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년 만에 제자를 만나보니 엊그제 일 같다
“선생님, 저예요. 민숙이! 저, 민정이랑 교회 일 땜에 창녕 왔어요. 나오실 수 있겠어요?”
“그래, 웬일이니? 곧바로 달려갈게. 거기 어디냐? 민정이랑 같이 왔다고?”
반가웠다. 거제도, 첫 발령지에서 만난 제자로부터 온 전화였다. 둘은 자매다. 곧장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 십여 분 바빠 달려가니 장마면에 소재하고 있는 기독교여전도회관, 정문에 다다르니 못난 선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은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 만나기 전까지 아직 열 서넛 사춘기 소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각기 아들 하나씩 앞세운 아줌마들이었다.
“가스나, 하나도 안 변했네.”
“선생님도 예전 모습 그대론데요 뭐.”
순간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간 첫 마디가 반갑다는 말보다 ‘가스나’였다. 그랬다. 이십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 서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반가움에 냅다 차를 몰고 달렸다. 제자들이 한 시간 동안의 드라이브를 원했던 거다. 여전도회관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영산까지는 채 십 분 거리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차 속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듯 1980년대 초반으로 되돌아갔다. 총각 선생님과 말괄량이 계집애들로 마냥 깔깔댔다.
“학산, 그때가 참 좋았다. 그렇지?”
“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요. 뭣 모르고 뛰놀았던 그때가 그립네요.”
둘은 자매다. 첫 발령을 받아 섬마을 조그만 학교에 사년 동안 근무했기에 자매 둘 뿐만 아니라 남동생까지도 담임을 맡았다. 그래서 민숙이 집안 사정은 손금 보듯 훤하다. 그만큼 그들의 부모님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제 그 분들도 환갑을 맞았고, 장성한 아들딸이 시집장가 가서 손자손녀를 남부러울 만큼 두었다. 난 달랑 아들 하나만을 얻었을 뿐인데, 이럴 땐 자식 많이 둔 게 가없는 행복이다. 잘잘 끓는 불볕더위로 영산면 전체를 휘돌아보지 못하고 음식점에 들러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식혔다.
“민숙아, 너흰 참 행복하겠다. 마흔 중반을 살아보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미덥고 착하게 살더라. 물론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도 열심히 살지만, 그래도 확실한 믿음으로 사는 편이 보다 진실한 삶을 일구는 것 같아.”
민숙이의 경우 내 블로그를 통해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민정이가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건 의외였다. 초등학교 시절 녀석은 선머슴애였다. 조그만 것 하나에도 깔끔을 떨고, 소위 중증 공주병이었던 언니에 비해 성격도 시원시원했고, 또래들에게도 두터운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나보니 되러 민정이가 더 내숭쟁이였다. 총각 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저 눈길만 마주쳐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었다는 얘기를 하며 서른 두엇 나이에도 얼굴 붉히는 것을 보면 어찌나 예뻤던지. 민정아, 못난 선생이 그렇게도 좋더냐. 그래, 만나보니 어때? 이젠 나도 많이 늙었지. 세월 빠르다!
“선생님, 지금까지 만났던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지요?”
“물론, 예쁘고 사랑스러운 제자들 많고 많지. 하지만 846명 중에서 이민숙이 네가 가장 예쁘다! 기분 좋냐? 가스나.”
여든의 어머니가 예순의 아들을 보고 차 조심하라고 다그치듯 선생의 눈에 비친 제자는 늘 철부지적 모습 그대로 예쁘다. 서른 중반의 두 아이 엄마 민숙이가 왕공주병에 걸렸더라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제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더더구나 자매가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다가와 더욱 기뻤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 탓으로 더 이상 얘기 나누지 못하고, 마트에 들러 팔십 여명의 아이들에게 나눠 줄 초코파이와 음료수, 꼬맹이들이 먹을 포도와 바나나, 컵라면과 덩치 큰 수박 한 통을 사서 전도회관으로 들여보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멀어져 가는 자매와 그녀들의 피붙이를 지켜보며 갑자기 나 자신이 할아버지로 늙었다는 낭패감이 들었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제자들이 어엿하게 성장하는 것만큼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내 인생은 늘 좋은 뜻을 심어놓은 제자들을 두루 만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난 언제나 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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