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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숨건 항명으로 `팔만대장경` 지킨 전설적 장군

이바구아지매 2006. 10. 15. 04:40
목숨건 항명으로 '팔만대장경' 지킨 전설
2006-10-13 10:19 | VIEW : 10,056

△ 빨간마후라를 두르고 멋진 웃음을 지어내는 김영환 장군. 영락없는 영화 속 주인공의 풍채다.

간혹 공군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기록을 살펴보면 늘 빠지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빨간 마후라, 신사, 멋, 낭만 뭐 이런 것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공군의 이미지가 이렇게 국민들에게 비쳐지고 있으며, 왜 우리는 지금도 이 이미지를 스스로의 DNA속에 간직하고자 노력하는지에 대한 탐구는 별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김영환 장군을 공부하며 공군의 많은 이미지들이 바로 김영환 장군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김영환 장군은 멋, 낭만, 용기, 정열 등 그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어울리는 매력적인 공군이었으며, 한국전 당시 최일선 공중 지휘관으로 ‘51년 10월 11일 역사적인 한국공군 단독출격을 포함해서 공군작전의 대부분을 선두에서 지휘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 강릉 전진기지에서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비행에 매료된 부잣집 막내 도련님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이기도 한 김영환은 1921년 서울 종로에서 부친 김준원 선생과 모친 변상희 여사 사이에서 출생했다. 종로라는 출생지가 말해주듯 그는 아주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성장했다. 김영환의 부친은 구한말 무관학교(교장은 훗날 유명한 독립투사인 노백린 장군)에 입학했다가 1909년 일본이 무관학교를 폐교시키고 생도들을 일본 육사로 편입시키는 바람에 일본군으로 복무하게 된 불운한 인물이었다.

러일전쟁에 참전 후 대위로 제대한 김준원은 이후 오산학교와 배재학교에서 지리와 역사교사로 20년 가까이 교편을 잡는다. 김영환이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이렇게 교사생활을 오래한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모친 변상희 여사의 사업수완 덕분이었다. 김영환의 모친은 당시 진명여고를 졸업한 엘리트 신여성이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예식장이라 할 수 있는 만화당 예식부萬花堂 禮式部를 만들어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 출격 조종사들의 신고를 받고 있는 김영환 대령
이렇게 부잣집 막내로 성장한 김영환은 공부에도 취미가 있어서 조선 최고의 명문인 경기고등학교(당시 제일고보)를 졸업했는데, 특히 영어 과목을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의 영어실력은 훗날 공군을 창설하기 위해 美 군정청을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는 소년시절 일본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있었던 형 김정렬의 영향을 받아 비행광이라 할 만큼 조종사를 동경하였다.

그래서 1939년 경기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 지바켄에 있는 쓰다누마津田沼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술을 배운다. 식민지 경제 하에 이렇게 민간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무척 풍족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이후 그는 일본 관서대학 항공과에 진학하여 비행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고, 1944년에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에 수학하는 등 전형적인 귀공자 엘리트 코스로 청년기를 보냈다. 전해지는 그의 삶의 패턴이 늘 거침이 없고 시원시원했던 것은 아마도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만큼 재력과 포용력이 있었던 집안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 美군사고문단과 작전 협의 중인 김영환 대령
공군창군의 교두보가 되어
그렇다고 그가 단순한 낭만파 귀공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후 그는 바로 군사영어학교(1945년 12월부터 46년 4월까지 존속했던 군사영어학교는 해방 한국에서 장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주로 식민지 시절 군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이 입학했다)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육군 6연대(현 6사단의 전신) A중대장으로 보임되어 공군창군 주역 7인중 가장 먼저 한국군 군복을 입게 된다.

그의 형 김정렬 장군이 버마전선에서 해방을 맞고 귀국선을 구하지 못해 1년 가까이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전전하다 1946년 5월 15일 민간인 신분으로 간신히 귀국했을 때 김영환은 이미 그의 출중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미군정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 대리로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는 항공인들이 500여명 정도 있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항공분야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하고 싶어했고, 유일한 길은 공군의 창설이었다. 그들 모임의 중심은 일본군과 중국군 등에서 항공부대를 지휘한 경력이 있는 7인의 간부(최용덕, 김정렬, 이근석, 박범집, 이영무, 김영환)였는데, 이 중 상대적으로 경력이 약한 것이 김영환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뜻만 있지 아무런 정보도 힘도 없을 때 김영환은 미 군정청의 정보를 바로 접할 수 있는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의 자리에 있었다. 그가 정보국장(대리)이었다는 것은 항공인들에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통해 얻어지는 각종 정보들은 항공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항공부대 창설을 준비해야하는지의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고, 미 군정청을 상대로 한 그의 적극적인 설득은 훗날 항공부대 및 공군창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배짱 두둑한 로맨티스트

△ 장덕창 장군과 김영환 대령의 하모니
김영환은 우리 공군의 창군멤버 중 가장 나이가 어렸고, 또 짧은 생(34세로 요절)을 살다갔지만 그가 남긴 일화는 많고 또 드라마틱하다. 공군이 창설되고 미국으로부터 L-4 비행기가 들어왔을 때다. 공군 초대총장 김정렬 장군의 집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웬 비행기 3대가 한강 다리 아래 교각 사이로 비행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예나 지금이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총장이 있겠는가?

범인들을 잡고 보니 당시 공군 3총사로 이름난 김영환, 김신(백범 김구 선생님 차남), 장성환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다음에는 이화여대에서 또 전화가 왔다. 비행기 3대가 수업 중에 자꾸 이화여대 위를 날아다녀서 수업에 지장이 있다는 민원이었다. 물론 또 그 공군 3총사였다. 훗날 김정렬 장군은 이때의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당시 치기 넘치던 총각들이라 그랬을 거라며, 당시 크게 혼을 내었다고 했다(김정렬 장군의 부인 이희재 여사는 한강 다리 아래 비행으로 영창에 보냈었다는 증언을 최근 공군웹진 ‘공감空感’의 취재진에게 했다). 이때 이들의 행동은 물론 후배들이 본받을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의 객기는 한국전 발발 후 두려움 없이 적의 대공포화 사이를 가로질러 목표물을 공격하는 용기로 재생산되었다.


△ ´51년 6월 공군비행단 본부 앞에서
(왼쪽부터 김영환, 장지량, 김신 장군)
이런 김영환의 배짱은 ‘51년도 여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때 또 한번 재현되었다.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F-51 네 대가 지리산으로 출격했을 때 김영환의 비행기가 적에게 피탄되어 남원 남쪽 섬진강변의 좁은 모래사장에 불시착하게 된다. 편대원 김두만 장군의 수기에 따르면 불시착도 어려운 좁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약 6,000여명의 공비들이 진을 치고 있던 적진의 가운데였다.

함께 편대를 이루었던 김두만, 박희동, 주영복은 적들이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해서 엄호비행을 하며 애타게 지상을 보고 있는데 추락한 항공기에서 빠져나온 김영환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그는 손을 쳐들어 자신의 안전을 편대원들에게 알린 뒤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는 섬진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습이 김영환이었다.

이렇게 터프하기만 하다면 그에게 로맨티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하던 시기, 하루는 이틀 일정으로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연락비행을 떠났던 김영환이 야간비행으로 여의도 기지로 다시 돌아왔다. 이 때 비행기에서 내린 김영환은 항공기 동체에서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꺼내들었단다. 전쟁의 혼란함 속에서도 전장을 누비는 자신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을 아내에게 선물할 강아지를 구해온 것이다. 바로 그 전쟁터에서…

브랜드 가치를 이해한 최초의 공군인
김영환은 요즘 회자되고 있는 공군의 브랜드 가치를 이해하고 관리한 최초의 인물로 보여진다. 그는 L-4 연락기 밖에 없던 시기에도 그 비행기 꼬리 부분에 번개를 그려 넣어 전투기 분위기를 내고 비록 나라가 가난해서 전투기는 없지만 스스로가 전투조종사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한 자신만의 독자적 브랜드를 특별히 관리했는데, 그의 군모와 비행장화는 마치 1차대전 당시의 에이스 리히토펜Manfred von Richtofen 대위를 연상케 했다고 전해진다. 독일 공군 스타일의 모자챙과 긴 장화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멀리서도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착용하여 지금은 한국공군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 역시 기존의 관행과 습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에서 탄생된 것이다.

강릉 전진기지 사령관 시절 형수 이희재 여사의 자주색 치마를 보고 조종복과 어울릴 것으로 생각한 김영환은 주저 없이 형수에게 자주색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치마단 자투리에서 우리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가 나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 순식간에 온 공군에 빨간 마후라가 퍼진 것으로 보아 당시 멋쟁이 김영환에 대한 후배들의 선망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팔만대장경을 지킨 분별력

△ 부대 순시중인 제10전투비행단장
김영환 대령과 백선엽 소장(′53년 3월 강릉기지에서) 김영환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종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민한 판단력이다. 그리고 그 판단력의 근간은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역사와 반역사를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다. 그는 이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옳음과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었다. 한국전시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빨치산 활동은 그 규모면에서도 대단했지만 전선의 후방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후방에서 지상군의 발목을 잡는 유격전은 우리 육군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숨어서 바라보는 자들을 잡으러 들어간다는 것은 몇 배의 인원이 필요했고 위험 부담도 컸다.

이때 미 5공군으로부터 한국 공군에 공격 명령이 하달된다. 해인사에 공비들이 은거해 있으니 해인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F-51에는 500파운드 폭탄과 기총은 물론 네이팜탄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네이팜탄 한발이면 온 사찰을 잿더미로 바꿀 수 있고 우왕좌왕 뛰어 나오는 적들을 기총으로 공격하여 전멸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의 명령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 정복을 갖춰 입고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바로 이때 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이 작전을 선두에서 지휘한 김영환의 ‘특별한 분별력’이 발휘되었다. 그는 이 참담하고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이 드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인사 안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쟁을 수행중인 조종사라도 모든 것을 아무 생각 없이 파괴하는 것에 그는 동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9대 공군참모총장 역임)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환 대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미군이 파리 폭격을 중지한 것을 회상하고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팔만대장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로 해인사 폭격을 중지 시켰다고 한다. 공비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저절로 사찰을 떠날 것이므로 이들을 한번에 격멸하고자 사찰 전체를 공격하여 팔만대장경을 소실케 한다는 것은 당장의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으나 역사와 후손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미군정 연락장교와 멱살잡이를 할 정도로 마찰을 빚었지만, 그의 높은 역사인식과 분별력으로 우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게 된 것이다.

‘美’를 느끼고 감동할 수 있었던 사람
필자가 김영환 장군에 대해 자료를 찾으면서 가장 감동했던 것은 한국전시 정훈감실에서 발간했던 전시뉴스레터 ‘공군순보’에 실린 그의 글을 읽을 때였다.

“적진을 향할 때 금강산의 비단결 같은 단풍을 본다. 우리 조종사들에게는 적을 분쇄할 생각 외에는 없다고 해도…집중된 목표 밖에는 전연 생각 아니 되는 것도 아니며…그러므로 우리들은 금수강산 중에서도 금강산의 고운 단풍을 볼 적마다 지극히 우아한 시정詩情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다만 美에서만이 아니라 조국애와 향토애에 기반한 치열한 美感일 줄 안다.”

적진의 대공 포격이 곧 시작될 즈음에도 그는 순간에 다가온 금강산의 미를 느끼고 그 감동을 기록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차원에서 김영환은 죽는 순간까지 행복했다고 보인다.

1954년 3월 4일 사천기지 단장시절 강릉 비행단 창단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애기(F-51)를 몰고 강릉으로 가던 그의 마지막 날에도 그는 동해안을 따라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비행했다고 전해진다.그 날 그의 항공기는 착륙예정 시간을 지나서도 강릉기지에 나타나지 않았다. 예기치 않았던 악천후를 만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끝내 자그마한 자취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하늘의 사나이답게 하늘로 사라졌다.

그렇게 그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원한 공군의 전설이 되었다.

기사제공 = 공군뉴스레터 / 공군본부 강성구 중령
출처 : http://www.airforce.mil.kr:7778/news/afnews/afnews_3_1360.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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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대를 바라보는 눈
글쓴이 : 와이즈드래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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