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철거지역
정경미
굴피집 처마 끝에서 포크레인이 홰를 친다
노란 살수차가 산동네의 새벽을 깨우며
을씨년스런 거리를 적신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철지난 전화부가
다이얼을 돌리며 안부를 묻는 동안
재개발 택지 분양 프랭카드는
부푼 몸을 날리는 햇살에 눈을 뜬다
비닐 하우스의 골담초는
봄을 기다리며 세간들을 살피고
떠도는 개똥지빠귀새 추운 어깨에
살풀이구름이 내려앉는다
찢긴 연체료 고지서가 수화를 건네며
검은 입술에 묻은 상처를 펄럭이고
왼쪽 어깨가 밀려나간 외등이
백밀러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언제나
뜨거운 한낮에도 저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팽팽한 오후가 하수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골목길은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며
어두운 길목에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있다
[심사평]
시 부문
시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시와 좋은 시인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원래 그저 좋은 것은 희귀하게 마련이지만 시의 기본적인 품격조차 갖추지 않은 시의 과도한 생산은 시의 위력과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한 번쯤은 되돌아 볼 일이다. 영상 매체의 발달에 따라 활자 매체의 존립 근거가 퇴색해 가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문학 외적인 진단에 의한 시의 위기론보다는 좋은 시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시점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시는 기존의 시적 상상력을 무너뜨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언어 표현이 생기를 얻을 때 발아한다. 단 한 편만 뽑는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일까. 모두들 수준이 엇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래된 집'은 크게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시다. 시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도 오랜 수련의 결과로 생각된다. 하지만 소품이라는 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때로 시의 스케일을 크게 잡아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밥상'은 발상이 참신하고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게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시를 세밀하게 다듬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할 듯하다. 난데없는 돌부리들이 곳곳에 출현해 시의 품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경마장 풍경'과 '철거지역' 두 작품을 놓고 고심했다. 앞의 시는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시에 삶의 온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가 거의 없고 감각적 표현도 아주 볼 만하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본 듯한 몇몇 이미지들이 신선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선작으로 고른 '철거지역'은 주체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 묘사의 시다. 특별히 눈에 띄는 표현은 없지만 안정적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는 점이 믿음직스럽다. 상처 입은 것들에 시의 렌즈를 들이대는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정희성·안도현 시인
[당선소감]
뙤약볕 내려 쬐는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왔습니다. 발이 부르트는 지경에서도 시에 대한 믿음 하나로 마다 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우직한 집념으로 더러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더욱 시에 대한 오기와 열정을 용솟음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바닥이 두껍고 편안한 신발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절명의 애착 때문에 외로운 수행자의 고행처럼 세속적인 소망을 애써 저버린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결코 앞으로도 평탄한 걸음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름다움만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노래한 키이츠의 행로를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가장 진실한 지혜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여겨왔습니다.
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곳에 빛나는 시의 소재가 숨어있고 현란한 관념과 이미지가 내재해 있음을 깨달아 왔습니다.
그것이 곧 진실의 표정이요 지혜의 속내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다짐해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자 문득 봉숭아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릴 적 봉숭아꽃 속에는 시의 텃밭이 되어주신 아버지의 영상이 겹쳐져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버리신 아버지께서 사랑과 망각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8년 전 가을 어느날 봉숭아꽃이 피었다고 나들이 오라시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리움의 울타리 안에서 피어오릅니다.
부족한 글을 눈여겨 살펴주신 경인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르튼 맨발을 말의 붕대로 감싸주신 하현식 교수님과 이신정 시인을 비롯한 문우들과 악동님께 감격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고집스런 시의 길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준 가족들과 아들 성로, 그리고 올케 송인숙님께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 영광을 아버지 영전에 드립니다.
◇약력
1960년 경남 거제시 연초 출생
현재 부산 금정초등학교 영양사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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