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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제도 일기>

이바구아지매 2007. 3. 22. 22:37

 

 

 

 

 


어린 시절에 한국동란을 겪었으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는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 기억이 난다.
한국전쟁 중 UN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이 곳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사건이 생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현재는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이 곳곳에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해서 미군들이 고성 지역에 와서 포로를 샅샅이 찾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읽은 소설이 잊혀지지 않고 있음은 그 소설의 제목은“거제도 일기” 라는 제목이 붙여진 소설이었다. 그 내용을 기억하기는 작자가 그 당시 중공 수상 주은래의 제수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호기심에 가득해서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자의 이름은 마순이 라고 기억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중국이 공산화 될 당시의 사회상도 기록되어 있었으며 주씨 일가의 당한 피해와 주은래 라는 이름으로 풀려 나왔던 특권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 여자 분이 어찌하여 포로가 되어 거제도까지 밀려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나 선명한 것은 그녀가 주은래 수상의 제수 씨라는 것 때문에 어린 나이에 솔깃해서 그 소설을 끝까지 읽은 기억이 난다.
당시 공산당 포로들이 자행한 인민재판의 몸서리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책은 빌려서 읽은 책인데 누구에게 빌려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은 너덜너덜 해 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돌려읽었기 때문에 내가 읽었을 때에도 더러워진 상태로 읽었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라  어린 아이들이 친구들과 같이 책을 돌려 가면서 읽었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철이 든 후에 그 책을 다시 한번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 없었으며 남편이나 자식들 혹은 동생들은 그런 책은 없다고 하니 나만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렀다.


지난 번 남도 여행 시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가서 포로 수용소 구경을 하면서
다시 그 거제도 일기라는 소설 생각이 났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은 기억되지 않지만 날마다 밤마다  공산당들이 인민 재판을 해서 즉결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그 책이 읽고 싶어진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책이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찾을 수 있다면 한번 찾아 읽어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 자리가 고현이란 곳으로 신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저 속에서 저런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장이 있었던 가 하면서 역사의 무심함을 되뇌어  보았다.


거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던가..
고향으로 가기를 거절한 반공 포로들을 석방한 이 승만 대통령.
그는 미국을 상대로 배짱 있는 소신을 펼친다.
대한민국이 살아 남는 방법은 사생결단의 외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너무 부패해서 실각했지만...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보면서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한번 연상해 보았다.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 우리 대통령의 북진 통일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날도 덤빌 테면 덤벼보라 하고 마지막 카드로 강대국에 대항하는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억지 웃음이 나온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같은 방향으로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거제도는 조용하기만 하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의 장소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유적 공원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폭동이 진압된 후 병원으로 옮겨지는 부상자들

 


출처 : 언덕에 올라
글쓴이 : 아카시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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