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버지니아의 용서
1974년 미국 마이애미의 열 살 소년 크리스 캐리어는 ‘아버지 친구’라는 50대 남자에게 유괴돼 머리에 총을 맞았다. 크리스는 한쪽 눈을 잃고 운동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로부터 22년 뒤 유괴범이 자수했다. 해고된 데 앙심을 품은, 아버지의 고용인이었다. 그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앙상한 뼈만 남은 77세 노인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크리스는 그만 맥이 풀렸다. 노인은 크리스의 손을 움켜쥐고 “잘못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크리스는 “괜찮다. 다 용서한다”고 했다. ▶1985년 미 육군 상사 대니얼 콜먼은 여동생이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에 LA 현장으로 달려갔다. 경찰은 “살인사건이 너무 많다”며 나흘 만에 수사를 포기했다. 대니얼은 “내 손으로 복수하겠다”며 핏발 선 눈으로 전국을 헤맸다. 증오는 그의 몸과 마음을 철저히 파괴했다. 2년 반 뒤 대니얼은 여동생 무덤 옆에 나란히 눕게 됐다. ▶1999년 4월 미 콜로라도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2학년생 에릭과 딜런이 학생 12명과 교사 한 명을 쏘아 죽이고 자살했다. 추모식장에 포스터가 붙었다. “억울한 희생자 13명 에게만 꽃과 기도를 바친다. 두 명의 악마는 제외한다.” 교정 언덕에 15명의 묘지가 세워졌다. 일부 희생자 가족은 “살인자도 똑같이 대접하느냐”며 무덤 두 곳의 십자가를 떼어 버렸다. ▶버지니아공대 광장에 총기난사 사건 추모식장이 마련됐다. 범인 조승희의 추모석도 희생자 33명 중 네 번째 자리에 있다. 거기에 사건 뒤 사흘째부터 꽃과 편지가 놓이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걸 알고 마음이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니. 홀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네게 손 한번 내밀지 않았던 나를 용서해 줘.” ▶이 대학 인터넷신문엔 조승희의 가족을 위로하는 글들이 오르고 있다. 조승희 누나의 사과문에 대해 한 네티즌은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위로했다. 다른 네티즌은 “내 기도 명단에 조승희 가족을 올린다”고 했다. 지난 20일 정오 교정에 33번의 조종(弔鐘)이 울렸다. 그리고 33개의 풍선이 날아올랐다. 조승희의 영혼도 이제 편안히 하늘로 날아오를 것으로 믿는다. 15년 이국생활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바윗덩어리 를 친구들의 용서 속에 내려놓고서.- 2007.4.24일자 조선일보 만물상 김창균 논설위원 ck-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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