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음악

[스크랩] 작곡가 `슈만`의 삶과 음악

이바구아지매 2006. 8. 18. 14:21

슈만은 왜 라인강에 뛰어들었을까?

  

 

  1854년 2월 말, 40대 중반의 한 사나이가 자살을 기도하며 라인강에 뛰어 든다. 지나가는 뱃사공에게 구조를 당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지 2년여... 9세 연하의 16세 소녀에게 마음을 뺏겨 결혼을 위해 무려 5년간 장인이 될 사람과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얻은 부인은 충격을 우려한 의사의 만류로 입원기간 중에 그를 찾지 못한다.

 

  부인이 문병을 온 것은 그가 죽기 불과 2주일 전... 13년간 8명의 자녀를 두었던 결혼생활 내내 그를 좌절시키고 끝내는 자살기도에 이르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그보다 더 명성을 날리는 피아니스트였고 수입도 더 많았던 부인에 대한 열등감을 원인으로 들기도 하지만 그가 16세 되던 해에 누이 에미리에가 자살했고 그의 부친도 신경질환으로 사망했으며 나머지 세 형제들도 50세 이전에 병사했다는 가족들의 병력이 또다른 단서가 되지는 않을까. 로베르트 슈만... 어쩌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발담았을지 모를 우울의 수렁 속에서 꽃피워낸 주옥 같은 음악들을 통해 그의 불행했던 삶을 되돌아본다. 

 

 

슈만,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황병기

 

  우리가 아는 많은 음악가들은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타고난 음악가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고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유럽 각국을 여행시킨 음악선생이자 매니저였다. 베토벤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정악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브람스는 마을 극장 악단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그런가 하면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음악가의 길을 택한 음악가 또한 적지 않다. 헨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였고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끝내 음악가가 되었다. 교사였던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자식도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슈만의 아버지는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에서 서점운영과 출판으로 성공한 사업가였고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라이프치히 대학 법과에 입학한 슈만은 당시에 연속된 베토벤교향곡 연주회를 들으며 음악가의 꿈을 형성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법과로 학교를 옮기면서 음악서클에 가입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차이코프스키는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법무성에서 공직생활을 2년이나 한 후에 법무성을 사직하고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진학하는 것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이같은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없지 않다.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선생께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으신 법학도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슈만과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황병기 선생을 서로 연결해주는 고리는 ‘법학’과 ‘음악’ 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단어들의 조합이다.

 

 

끝내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내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의 길을 걸었던 신동 모차르트나 그를 뒤이을 천재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찌감치 피아노를 배웠던 베토벤과는 달리 슈만은 일곱 살 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기는 했으나 음악가라는 직업을 썩 탐탐찮게 생각한 아버지와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는 어머니의 불안감 때문에 법대에 진학했고 나이 스무 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피아니스트의 길을 선택한 늦깎이였다.

 

  “3년만 나에게 배우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다.”고 슈만의 어머니에게 장담했던 그의 스승은 나중에 법정투쟁 끝에 장인이 되는 비크였다. 그러나 손가락의 힘을 키우려고 자신이 만든 기구를 시험하다 손가락을 다치게 되면서 슈만은 3년만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만 하게 된다.

 

  슈만이 피아니스트의 꿈을 불태우던 이 시기에 작곡한 그의 처녀작 ‘아베그변주곡’... 무도회에서 첫 눈에 반한 소녀의 이름 Abegg의 이름을 따서 그 첫 음정에 해당하는 a(라) b(시) e(미) g(솔) g(솔)를 따서 주제 멜로디를 만들었다는 설과 파울리네 폰 아베그 백작이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헌정하는 형식을 빌었다는 설이 각각 전해지는데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로부터 이어지는 23개의 작품이 모두 피아노 곡이었다는 사실은 슈만이 피아노에 가졌던 애정과 집착을 엿보게 한다.

 

  작품번호 9번 ‘카니발’과 15번 ‘트로이메라이’는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연주목록에 올릴 정도로 사랑받는 곡이다. 1986년 러시아 모스크바, 일찍이 공산정권으로부터 망명해 서방에서 그 이름을 떨치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82세의 고령으로 고국을 방문해 가졌던 역사적인 콘서트는 영국의 BBC 방송을 통해 세계 각국에 생중계되었다. 주름진 손끝을 통해 들려주는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 연주가 끝나고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호로비츠의 얼굴은 그야말로 ‘어린이의 정경’과도 같은 감명 깊은 장면이었다. 팔순이 넘도록 피아노를 연주한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나이 스물 셋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슈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나 한 때는 봄날을 노래하지만

 

  봄이 오면 누구나 한 번쯤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있다면 바로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아닐까. 비발디의 사계는 협주곡 중에서 최초로 ‘표제음악’을 도입한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심각하지 않은 쾌활한 선율로 별다른 설명이 없이도 봄의 활기찬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 밖에도 음악의 표제에 ‘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적지 않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만년에 작곡한 ‘봄의 왈츠’는 환희에 넘치는 봄을 상기시키는 경쾌한 선율이 인상적이고 멘델스존의 무언가곡 중 ‘봄의 노래’는 원래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으나 클라리넷으로 연주해도 그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휴대전화의 벨소리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의 작곡가 글라주노프의 발레음악 ‘사계’중에도 봄의 음악이 있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의 표제 또한 ‘봄’이다.

 

  클라라와의 결혼을 위해 그녀가 16세였던 1835년부터 시작된 법정공방이 5년을 넘기게 되면서 클라라의 나이가 21세가 되자 법원은 아버지의 동의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허가를 내리게 되고 마침내 슈만은 1840년 클라라와 결혼한다. 그 이듬해인 1841년 1월... 슈만은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인 ‘봄’의 스케치를 단 4일만에 완성시키는데 4악장이나 되는 교향곡의 스케치를 이처럼 짧은 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슈만의 천재성과 더불어 그토록 갈망했던 클라라와의 결혼생활이 그에게 불어넣어준 기쁨과 활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입부에서 트럼펫과 호른으로 팡파르를 울리며 힘찬 삶의 희망을 노래한 슈만의 교향곡 제1번 ‘봄’은 단순히 계절로서의 봄이라기보다는 그의 일생에 있어 다시는 오지 않을 절정의 봄날을 노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5년 후, 2년여에 걸친 정신병원 입원 끝에 46세로 생을 마감한 불행한 천재 슈만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슬픈 연가곡을 작곡했던 슈베르트나 자살을 결심한 후에 교향곡 ‘비창’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인 겨울의 어두움과 슬픔을 노래했던 차이코프스키와는 달리 아무런 음악도 남기지 못하고 조용히 떠나갔다. 

 

 

  중국의 이태백은 술에 취해서 강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러 뛰어 들었다 익사했다. 슈만은 라인강 다리 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강물로 뛰어들었으나 때마침 지나가던 뱃사공에게 구출되지만 이후 2년간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 어떤 죽음이든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이태백과 슈만... 짧았든 길었든 인생의 봄날이 있었을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였던가를 생각해본다.  

출처 : 아름다운 세상
글쓴이 : 선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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