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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일기도 역사가 될 수 있다. 박래욱 씨 일기 민속박물관에 기증

이바구아지매 2007. 1. 9. 19:12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ID=2006120501159 

박래욱씨, 56년간 쓴 일기 민속박물관에 기증


 “신혼 첫날밤까지 상세히 기록했죠”



1997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속해서 일기를 쓴 사람’으로 한국기네스인증서를 받았던 한약업사(한약방 운영) 박래욱(68)씨. 1950년부터 2005년까지 56년 동안 쓴 일기 98권을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모두 2만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금년 봄, 교육인적자원부 기초학문자료센터에서 제 일기를 보존하려고 스캔했는데, 글씨가 흐려져서 제대로 스캔이 안 되는 대목도 있더라고요. 초창기 일기는 남색 가루물감을 물에 개서 펜촉으로 썼거든요. 종이나 물감 질이 나빠 앞으로는 저 혼자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56년간 ‘잘 기른 예쁜 내 딸’을 시집 보내게 됐습니다.”


그의 일기는 20세기 후반기 대한민국이 겪은 온갖 신산(辛酸)과 그 속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오롯한 내면이 담긴 사료(史料)다.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도 “20세기 후반기 한국생활사를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평했다.


예를 들어 박씨의 1956년도 일기를 보면 당시의 물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괄호 안은 요즘 물가)


당시 돼지고기 반근 가격은 100환(약 5000원), 목욕 50환(약 4000원), 이발비 60환(약 1만원), 영화관람료 30환(약 7000원), 필름 400환(약 3000원), 버스요금 10환(기본 800원), 신문대금 300환(1만2000원)이었다. 요즘에 비하면 필름값이 비싸고, 이발비·버스요금 등이 싼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기는 열 살 되던 1948년부터 썼습니다. 어머니께서 ‘남자가 10세가 되면 인생의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그의 일기는 6.25 때 한 차례 불타 없어졌다. 1950년 7월 23일. 그가 살던 광주(光州)가 인민군에 넘어갔고, 이틀 뒤 인민군은 경찰가족인 박씨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을 경호했던 경찰이었습니다. 그날 집에 들이닥쳐 ‘이 반동새끼야’라며 외치던 인민군의 모습도 생생하게 일기에 썼습니다. 한데 어머니가 그 일기를 보시곤 ‘인민군이 봤다간 우린 몰살당한다’며 불사르셨어요. 그러나 채 타지 않은 ‘일기조각’들은 제가 간직했다가 휴전 뒤 정리했지요. 아버지는 전남 장성 쪽에서 50년 8월 30일 전사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5일 뒤 학살당하셨습니다.” 그는 그 뒤 큰아버지 댁에서 자랐고, 1954년부터 다시 일기를 썼다.


그는 “어린이에게는 인성 교육, 중장년층 이상은 치매 예방을 위해서도 일기 쓰기는 최고의 습관”이라고 했다.


“1963년 11월 14일 일기를 보면 신혼 첫날밤 이야기가 상세히 나옵니다. 이부자리 무늬까지 묘사할 정도니, ‘남녀 관계’ 대목이야 오죽했겠어요. 제 결혼일이 1963년 11월 13일이거든요.”


(신형준기자 (블로그)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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