탈이 나면 까아만 환약을 몇 알씩 주시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그것이 아마 양귀비 즉 마약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그리고 내 머리가 자라고 한참이나 자라서 나이 서른이 가까웠을 즈음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에서 다시 양귀비를 접하게 되었다. 산골짝 외진 밭에 쑥갓이 잔뜩 자라고 있어 이상하다 싶은 마음에 어머니를 불렀다.

 "아니 쑥갓을 텃밭에 뿌리지 않고 왜 이런 산 속에 뿌렸어요?"

 그러자 어머니 왈 "쑥갓 아니여."

 "그럼 뭐예요?"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시고, 쑥갓이 틀림없는데 쑥갓이 아니라는 그것을 한 바구니나 뜯어다가는 살짝 데쳐서 나물을 해놓았는데 그 맛이 참 묘했다. 쑥갓처럼 생겼으니 쑥갓 맛인 것 같긴 한데 쑥갓보다는 뭔가 깊고도 넓은 맛이 있는 거였다.

 "아니 이게 대체 뭐래요?"

 어머니는 여전히 웃기만 하시고, 아버지가 불쑥 한 마디 하시는데 이렇다.

 "아편이란다."

 "네?"

 양귀비 나물이 그렇게도 맛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러나 다음 해 갔을 때 양귀비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순창인가 어딘가에서 양귀비를 기르던 할머니가 구속되었다는 얘기가 텔레비전 뉴스를 타면서 어머니는 아이고, 하고는 그만 받아둔 씨앗을 개골창에 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도시생활 겁이 나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시골로 내려온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되어버린 나, 작년에 채석강으로 유명한 부안을 갔다가 양귀비를 발견하고 그 씨앗을 받아와서 금년 처음으로 마당에 뿌렸다. 뿌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는데 요 며칠 드디어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참 보면 볼수록 나를 숙연하게 한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특이한 개성 강한 종류의 화초는 난생 처음이다.  

 

 

얘들은 꽃봉오리를 맺는 방식부터가 특이하고 개성 가득인데 그 모양이 도도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을 찌를 듯이 고개를 쑤욱 내민다.

 

 

 

그리고 이틀쯤 지나면 느닷없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하늘 아래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도 있는 듯이 이렇게

 

 

그리고 이틀쯤 뒤면 다시 고개를 번쩍 들면서  분홍으로 물들고,

 

 

 

가볍게 살짝 속살를 비추는데, 속살이 비치는구나 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서서 보면  어느새 발끈 고개를 쳐든 채로 마치 한 꺼풀 두 꺼풀 옷자락을 벗어 던지듯이 속살을 보여준달까 문을 연달까 하여튼 피어난다.  

 

피어난 직후부터 이 녀석들은 갖은 요염을 다하는데, 도대체가 한 가지 모습으로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보라,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모두가 제각각이다.

 

 

 

 

이렇게 제각각인 채로 며칠이나 갈까? 세상에. 아주 길면 사흘이고 짧으면 불과 몇 시간이다. 겨우 몇 시간만에 꽃이 지는데 그 지는 것 또한 또도하기 짝이 없다.

 

 

 

 

녀석들의 꽃잎은 어떤 경우에나 네 장이다. 작아도 네 장, 커도 네 장, 오직 네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형태는 나비의 날개를 빼닮았다. 나비의 날개 같은 꽃잎이 길면 사흘만에 짧으면 단 서너 시간만에 하나, 둘. 그렇게 휙휙 떨어져 버리는데 그야말로 잠깐이다. 그렇게도 화려하고 요염하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미련이고 뭐고 아무런 흔적도 없이 다 버리고 씨방으로 오도카니 남아 있다. 

 아,

 삶이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양귀비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사족, 양귀비는 물 위에서 피는 수련만큼이나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한다. 그 많은 양귀비 중 단 두 종류만이 우리가 이른바 마약이라고 하는 성분을 함유한댄다. 내가 입수한 양귀비는 당연하게도 마약 성분과는 관계가 없다.

출처 : 산지기의 웰빙터치
글쓴이 : 나무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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