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스크랩

[스크랩] 유리창을 떠도는 벌들의 운명

이바구아지매 2007. 5. 11. 07:14

 

방문을 살짝 열어놓고 마당을 본다. 햇살이 완연한 여름이다. 이제 겨우 오월도 초입인데 벌써 여름이구나, 어쩌고 생각 아닌 생각에 빠져 있는데 벌 소리가 들린다.

 

 벌 한 마리가, 아주 익숙하게 방으로 들어오더니 도로 얼른 나간다. 만약에 녀석이 바로 나가지 않고 좀 더 안으로 들어왔다면, 녀석은 아마 한참을 헤매게 되었을 것이다.

 

 이인성의 소설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가> 생각나기도 하고, 어느 시절 생각도 계획도 없이 떠났던 여행이 생각나기도 하고 온갖 쓸데없는 잡생각이며 그럭저럭 쓸만한 생각이며 등등 기타 다양한 이미지가 잡히기도 하고 내 마음의 상태가 영 수상쩍다.

 

 이인성의 소설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 속의 벌은 자신의 실수로 자신이 갇힌 상태의 벌이다. 꿀을 찾아 나선 벌이 식당에서 풍기는 맛난 냄새에 끌려 불쑥 들어왔으나 맛난 것은 찾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제 나가려고 하는데 상황이 영 이상해져 버렸다.

 

그동안 열심히 다녔던 거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꾸 진로를 방해한다. 유리창에 대한 지식도 개념도 없는 벌은 그리하여,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작은 출입문이 열려 있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는 못하고, 드넓은 유리창을 상대로 일종의 투쟁을 전개한다. 내가 저기로 가려 하는데 내 길을 막는 이 존재가 대체 무엇인 것이냐. 돌아버릴 듯한 상황이지만, 그러나 벌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주저앉지도 않고, 집요하게, 웅웅 소리를 내며, 딴에는 유리창을 위협하며 길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인성의 이 소설은, 일종의 알레고리로써, 80년이라는 시대의 암울과 우울을 상징하거니와, 그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다른 어떤 상징 하나가 오늘 나를 사로잡는다.

 

 이를테면 소위 운동권 인사들의 시각이라랄까 세계관이랄까 뭐 그런 것들, 길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길이 좁거나 작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혹은 아예 발견하지 못하는 협애의 철학 같은 것들, 돌아보면 그게 또 그렇다.

 

 그 무슨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그나마의 조직을 쪼개고 또 쪼개 버리는 노선투쟁이며 헤개모니 쟁탈전 같은 것들, 그 지지리궁상 같은 단편들이 오늘 나를 우울하게 한다.

 

 어느 해인가, 같잖게도 덜컥 새로 만든 무슨 조직의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말았더랬다. 내가, 이 웃기는 짜장면 같은 내가 위원장이라는 명색으로 회의를 주재하는데 첫판부터 제동이 걸렸다.

 

 "농민단체가 엄존하고 있고 활동 또한 왕성한데 농업분과가 왜 필요합니까?"
 "현재의 농민단체는 그 성격이 이익단체에 가깝지 않습니까? 좀 더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민회가 이익단체라니요. 말 조심하세요."


 기왕지사 내뱉은 말이었고, 그리고 그 말은 평소 내 견해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말조심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만약에 현재의 농민단체를 유사 이익단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참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건강한 단체가 있는데 또 다른 단체를 뭣 땜에 만들 것인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조직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조직의 구성원은 절반 이상이 농민단체 회원들이었다. 농민단체 회원들이 볼 때, 새로 만든 조직에서 농업 분야를 다룬다는 것은 뭐랄까, 아무래도 자기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어떤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불안한 느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 조직은, 우여곡절 끝에, 그야말로 진부한 단어 그 우여곡절 끝에, 그러니까 말싸움만 디지게 하다가 활동다운 활동은 하나도 해보지 못한 채로 깨지고 말았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너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맡길 수 없다는 아집이랄까 뭐랄까 이 집요한 헤개모니 쟁탈전은 기실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폭탄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는 요즈음 정치권의 행태는 가히 삼류급 코미디라고나 칭할만 하겠는데,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런 식의 헤개모니 쟁탈전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비용은 너무나 크다.

 

 길이 있는데도 작다고 무시하고 집요하게 유리창이나 떠도는 벌의 운명은 그 뒤로 어떻게 될까. 결국은 날개에 힘을 잃고 툭 떨어져서 위잉거리다가 죽어갈 텐데, 그 시체를 치우는 임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국민이라는 존재는 이래도 손해 저래도 손해, 온통 손해뿐인 존재가 되고 만다.

 

 

 

 

 

출처 : 산지기의 웰빙터치
글쓴이 : 나무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