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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푸닥거리

이바구아지매 2007. 3. 29. 07:22
 

일기가 뿌연하고 바람마저 대찬 것이 마치 한 열흘 전쯤에 이혼도장을 찍은 남자 혹은 여자의 마음 같다. 침침한데도 날아갈 것 같은, 날아갈 것 같은데도 침침한 이런 날에는 무엇을 해야 좋은가. 어디를 봐야 옳은가.

 그래, 막막이다. 적막강산 할 때의 그 막자가 두 개나 붙었다. 첩어다.

 비유를 하자면 간첩 잡으러 간다고 떠난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장보러 나간 아내 또한 돌아올 기미가 없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다들 나가고 없는데 누가 누구를 기다릴 것이냐. 잘 되었다. 이런 날에는 종이인형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제일로 이득이다.

 그런데 술은 누가 마시는가?

 그게 또 그렇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목격자는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그 목격자가 그녀라거나 그인 것은 아니다. 목격자는 반드시 3인칭 존재대명사로 존재한다는 관념으로만 세상을 보면 세상은 없다. 이미 망해버린 거다.


누가 노래를 한다. 휘파람을 분다. 노래도 같고 휘파람도 같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 스타카토~~바이올린, 아니 해금인가? 날카롭게 톡톡 튀는 소리가 신경을 북북 긁어댄다.

 또 있다. 큰 북이 울려대는 소리, 아니 어쩌면 드럼이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와장와장 와장창 소리가 공포스럽다. 새벽 2시 즈음에 라디오 에프엠을 타고 흐르는 현대음악을 듣다 보면 가끔 머리끝이 쭈뼛 설 때가 있는데 지금이 꼭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윙윙 하는 이 소리는, 전깃줄이 울어대는 소리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문이 벌컥 열린다. 손님도 없는데 손님이라도 데려온 듯이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문이 저 혼자 벌컥 열린다.

 이게 대체 뭐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본다. 사방에서 비닐이 만장처럼 펄럭이고, 대나무들이 금방이라도 뿌리가 뽑힐 듯이 휘청휘청하는데 어떤 것은 꼭대기가 땅에까지 닿기도 한다.

 길다란 사다리가 넘어지면서 층층나무를 작신 분지러뜨린다. 누구냐. 누가 이런 만행을 행하는 것이냐.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뽑혀나갈 것만 같다. 양말짝들이 날개도 없는데 훨훨 날아다닌다. 색색의 수건들이 날다가 기다가 어쩔 줄을 몰라한다. 아침에 일찍 착실하게 세탁기를 돌려서 착실하게 빨랫줄에 널었거늘 이게 대체 뭐냐. 왜들 이러는 것이냐. 너희들이 정녕 세트로 미친 것이냐. 바람이 난 것이냐.

 미친 봄바람이다. 미친 봄바람이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을 듯이 잡아당긴다. 사다리를 넘어뜨리고 층층나무를 부러뜨리고 수건이며 양말짝들을 허공으로 홱홱 내던지다.

 새들은 날기를 포기했다. 날기를 포기한 새들이 처마 밑에서 짹짹거린다. 바보들. 이까짓 봄바람에 날기를 그만둔다면 그런 너희들도 새냐. 날아라, 날아 어서, 어서 너의 존재를 증명해봐라. 싫어? 못하겠어? 무서워서 못해? 그렇다면 잡아주마. 잡아서 구워먹어주마.


 요새 며칠 무언가가 저 안에서 자꾸 내려앉아서, 가라앉아서, 무너져서 이거 아무래도 푸닥거리라도 좀 해얄라나 보다 어쩌고 중얼거리는 참인데 바람이 그 짓을 대신 해준다.

 이 얄궂은 봄바람과 나는 아무래도 연분이 짙은가보다. 좌우지간 요란하다. 겁나게도 화려하게 신명난 봄바람이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서 이렇게도 성질머리 제멋대로인 봄바람은 실로 처음이다.

 겨울이라면 말도 안 하겠다. 태풍의 계절 여름 가을 어간이라면 더 말 안 한다. 도대체 지금이 언제냐. 살랑살랑 봄바람이라는 말도 있거늘 이것들이 지금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응?

 관념을 무너뜨리라고? 봄바람은 신나게 화려하게 제멋대로 갈짓자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느냐고? 그래, 오냐, 그런 법은 없다. 잘 났다. 그리고 미안스럽다. 비러나머글 봄바람 같으니.


 내일에는 봄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파릇한 쑥을 뜯어다가 믹서에 팍팍 갈아서 수제비나 떠야겠다. 마당에 희끗이 간들거리는 냉이꽃이 애잔하구나.


출처 : 산지기의 웰빙터치
글쓴이 : 나무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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