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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이바구아지매 2007. 3. 23. 09:17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계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신학자. 음악가 였다.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슈바이처는 21살의 대학생 시절에 자신은 30세까지는 학문과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30세 이후에는 직접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9세 되던 해 '적도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서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의술을 익힌 신앙인을 파견하는 부름의 기사를 읽은 후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이 바로 여기라 생각하고 30세 때에 모교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의학부의 청강생이 되어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 프랑스 령 적도 아프리카( 현재의 가봉 ) 공화국으로 건너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자력으로 병원을 개설하였다.


제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인이라 하여 포로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고 그의 병원도 폐쇄 되었으나 아프리카 생활의 회상(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을 계기로 그의 인간 됨과 사업이 점차 세인의 주목을 끌기에 이르렀다.
이에 힘을 얻어 다시 랑바네레로 가서 병원을 재개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대 병원을 이룩하였다.제 이차 세계 대전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도와 진료에 전념하였는데, 재차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 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 원시림의 성자로 불려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슈바이처는 아버지로 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외할아버지는 열열한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였다.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외할아버지로 부터 물러 받은 것이라한다.
슈바이처는 "나에게 천부적인 재질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음악의 재능 정도이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봉사에 희생은 으례히 따르게 마련이지만 슈바이처는 교회의 성직, 대학의 교직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희생하였다.
원시림의 의사가 된 후에도 그의 음악적 재능은 청중을 의식하는 정해진 연습이 있는 음악이 아닌 오로지 바하의 이해에  몰두하여 날이 갈수록 더 향상 되었다.


그 후 두번의 세계대전을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슈바이처는 병원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슈바이처는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으로 약품과 의약재료를 사모았고, 기부금을 받아 병원을 운영하였다. 흑인환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195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나환자 촌을 세웠다. 90세의 생일을 지나고 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1965년 9월 4일 전 세계 인의 애도 속에 사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밀림속 오지를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을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출처 : 언덕에 올라
글쓴이 : 아카시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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