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필리핀 자원봉사에 참여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지만, 그 때는 그저 봉사라기보다는 체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올 여름 방학 때 7월 28일부터 8월 4일까지 다시 필리핀 세부로 자원봉사를 가자는 친구 아빠의 말씀을 솔직히 거부했었다. 무더운 더위와 작년에 갔던 곳을 또 가야한다는 사실이 싫어서였다. 그러나 작년 여름방학에는 보충수업을 하루라도 덜 하고 싶은 철없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세부에 도착 후, 처음부터 강행군 봉사활동은 시작되었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시립학교(학교라기보다는 고아원에 가까운 곳이었다)에서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하는 일 들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영어를 할 줄 모르고 세부 고유어를 썼지만, 학교 선생님들께서는 영어를 할줄 아셔서
다행히 의사소통이 될 수 있었다. 38도를 넘는 날씨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 온 몸에 땀띠가 솟아나는 무더위 속에 장작불을 때어 밥을
짓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필리핀 밥은 우리처럼 밥과 반찬의 구분이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솥에다가 소고기, 야채, 쌀을 넣고 끓여
먹는 것인데, 우리나라 야채죽 같은 것이었다. 처음해보는 일이라 서툴기는 그지없고 자꾸만 연기는 피해도 피해도 나만 따라 오는 것이었다. 눈물,
콧물, 땀이 범벅이 되어 흘렀다. 힘들게 밥을 짓는 나를 보고 아이들과 동네 아줌마들, 선생님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힘들게 밥을 짓는 동안
아이들은 밥을 먹기 위해 제각기 집에서 가져온 그릇을 들고 밥을 탈 준비를 했다. 작은 그릇, 큰 그릇, 접시, 컵 때가 꼬질꼬질하고 한
귀퉁이는 깨진 다양한 그릇을 가져와서 줄을 서있었다. 처음에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들이 날 경계하듯이 쳐다보고, 내가 다가가서 손을 잡으려고
해도 자꾸만 피하고 수줍게 웃기만 하더니, 밥을 나눠주자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해주었다. 밥을 나누어 줄 때 아이들의 그릇보다 국자가 커서 밥이
손에 흐를 때 마다 뜨겁다는 말을 계속 했고, 그럴 때 마다 우리의 한국말에 아이들은 처음 보는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눠준 음식을 먹는 시늉만 하고는 금방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는 왜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는지 궁금했다. 혹시 맛이 없는지 아니면 간이 맞지 않는지 걱정이 되서 그 학교의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 끼 식사조차 하기 힘들만큼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나눠주는 밥을 대충 먹는 시늉만 한 뒤 집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밥을 나눠주기 위해서 라고 했다. 반찬이 맛없다고 집에서 투정하고 학교 급식이 맛없다고 친구들과 불평불만을 털어 놓으며 버렸던 음식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가 버린 음식이 이 곳 아이들에게 는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고마움과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것이었다. 한 아이가 너무 외소해 보여서 그곳 선생님께 한 아이를 지목 해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은 10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나라 아이들의 5살, 6살 밖에 안 되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너무 작고, 마르고,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수세미가 되어 있고, 신발은 그렇게 더운 나라에서 겨울용 여름용 신발이 따로 구분이 없이 신고 다녔다. 심지어 한 아이는 부츠도 신고 다녔고 그나마 신발을 얻어 신지 못한 아이는 맨발이었다. 몸에는 각종 피부병이 있어 처음에는 선뜻 손을 잡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던 ‘PAJAC ELEMENTARY SCHOOL’은 70명의 아이들이 6살부터 12세 까지 있는데 화장실도 수도도 없고 벽걸이 선풍기조차 없는 곳이어서 아이들이 공부하다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주변의 아무집이나 가서 실례를 하고 온다는 것이었다. 순간 ‘이 곳이 휴양과 관광의 도시 세부가 맞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관광객들과 주민들의 상대적 빈곤감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친구와 내가 주머니에 있던 돈을 모두 모아보니 1000페소 (우리 돈으로 약 2만 원 정도) 가 있어서 같이 간 필리핀 적십자 세부지사에서 근무하는 Dodong ferrer씨에게 아이들에게 줄 빵을 사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특별히 그날은 밥과 빵을 나눠주면서 밥은 먹고 가고 빵만 집에 가져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Dodong씨는 우리가 봉사활동을 다닐 학교를 소개시켜 주셨는데, 그는 외국에서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오거나, 지원물품 등이 오면 필리핀 내에 각 학교에 골고루 분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이였다. 나는 평소의 필리핀의 낮은 경제력 때문에 돈에 관한 도덕성이 투명하지 않아 처음에는 신뢰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걱정되어 내가 Dodong씨에게 우리가 돌아가 지원물품을 보냈을 때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나눠 줄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Dodong씨 역시 자기 나라의 투명하지 못한 업무처리가 지금의 필리핀 경제를 더더욱 어렵게 해서 때때로 유니세프에 직접 전달하라는 말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지원물품이 도착하면 모든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학교에서는 한 아이와 엄마를 만났는데 그 아이의 다리는 피부병이 나서 심하게 곪아 있었다. 연고만 있었더라도 저 정도로 심하게 곪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연고라도 가져올 생각을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 아이의 엄마는 자기 남편이 한국의 안산이라는 곳에서 일을 했는데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서 일도 못하고 그 동안 일한 임금도 못 받고 몸과 마음에 병만 얻고 돌아와서 그동안 한국 사람들과 한국을 너무 미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를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고 했다. 더운 여름에 아이들을 위해 청소와 밥 짓기,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처음에는 생색내는 줄 알았더니 마음을 다해 애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나 역시 초라한 아주머니의 모습과 나뭇가지처럼 마른 아이의 모습 때문에 눈물이 났다. 한 끼의 식사가 이렇게 소중한지 정말 몰랐다. 또한 맛있게 먹어주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충격과 놀라움의 6일간의 봉사활동을 끝낸 마지막 날 아이들은 저마다 카드를 만들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그맣게 이름을 넣고 감사의 노래 가사를 써서 준 카드는 아이들이 서툰 영어를 써서 만들어 잘 알아볼 수조차 없었지만, 정성들여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에 너무 고마웠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갈 때는 졸려서 엄마한테 괜히 화내고, 급식이 맛없다고 모두 섞어서 버렸던 일. 유행이 지났다고 몇 번 신지도 않고 버린 운동화며, 옷가지 등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부끄러운 행동이었는지.......
세부에서 분명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워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무언가 모를 감동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전에 없던 고마움과 감사함이 샘솟았다. 남을 돕는 일이 그저 봉사활동 점수를 따기 위해 형식적으로 할 때는 이런 느낌이 없었는데, 이번 필리핀에서의 시간은 새로운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하면할수록 더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감사했고, 내가 그들보다 좀 더 가진 것이 많아 나눠줄 수 있는 것, 무엇보다도 나눔의 기회를 주신 주위의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베푼 것 보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다. 눈을 감고 아이들이 우리가 보내준 신발을 신어보는 장면을 그리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지면서 입술을 꼭 깨물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보았다.
“얘들아 다시 만날 때까지 꼭 건강해야 한다. 언니가 언젠가는 다시 갈게 기다려 !”
돌아오자마자 친구와 나는 재활용 신발을 모으자고 아이디어를 내고 Dodong씨에게 신발을 보내겠다는 이메일과 반드시 'PAJAC PRIMARY SCHOOL' 아이들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파트 단지 내 게시판에 필리핀 아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하고 4세부터 12세에 이르는 아동용 여름신발을 모은다는 게시물을 붙였고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수거를 했다. 고맙게도 단지 내 주민들도 흔쾌히 호응해주었고, 관리실에서는 재활용품 수거 회사와의 계약문제로 원칙적으로는 안 돼는 일이지만, 우리의 뜻이 예뻐서 아동용 여름신발에 한해서 수거해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셨다. 어떤 아주머니는 쌀자루에 아이들이 신다가 작아져서 못 신는 신발을 한 자루 모아주시기도 했고, 어떤 분은 인터넷 경매를 통해 이번 여름 유행한 젤리슈즈를 한 켤레에 500원씩 샀다며 10켤레를 사서 보내주셨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모아주는데 동참을 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도 깨달았고 이 모든 사랑과 정성이 아이들에게 전해질 것을 생각하니 참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을 한번만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친구와 나는 학교로 돌아가 학생회 회의를 거쳐 친구들이 쓰다가 싫증나서 버리는 학용품을 모아서 보내주기로 했다. 아마 학교 친구들도 주민들처럼 분명 도와주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고 그 학용품에 써져 있는 ‘made in korea'를 보며 더 기뻐할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단순한 봉사활동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한국에 와서도 아이들을 돕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또한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내가 영어로 그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꿈인 외교관이 되어 세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또한 그런 봉사활동의 기회를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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