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스크랩] 백수생활 백서

이바구아지매 2006. 8. 23. 06:56
 

 

 

백수생활 백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 책은 얼핏보면 백수들의 한가한 일상을 늘어놓은 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서론은 백수생활을 하는 여자가 매일 책을 읽는 걸로 시작되서 일년에 오백권 가량을 읽다가 거의 오천권에 육박한 후에 결국은 소설로 귀착한 "글쓰기론"이다.

 

우선 동서양의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전부 다 등장하고 수많은 책 속에서 보석같은 구절들을 적절히 인용해가면서 이어지는 이 소설 한권만 독파해도 유명한 작가들의 알사탕 같으면서도 꿀처럼 달콤한 글들을 줄줄이 맛볼 수 있다.내가 대략 손꼽아 본 소설만해도 수십여편이 되고 인용한 작가들만해도 수십여명에 이른다.

 

다행히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낯설게 다가오는 작가는 별로 없었다.다행인지 우연인지 내가 읽은 소설들이 나올 때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거의 전율을 했다.뭐니뭐니 해도 이 소설의 강점은 놀라운 독서에서 비롯된 왕성한 호기심과 차분한 글쓰기에 있다.

 

우선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처음으로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밑줄은 이렇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단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연인>-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에 의하면 공공교육은 시간 엄수와 순종,그리고 기계적인 반복 작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시간을 엄수해서 꼬박꼬박 출근하고 불평없이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며 지루한 반복 작업을 견뎌내는 건 그 이전에 학교를 거쳐 오랫동안 그렇게 하도록 회사에 갇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갇힌다.

 

감옥을 감옥 아닌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죄수들은 딴 짓을 했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누군가는 낙서를 하고 누군가는 잠을 자고 누군가는 상상을 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었다.그러므로 그 시간은 분명 시간 낭비였다.그러나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 지옥에서도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그러므로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나만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내가 여전히 어디로든 튈 수 있음을 믿는다.그래서 내가 몹시 철없는 이십 대 후반을 보내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 때 나를 구원해준건 책이었어요.도서관에 쌓인 수많은 책들.

그 책들은 내가 내 의지로 손에 들지 않으면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는 참된 친구였어요.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거든요.아니,그 반대지요.

좋은 소설이란 완벽한 거짓말로 꾸며진 또 하나의 진실이니까요.

나는 책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친해질 수 있었던 건그 무렵이었죠.

 

나는 책을 통해 혼자 노는 법을 익혀 나갔습니다.

그러자 점점 외로움이 즐거워졌어요.

도서관의 책들이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지요.

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즈음에 깨달은 거예요.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소설들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건방진 말인지 모르지만 ,

부족한 부분을 비평해가며 읽으면 게임하는 것처럼 즐겁거든요.'

-쓰지 히토나리<사랑을 주세요>-

 

 

'매일 나는 엄마를 생각한다.

기장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커다란 갈색 눈을 지니고 있었고,

남자들을 울게 했던 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게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기억한다.'

-마갈리 가르시아 라미스<일주일의 칠일>-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의 악랄한 작가 선생 프레텍스타 타슈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직업이 바로 작가인지도 모르겠다.타슈는 문체니 주제니 줄거리니 수사법 같은 것들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오로지 작가 자신이라고 했다.작가들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일 뿐이라면 그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임에 틀림없다.자신을 기록함에 충실한 사람들,자신이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럴듯한 애인도 없이 자랑할 만한 직업도 없이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책이 있다.추운 방에서 홀로 책을 읽으면서 지내도 누구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실 돈많은 남자는 미모만 가진 여자를 선택하기도 하지만,돈 많은 여자는 대부분 자신보다 더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한다.사실 수많은 책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예쁜 여자가 부자에다가 멋지기까지 한 남자를 만나는 건 흔하디 흔한 사건이다.그러나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오로지 가진 것이라고는 외모밖에 없는 남자는 대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신데렐라를 꿈꾸는 남자에게는 세상도 작가도 관객도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이성에게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은 하나는 변태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영하<포스트 잇>-

 

 

 

책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책은 이미 한 사람을 완전히 통과해서 정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작가처럼 일관된 어조로 자신을 설명할 수도 없고 상황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얼굴은 그 인간이 거주했던 모든 영역을 담고 있는 세밀한 지형도가 아니었던가.

마푸체 인디오들은 얼굴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지도이며,

그 지도가 가리키는 영토가 실재한다고 믿었다.'

-루이스 세풀베다-

 

하나에 정통하면 그것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

정말 현명해지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은 결론을 가르쳐주지만

소설은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생각하는 법을 몸에 배게 해준다.

스스로 얻은 결론만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이가 창조한 또 다른 이의 다른 세계를 읽다보면 때로는 해답이 보인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언제나 책에서 찾는다.

작가가 숨겨 놓은 것 혹은 작가가 그러기를 바라며 써놓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른 것을 찾는다.

오직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그 무엇.

 

-책 속에도 세상이 있어요.

책 속에도 너무 많은 죽음이 있고 너무 많은 사랑이 있고 너무 많은 이별이 있으며

너무 많은 슬픔과 분노와 기쁨이 있다.

나는 날마다 그런 것들을 겪는다.

때로는 나인 것처럼,때로는 완전히 타인인 것처럼.

독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세상이다.

 

키케로는 '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그것은 영혼이 없는 육신일지니.'라고 했다.

모든 책을 소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책은 반드시 소유하고 싶다.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같은 건 나에게는 반드시 소유해야만 하는 책이다.

 

책에는 시간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내가 읽은 책들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남아있다.

내가 그 책을 선택한 이유,어떤 책은 다만 기억으로,

어떤 책에는 밑줄로,어떤 책에는 낙서와 메모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책은 인쇄된지 얼마 되지 않아도

표지가 구겨지고 책장이 너덜너덜한 반면

아무도 찾지 않은 책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빳빳하다.

어쩌면 사람도 책처럼 많이 사랑받을수록 수명이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

 

책은 현실도피를 위한 최면제로 사용되거나 자신의 상황이나 환경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현실을 잊고 어떤 사람은 책을 통해 현실을 이해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글을 써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초등학교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글을 읽는다.하지만 읽을 만한 글을 써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어떤 사람은 평생 제대로 된 글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읽는 것과 쓰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된 후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작품이 소설로 통용된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그런 말을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아마 써야할 필연성이 없었던 것이리라.

필연성이 없으면 -가령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아무도 소설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썼다.

그것은 역시 내 안에 그럴만한 필연성이 존재했다는 뜻이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 어느 봄날 ,

야구장의 외야석에서 결심했던 것처럼 아무튼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 써보고 싶어진 것은 아닐까.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쓴다는 것,'그런데 나는 썼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내가 부러워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 쓰인 글을 읽는 일이 즐겁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소동파의 <마음 속의 대나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다.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산천의 구름과 안개,초목의 꽃과 열매도 충만하고 울창하게 되어야 밖으로 드러나듯이

마음 속 생각이 충만하면 글은 저절로 써진다고.

 

세상에는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작가 선생입네,하면서 쓰는,

나는 정말로 글 잘 쓰거든,하는 티를 내지 않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대화하는 것처럼 교감을 나누듯 쓰고 싶다는 얘기인것 같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이든 간에 작품 전체에 우선 생기가 넘치느냐 넘치지 않느냐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치밀하지 못한 줄거리와 구성으로 온통 뒤죽박죽 불완전하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책들이 있는가하면 ,그와는 반대로 빈틈없이 잘 쓰인 완전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죽은 생기 없는 책들이 있는 법이다.

 

'완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쉽게 그런 책들을 손에 잡지는 않는다'

-알베르트 모라비아-

 

소설의 가치는 읽는 독자가 각자 결정한다.

평론가들이 뭐라고 쓰든 언론이 뭐라고 떠들든 소설은 읽는 자의 몫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피력할 수는 있으나 독자가 그것대로 하지 않는다.

독자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다가선다.

연애 소설에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어려운 학술 책에서 문학 책 못지않은 예술적 문장들을 찾아내는 이도 있으며,

시대를 따라가는 유행하는 책에서 동질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똑같은 책을 읽고도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책을 읽을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누군가 사과나무를 심듯이 묵묵히 책을 읽을 것이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읽던 책은 마저 읽을 것이다.내게 가능성은 언제나 둘이었다.

죽음 혹은 책 읽기.그 가능성 가운데 늘 책 읽기를 선택해 왔다.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책 속에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집을 짓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귀환한다.

 

인간의 모든 순간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내가 읽어 온 책들은 너무 길고 너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허무를 사랑한다.

그 수많은 허무의 갈피들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인생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자는 피로와 잠을 깨야하는 피로를 견딜 수 없어 자살한다.'고 썼던 보들레르처럼 매일 유서를

쓰듯이 살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고도 20여 년을 더 산 보들레르보다 더 지독하게 나는 앞으로 몇 십년을 살아갈 것이다.절대 자살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 것이다.

 

죽을 때 단 한 번 지상으로 내려와 쉰다는 새.이 여행은 '발 없는 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새처럼 나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책을 읽을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 책의 미덕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설적 토대를 이룰 만한 스토리는 사실 좀 빈약하다.

관념만으로도 충분히 소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일이라면 이 소설은 그런대로 성공했다고 본다.

 

다만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은 도무지 그 흔적의 고리가 잡히질 않는다.

고교시절 내내 잠만 자다가 어느날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한 고등학교 동창 '유희'의 일상은 만화 같기만 하고, 갖고 싶었던 책을 사기 위해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알게된 주인공 '서연'과 남자와의 관계는 추리소설처럼 난해하다.

 

 

중학교 동창인 유부녀 '채린'이 바람을 피우는 과정을 묘사한 대목은 하이틴 로맨스의 한 대목 같다.

채린은 대여점과 비디오 가게를 겸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을 전부 다 써버리는 미시족이다.

아이도 갖지 않고 자기 인생을 즐기면서 주로 에쿠니 가오리의 연애소설들과 하이틴 로맨스와

'정사'류의 비디오를 좋아하는 이 시대의 '폼나는 여왕님'이다.

물론 남편 외에 다른 남자들과 짬짬이 바람을 피우는 건 일상이 되어있다.****

 

"한 사람이 아홉 번의 인생을 윤회하면서 태어날 때마다 한 번씩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사람과 만난대.

그냥 스쳐갈 수도 있고,어쩔 땐 조금 만나다가 슬프게 헤어지기도 하고,그러다가 아홉 번 중에 한 번은 꼭 사랑을 이룬대.그런 사람을 소울 메이트라고 한대.그런데 신기한건 그 이루어질 때의 만남에서는 한눈에 상대가 자신의 소울 메이트라는 걸 느낀대."-정사(Intimacy)中에서-

 

"우리 결혼은 뭔가 잘못됐어.남편은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도 혼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살았어.

알아서 일어나서 씻고 시리얼과 우유,블랙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스스로 주말마다 다려놓은 말끔한 셔츠를 입고 넥타이도 척척 골라매고 나갔지.

그와 함께 사는 집에서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살아 있는 것 뿐이었어.믿을지 모르겠지만 남편이랑 단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싸우지 않는다는건 서로 기대하는게 없다는게 아닐까?"

-채린-

 

나는 채린에게 책을 권하고 싶다.

이를테면 추리소설 같은 것.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해될 확률보다 아는 사람,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사랑은 잔인하다.

 

이 세상의 모든 로맨스의 결말은 사실 결혼 아니면 죽음이다.

결혼하고 나면 미친듯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사람들도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몇년이다.소중하고 신기하고 매력적이었던 순간은 다 지나간다.

 

파란만장하던 사랑이 끝나고 지지고 볶는 지리멸렬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정이라고도 하고 부르고 혹자는 여전히 사랑이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보다는 포괄적인 것으로 일종의 사랑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빛보다 대개 크기 마련이고,빛보다 어둠의 세계가 더 기묘한 법이다.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어차피 죽을 운명인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사랑이 죽는다.사랑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어둠의 세계에서 편안히 휴식하는 평화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빛의 세계를 향해 질주할 기회만을 노리는 자들에게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그들은 사람과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면서 그래서 그것이 더욱더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의 죽음도 이해하지 못한다.그래서 죽음과 상관없이 그들은 사랑을 한다.그리고 그 사랑은 죽음 못지않게 이기적이다.진심으로 나는 사랑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동정한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책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읽는다는 주의는 아니다.

좋아하는 것일수록 사람들의 취향은 까다로워지고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많이 보고 많이 겪은 사람들은 눈이 높아진다.연애를 많이 한 내 친구 채린에 따르면

세상 남자들은 다 똑같다.하지만 채린은 매번 더 특별한 남자를 찾아 연애를 하는 모험을 한다.

그 모험의 끝은 이 남자도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가 될지라도.

 

사실 책에 대한 취향은 사람에 대한 취향과 비슷한데가 있다.책의 경우에도 한눈에 반할 수 있고

남들이 좋다고해서 나도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다.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매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나만의 사람으로 품고 있기가 어렵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아마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쓰인듯한 책도

있지 않을까.나는 어쩌면 그런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주영의 <백수 생활 백서> 中에서-

 

 

 

 

-'백수생활 백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난 후의 작가후기-

<실비아>를 보고 있었다.몇년전 부산국제영화제 때 예매를 해놓았다가 보지 못한 영화였다.

나는 실비아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을 보다가 창가에 책상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또 하고 있었다.그때 휴대폰의 벨소리가 들렸다.나는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당선 소식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처음처럼 이번에도,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이라도,하면서 초월했던 일.

 

몇번이나 일어날 뻔했던 일이었기에 기뻤지만 나는 사실 내 진심보다 더 행복한 척하고 있었다.

어쩌면 영화가 끝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실비아의 일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는 보던 영화를 마저 보았다.

 

테드 휴즈의 시를 읽고 단번에 그에게 매혹되었던 실비아.

시가 써지지 않아서 빵을 굽던 실비아.

사랑이 떠난 후 미친듯이 글을 쏟아내던 실비아.

열정적이어서 극단적이었던 사랑과 글쓰기.

그리고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시도되었던 죽음.

실비아가 죽고 영화가 끝나자 나의 흥분과 기쁨은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테스토니의 붉은 에나멜 플랫 슈즈를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우울해질 때마다 빨간색 구두를 꺼내 신어보곤 했다.'라는

문장을 썼다.

 

계속해서 쓸 수 있기를.

내 소망이 단순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쉽지 않다는 걸 어느새 나는 알고 있었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베냐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박주영-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작가의 깊고도 넓은 책읽기에는 혀가 다 내둘러진다.

그동안 나도 어느  정도 '잡식성'에 '폭식성'의 독서를 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가

백수 생활 백서를 보고 나서는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다.

 

치열한 독서야말로 인생의 핵심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자기 연습인 것이다.

그 독서열에 덧붙여 글쓰기 마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에 책을 읽고 나서

약간의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가 일었지만 작가 후기에 나온 고뇌 한줌을 엿듣다보니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하고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실비아 플러스처럼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도 없으면서

그동안 무턱대고 글을 쓰는 무모함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실비아의 고뇌가 결혼과 더불어 시작된 것처럼 과연 그 둘을 균형있게 세울 수 있을지

겁이 덜컥 난다.

 

실비아 플러스가 가스 화덕에 머리를 묻고 죽기 직전에 한 일은 아이들의 식사를 마련한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 그녀가 준비한 식사......그 일은 모성의 무거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렇게 매달린 글쓰기와 죽음은 그녀 존재에게 과연 해방구 였을까.

아니면 스스로가 마련한 굴레였던가.......*****

 

 

 

 

 

****미셸 슈나이더의<죽음을 그리며>에 등장한 작가들의 '글쓰기론'을 읽다보면

이 책은 좀더 명료한 방식으로 '책과 글쓰기와 죽음'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독자를 소설로 끌어들이는 건 이미 얼어붙은 삶을 독서를 통해

불꽃으로 다시 태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글을 쓸 때 차분함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분노를 품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누군가를 삼켜버릴듯한 사람마냥 글을 썼다.

글을 쓸 때 파스칼은 친절한 작가가 아니었다.

 

공격적인 태도로 빠르게 글을 썼고,훈계하듯 설교조로 썼으며,권위를 중시했다.

파스칼은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사는게 다 쓸데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맞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파스칼은 병을 사랑했는데 병에 걸리면 모든 선한 것,감각의 쾌락,열정,야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탐욕과 음탕함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은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글을 쓰게 마련이다.

무엇에 대해서,누구에 대해서 쓰는지는 나한테 묻지 말길 바란다.

 

죽음에 몰두한 파스칼은 무를 즐겼다.공허함에 몰두한 그는 글을 썼다.

파스칼은 자신을 집어 삼키는 책을 썼다.

 

팡세?파스칼은 이 책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잡아먹히게 되었다.

"파스칼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집필한 이 책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글자에 덮혀 죽음을 맞이하려고 쓴 책이다."

 

글을 쓴다는 건 생각이 말이 되지 않고 빠져나가 사라져버리는 순간에 있다는 뜻이다.

잃어버림의 장소에 있다는 것이다.

 

불처럼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버리는 그의 문체,

언제나 다른 말로 뭔가를 말하려는 그의 열정도 마음에 든다.

그가 느끼는 공포와 무지도 좋다.

 

 

 

스탕달이 이탈리아에서 사랑한 건 여성,음악,그리고 언어였다.

"어디로 발길이 향하는지 모르면 절대 멀리 갈 수 없다."-스탕달-

 

 

여성과 소설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스탕달은 언제나 당황스러워 했는데 그에게는 여성이

곧 소설이며,소설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스탕달 인생의 마지막 여성은 세시나 부초였다.

세시나 부초는 스탕달에게 운명적인 파르카이(로마 신화에서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세명의 여신들)중 한명이었던 셈이다.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생 남자가 바라보는 세 여성 중 마지막 여성이라고나 할까.

 

스탕달은 자신이 문학을 한다는데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그 자부심이 사랑의 상처를 달래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그가 아무리 훌륭한 소설을 써냈다 해도,그 사실이 사랑에 실패한 데 대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여성들이 스탕달을 차지하지 못한 것처럼,스탕달도 그녀들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책을 통해 여성들을 만들었으며,그 스스로 몹시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발자크를 숭배한다.

발자크가 집필한 웅장한 작품<인간 희곡>도 좋아하지만 ,인간 발자크를

더 많이 좋아한다.글을 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발자크도 말수가 참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만 하면 매력이 마구 발산되었다.

 

그의 말은 너무나 힘이 있고 매혹적이어서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볼품없는 그의 외모도 멋있어 보일 정도였다.그의 눈은 지성으로 빛났고,그 덕에 얼굴 전제가 멋져 보였다.

 

사실 발자크는 천성적으로 사랑에는 서툰 사람이었다.그는 여자들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했다.

아니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하지만 발자크는 누구보다도 섬세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고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멋진 남자였다.

 

"소설가의 삶이 소설처럼 되는 건 아니다.내 인생이 내 작품의 분위기와 비슷하지는 않았다.

여자란 아내가 된 뒤로 더 이상 신비롭지가 않다.결혼을 해서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병이 들었고

결혼은 했지만 죽어가고 있고,결혼은 했지만 동시에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그녀를 만났을 때 첫눈에 그녀가 내 여자란 확신이 들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쓴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소설 덕분에 여자 몇명을 사로잡기도 했고

그중 몇은 내 소설의 등장인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행운과 죽음이 나란히 문간에 서있는 것을 본다.

사랑이 식어버린 순간,예전에 사랑했던 여인을 얻는다.

행복할 수 있을 때,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운명을 맞이하는가!

 

난 죽을 것이다!글을 쓰면서 죽을 것이다.

그림자가 내 눈을 가릴 때에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발자크-

 

 

 

 

 

작가는 죽지 않으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좀더 생동감있게 죽기 위해 글을 쓴다.

 

 

"책과 여성 ,모두가 결론을 짓는 일은 어리석다."-플로베르-

 

플로베르는 평생 문학에 사로잡혀 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에 사로잡혀 살았다.

인간으로서 사색을 시작한 날부터,

글을 구상하느라 뇌를 혹사해 목이 부은 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플로베르가 품은 유일한 열정의 대상은 소설이었고

그의 첫번째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였으며

나머지 사랑의 대상은 책이었다.

 

모파상은 플로베르와 어머니에게 두가지를 배웠다.

 

첫째, 단어마다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를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라는 사실

 

둘째,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

 

세째, 자살이란 인간이 너무 지쳤을 때 도망가려고 열어놓은 문과 같다는 사실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것,미쳐서 산채로 죽어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모파상은 추웠다.그는 언제나 추웠다.

그는 글을 쓸 때 이불 덮듯 원고지를 몸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수의를 잡은 채 죽어가는 사람처럼.

 

 

 

모파상은 나무나 개처럼 그냥 맨몸으로 땅에 묻히고 싶어했다.

죽은 뒤 자기 육신이 '어머니 대지'로 돌아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풀과 나무뿌리들이 그의 육신을 찾아와 땅 위로 다시 데려와서

햇빛과 바람을 보게 해줄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건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 글을 지우는 것이다."-체호프-

 

신랄한 언어는 예리한 감각을 동원해 우리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게 해준다.

장 로랭은 글을 쓸 때 해부하듯 분석하며 썼다.그가 묘사한 표현들을 보면 마치 피부 속이

훤하게 비치고 뼈의 관절 마디마디가 보이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괴로움이야말로 가장 큰 괴로움이다.좋지 않은 버릇이 다 그렇듯이 글쓰기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고 고통을 낫게 할 방법이 없다."-장 로랭-

 

장 로랭의 글쓰기 방식은 일관성이 없이 매번 달랐다.마치 서너 사람이 펜을 잡고 글을 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한 사람은 감상적인 어린아이,또 한 사람은 무서운 모습의 어릿광대,또 다른 사람은 시골에 온 나이 지긋한 점잖은 여성,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음흉하며 결투를 좋아하는 남자,

다만 공통적인 것은 글에 힘이 넘쳤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책의 여백에 써놓은 메모를 다시 발견하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일은 없다.

설령 그 글을 적어둔 사람이 내 자신이라해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상관없다.

 

또한 책장 사이에서 메모지를 발견하는 것도 감동 그 자체다.

아니면 지루하게 책을 읽다가 중간에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을 때도 감동이 밀려온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다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려고 꽂아둔 책갈피,

이처럼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이 남겨 놓은 흔적들은 뭔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나는 언제나 그것들을 통해 죽음의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삶,그리고 길든 짧든 책들의 삶에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표현이자 작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책을 다시 펼쳐서 피로해진 눈을 어느 페이지에 고정한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읽은 페이지하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쳐 버린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죽음과도 같다.죽는 것은 생각보다 일찍 책을 읽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단순하고 평범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문학을 정의하자면 '살아돌아온 것'이다.

이 표현 외에 문학을 달리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폴이라는 작가가 말한 것처럼 문학은 뿌연 거울에 있는 것 같은 존재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작가는 모두 다른 작가의 망령이며 책은 모두 다른 책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이라는 것은 이미 저 세상에 있다가 다시 왔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지막 숨결을 담은 작은 유리나 금속 조각 같은 것 아닐까?

 

푸슈킨은 글을 쓰는 일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어른들이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며,아이들이 일어나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잊어가는 소리,냄새 등 사소한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했다.

 

인간은 사랑,시간,이별 그리고 그리움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루는 구성요소에는 말과 글도 있으며 거기에는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말과 글도 피부처럼 늙어가고,죽음,공허함,지방으로 덮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미래의 독자들에게 불멸의 존재로 남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젠가는 잊혀질 것이다.

빠르게,또는 천천히.

 

물론 불세출의 작가라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독자들에게 잊혀지느냐 아니냐 때문에 작가가 글을 쓰는건 아니니까.

 

고통이 너무 크지 않다면 아주 만족하며 죽음을 맞을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었던 것은 만족하면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프란츠 카프카-

 

그렇다.글을 잘 썼기 때문에 만족하면서 죽는게 아니다.

죽음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글을 잘 쓰는 것이다.

-<죽음을 그리며> 미셸 슈나이더-

 

 

 

****아나이스 닌은 '연처럼 꿈을 날려버리면 그 꿈이 가져다줄 것들,

새로운 삶,새로운 친구,새로운 사랑,새로운 나라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언제나 꿈을 꾸고 그 꿈들을 기록하는 한......그것이 소설이든 일기이든 우리는

늘 생기있고 벅찬 삶을 살아갈 것이다.죽음이 우리를 반기는 날까지는.****

 

-蘭이-


출처 : 벌거벗은 만화
글쓴이 : 蘭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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