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 글>
봄에 땅이 녹아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 보는 일은 행복하다.
이 행복 속에서 과학과 몽상은 합쳐진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서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 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 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오른다.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 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 서리이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는 물의 싹이다.
봄 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겨울을 밭에서 나는 보리는 이 초봄 흙들의 난만한 들뜸이 질색이다.
한창 자라날 무렵에 헐거워진 흙들이 뿌리를 꽉 껴안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을 이해하는 농부는 봄볕이 두터워지면 식구들을 모두 보리밭으로 데리고
나와서 흙을 밟아준다.
농부는 보리가 봄을 다 지낼 때까지 부풀어 오르는 흙을 눌러 준다.
부푸는 봄의 흙 속에서 새파란 것들이 일제히 솟아오르고 있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식물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이들과 함께 읽는 책] <맛있는 들풀> (0) | 2007.04.08 |
---|---|
[스크랩] 너 나 작은 꽃 (0) | 2007.04.06 |
[스크랩] 목련 (0) | 2007.04.01 |
[스크랩] 추억 (0) | 2007.03.28 |
[스크랩] 그대가 있어 더 좋은 하루 - 윤보영 (0) | 2007.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