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스크랩] 그 옛날 오줌거름의 추억

이바구아지매 2006. 7. 20. 07:36

내 고향 애월 어음리를 다녀오는 길에 아들녀석이 차를 세우라고 했다. 조상님이 살던 고향을 어린 마음에도 한번 더 머리 속에 넣으려나 보다. 흐뭇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잡고 시동을 껐다. 머리 속에는 컴퓨터 게임기술만 잔뜩 들어 있는 녀석이 아주 대견스럽다.

"아빠, 사람들이 오나 안 오나 잘 살펴요"
"아니, 왜?"
"오줌 싸야된단 말예요"

그러면 그렇지. 난 또 우리집 쫄병의 가치관이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되는 줄 알았다. 녀석에 대해 긍정적인 점수를 주려던 생각을 거두고 고향 들녘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

"잠깐!"
"왜? 사람 와요?"
"아니, 이왕 싸는거 밭에 들어가 싸면 안될까?"
"또 왜? 망보기 싫은거야?"

 

오줌이 거름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그 옛날 제주에서는 이 오줌은 모든 농작물의 훌륭한 웃거름(추비)이었다. 특히 고구마 모종이나 보리밭의 거름으로는 이 보다 좋은 비료가 따로 없었다. 우영팟(텃밭)의 배추포기에도 오줌거름을 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골집에서는 오줌을 참기름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 흉년이 잦았던 제주, 보리 이삭 하나에 보리 서너 알맹이가 달리는 일이 흔한 시절이니 오줌 한방울이 실날 같은 희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집집마다 오줌항이 있었다. 식구들의 오줌을 받아 두는 싸구려 항아리였기에 모양새는 그리 좋지 못했다. 찌러진게 보통이었다. 오줌항이 놓이는 자리는 '통시'(제주 재래식 변소이자 돼지우리) 옆이다. 일 보러 통시에 갈 때는 우선 오줌항에다 오줌을 싸고, 그 다음 도새기(돼지)의 식량이 되는 똥을 싼다.

이 중요한 절차를 무시하고 어린 나는 오줌과 똥을 원샷으로 자주 싸는 일이 많았다. 생리기능을 망각할 정도로 노는데 한눈 팔다 보니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로부터 골프채는 아니지만 작대기로 골프공이 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누이도 구원의 수호천사는 고사하고 "도새기 보다 못한 넘"이라며 독하게 아버지를 거든다. 가족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공동전선이 척척 구축된다. 당연히 화풀이 대상은 누이였다. 사나운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 하지 않는 누이는 끝내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아예 사람을 잡는 무서운 집안이다.

 

오줌은 일주일이면 썩는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바닷물을 조금 길어다 섞었다. 썩는 시간이 더욱 빨라지고 오줌거름의 양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오줌거름은 많은 양이 필요하지만 항아리를 가득 채우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식구들이 한달동안 오줌을 누어야 다 채울 수 있다. 항아리의 오줌은 허벅으로 운반했다. 이 허벅은 부리는 좁고 배는 불룩하여 보다 많은 오줌을 담을 수 있는 제주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이다.

오줌생산이 여의치 않다 보니 동네를 싸돌아 다니며 놀던 아이들도 오줌을 쌀 때는 꼭 자기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누었다. 누이는 오줌을 참지 못하는 동생의 못된 습성을 의식해서인지 자꾸 신들린 듯 놀이에 빠져있는 동생을 집에 직접 끌고 갔다. 막상 누이의 감시속에 오줌항에 쉬를 보는 날에는 부엌문에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따뜻하게 잡혔던 것 같다. 아버지가 즐겨 사용하던 작대기도 그 날은 일감이 없어 조울조울 졸기에 바쁘다.

보리밭에서 연을 날리면서 놀다보면 음력 정월을 전후로 하여 보리싹이 파릇파릇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줌거름을 주는 시기는 이 때다. 한마지기 150평에는 스무 허벅 정도 뿌려야 보리가 반응을 한다. 오줌거름을 맛나게 먹은 보릿대는 희망을 품고 검푸른 빛을 낸다.

사람과 보리와 화산밭이 함께 공존하면서 아름다운 순환이 이루어지던 내 고향 들녘에는 벌써 붉은 노을이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아들넘은 돌담에 걸터앉아 말타기에 여념이 없다. 내 자식에게도 아버지의 고향은 있는 걸까. /화산섬

출처 : 내 마음속의 굴렁쇠
글쓴이 : 화산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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