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야기

[스크랩] 흙의 노래

이바구아지매 2007. 4. 3. 13:52

 

<옮긴 글>

 

 

봄에 땅이 녹아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 보는 일은 행복하다.

이 행복 속에서 과학과 몽상은 합쳐진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서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 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 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오른다.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 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 서리이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는 물의 싹이다.

 

봄 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겨울을 밭에서 나는 보리는 이 초봄 흙들의 난만한 들뜸이 질색이다.

한창 자라날 무렵에 헐거워진 흙들이 뿌리를 꽉 껴안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을 이해하는 농부는 봄볕이 두터워지면 식구들을 모두 보리밭으로 데리고

나와서 흙을 밟아준다.

농부는 보리가 봄을 다 지낼 때까지 부풀어 오르는 흙을 눌러 준다.

 

부푸는 봄의 흙 속에서 새파란 것들이 일제히 솟아오르고 있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출처 : 마음 풍경
글쓴이 : 소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