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야기

[스크랩]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검은 슈바이처~~*

이바구아지매 2006. 11. 14. 14:03
 

사진 속의 선한 모습이 그의 인생을 대신 말하는 듯합니다~~

남아공에서 인종차별법으로 얼마나 많은 유색인종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는지...

그저 책에 있는 몇 안되는 활자들을 읽으며 머리 속으로만

그려보던 것이

이제야 마음으로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아무 상관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며

따뜻하게 반기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시길 기도합니다.~~*

 

남아공 흑인정원사, 義醫師로 ‘인생역전’

 

[경향신문 2005-07-04 19:18]

 

2005년 6월 데일리텔리그라프와 이코노미스트 등 영연방 국가의 유력지들은 5월말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숨을 거둔 한 은퇴한 흑인 정원사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놀라운 사연이 담긴 일생을 살았다.

 

1967년 5월 29일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는

뇌사한 젊은 여성의 심장을 심장병 환자에게 이식한 세계최초의 심장이식수술이 행해졌다.

수술팀의 책임자는 미국에서 활약하다 귀국한 크리스챤 바나드박사로 이 수술의 성공으로

세계의료계의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이 수술의 이면에는 극적인 이야기가 숨어있다.

바나드 박사가 언론의 각광을 받을 때면 그의 곁에는

케이프타운대학교의 흑인 정원사가 조용히 함께 자리하곤 했다.

그의 이름은 해밀튼 나키(1926~2005).

‘공식적인’ 직업은 케이프타운대학의 정원사, 혹은 잡무를 처리하는 ‘사환아저씨’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종차별법(apartheid)이라는 무자비한 법이 유효하던 남아공에서

세계최초로 이뤄진 심장이식을 집도한 이는 의사도, 백인도,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닌

해밀튼 나키였다. 그가 세계최초의 심장 수술을 집도하고,

그 이후에도 장기 이식 수술과 동물 마취분야의 권위자가 된 것은 긴 사연이 숨어있다.

 

해밀튼 나키는 자상했지만 매우 가난한 부모사이에

1926년 6월 13일, 남아공의 응칸가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른 가난한 흑인 아이들처럼 해밀튼은 방과 후에 맨발로 소떼를 돌봐야 했다.

겨우 초등교육은 마쳤으나 너무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이 후의 교육은 받을 여유가 없었다.

14세에 해밀튼 소년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수도인 케이프타운으로 상경하게 된다.

그는 다행히 대학에 정원사보조(학교사환)로 취직하게 되고,

잔디도 깍고, 테니스장과 화단을 관리하는 게 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물실험을 진행 중이던 로버트 고에츠박사가 학교 관리소장에게

동물실험을 도울 힘 좋은 젊은 일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의 인생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해밀턴은 부지런한데다가 머리가 좋아서 곧 비공식(!)적인 의료인으로 일하게 된다.

처음에는 대학의 의료 시설의 실험용 동물우리를 청소하고, 동물들의 체중을 재는 등의 일로 시작해서, 점차 실험용 동물에 주사를 놓거나 수술전에 동물을 면도하는 조금 더 복잡한 업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그는 손놀림이 매우 안정되고 예리해서 외과의사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곧 동물의 절개, 봉합 등의 실제 수술을 맏게 됐다.

그의 수술기술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돼지의 간 이식 수술을 하면서

의대생의 어린 딸을 위해 유모차를 계속 흔들어 줬었다는 얘기도 있다.

 

해밀턴의 방대한 해부학적 지식과 예리한 직감, 분석적인 사고는

그후 케이프타운의 젊은 의대생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 사이에서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교육을 못받은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내눈과 귀가 나의 대학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케이프타운의 빈민가에서 폭동이 난무하던 시기에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직장에 늦지 않게 도착했으며

출근할 때는 빳빳이 날새운 바지와 반짝거리는 구두, 신사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야심많은 젊은 의사 크리스찬 바나드 박사가 미국에서 케이프타운에 돌아온 후

해밀튼 나키가 반드시 자신이 추진하는 흉곽이식수술팀에 참여해야 한다고 고집했음은 물론이다.

1967년 바나드 박사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심장이식 수술을 루이스 와시칸스키에게

시술해 첫 성공했을 때, 해밀튼 나키는 기증자의 심장분리부터 수술완료까지

전과정에 참여한 주요 팀원이었다.

그러나 인종차별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흑인이 수술실에 백인동료들과 함께 백인 몸속의 장기를 다루고, 백인을 살리는 수술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에게도 동료들에도 무척 위험한 시도였다.

후에 해밀턴이 회고하기를

“절대로 누구에게도 당신에 여기서 뭘 했는지 알려지면 안된다”는 주의를 계속 받았다고 한다.

 

수술이 성공한 후 젊고 수려한 용모의 바나드 박사는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수술 후 그 옆에서 환하게 웃음짓던 해밀튼 나키는 늘 ‘공식적으로는' 대학의 정원사로 남아있었다.

수술성공 후 해밀튼 나키에 대해 대학 당국은 청소부, 혹은 정원사라고 둘러댔다.

해밀튼의 공식직함은 정원사였지만 비공식으로는 실험실 연구원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의대생들의 지도하고 수술을 지원하는 (‘공식적으로' 주요시술자는 될 수 없었다)

외과담당 의대교수의 업무를 봤고 급료는 실험실 연구원수준으로 받았다.

대학측도 그에게 더 많은 봉급을 줘야 함을 알았지만 학위가 없는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

크리스챤 바나드 박사는 후에

“해밀튼 나키의 기술이 나 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의 손재주가 나보다 나았고, 특히 봉합기술이 훌륭했고, 수술실에서는 매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해밀턴은 실험실에서는 의대생들에게 사람의 심장이식 보다도 휠씬 복잡하다고 알려진

돼지간 이식수술을 지도했다. 세계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에 참여한 것 외에도

그는 기술적으로 심장이식 보다 어렵다는 간이식의 권위자였고 동물마취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의대 입학이 허용되고 정규의학 교육을 받은

매우 훌륭한 ‘공식적인' 외과의사가 될 기회가 있었겠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을 숨겨져있는 귀한 존재로 살아야 했다.

흑인으로 그것도 교육도 많이 못한 사람이 그런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은

인종차별 법안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알려졌다.

해밀턴은 은퇴한 후 ‘정원사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야 했고

형편이 어려워 자녀중 한명만 고등학교를 졸업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의료계의 인맥을 이용해 아프리카 오지의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와

진료소 설립에 힘썼고 많은 흑인 학생의 의대진학을 도왔다.

2003년에는 케이프타운 대학은 ‘공식적인' 명예의학석사 (Master's) 학위를 그에게 수여했고

대학교의 공식사이트에도 대학역사 175년 사상 길이 남을 인물 중 의료부문에

크리스챤 바나드 박사와 함께 나란히 소개 되고 있다.

 

다음은 해밀튼이 젊은세대에게 남긴 조언이다.

 

“나는 많은 젊은 세대가 내가 한 일에서 영감을 얻길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들 더 많은 의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말했다. “날 보세요. 가능한 일입니다!”

 

“I would like it a lot if the young generation could find inspiration in my work. Our country needs more doctors, especially from the disadvantaged-community.”

He says. “Look at me. it can happen!”

 

 

 

출처 : 나는 류성혜다^^v
글쓴이 : 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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