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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

이바구아지매 2007. 5. 29. 08:29

[인문사회]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최승범 지음·460쪽·1만5900원·이가서

  “술 거르는 소리(주적성·酒滴聲)와 치마 벗는 소리(해군성·解裙聲)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무얼 취하겠는가.”

첫 대목부터 불쑥 튀어나오는 저자의 관능적인 질문. 대답 대신 일화 하나가 이어진다.

  어느 날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등이 가장 듣기 좋은 소리에 대해 얘길 나누고 있었다. 송강이 “맑은 밤 밝은 달에 다락머리 구름 걷히는 소리가 좋다”고 하자 서애가 “새벽녘 잠결에 들려오는 ‘좌르르 톰방톰방’ 술 거르는 소리가 더욱 좋다”고 받아 넘겼고 누군가는 “산간 초당에서 들려오는 시 읊는 소리”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백사 왈. “뭐니 뭐니 해도 미인의 옷 벗는 소리를 당할 게 없으려니.”

  요즘에야 집에서 술 빚는 일이 거의 없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좌르르 톰방톰방’ 소리가 참으로 정겹다. 그건 그렇고, ‘미인의 옷 벗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에 나오는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처럼 뽀얗게 눈 내리는 소리와 비슷한 걸까.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가 우리 주변의 사라져 가는 소리를 글로 되살린 책이다. ‘좌르르 톰방톰방’ 시름 잊게 해 주는 술 거르는 소리, ‘뿔럭뿔럭 볼락볼락’ 팥죽 끓는 소리, ‘혜혜랭랭 혜혜랭랭’ 메뚜기 소리, ‘수월수월’ 먹 가는 소리, ‘할랑할랑’ 부채질 소리, ‘철뜨럭궁 철뜨럭궁’ 모판에서 모를 뽑는 모 찌는 소리, ‘또드락 딱딱’ 다듬이소리, ‘홰홰칭칭’ 맷돌 소리, ‘팽글팽글’ 팽이 소리, ‘서걱서걱 오슬오슬’ 갈댓잎 소리, ‘왜앵 부부붕 부부붕’ 풍뎅이 소리….

  우리네 전통적인 삶의 소리, 자연의 소리 100여 종을 글로 보여 준다. 의성어로 옮겨 놓은 소리 자체도 좋지만 그 소리에 얽힌 문학 작품 이야기나 사람들의 애환이 그 소리를 더욱 정겹게 만들어 준다.

  옛 시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창밖에 위석버석 임이신가 일어 보니.’ 초저녁부터 기다리던 임. 밤은 깊어 새벽녘으로 치닫는데, 드디어 멀리서 들려오는 인기척. 그런데 ‘위석버석’이라니! 낙엽 밟는 소리 같기도 하고 치마폭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뚝뚝 묻어난다.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임의 발걸음 소리를 ‘사비약 사비약’이라고 표현했다. 기막히게 투명한 소리. 그래서 ‘위석버석’ ‘사비약 사비약’, 몇 번이고 소리내 본다. 행복한 경험이다.

  옛날 부엌문 소리도 정감이 넘친다. 아낙의 기분이 좋을 때면 ‘뻥그르르’, 쌀이 떨어져 시름에 겨울 때면 ‘비거덕 삐거덕’. 전봇줄 소리는 더 흥미롭다. 따스한 봄날이면 느슨하게 흐르는 물소리처럼 ‘새롱새롱’, 바람이 이는가 싶으면 ‘잉잉’ 꿀벌 소리로 바뀌고, 겨울바람이 몰아치면 ‘앵앵’ 아기 우는 소리로 변한다. 사람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달리 들리는 부엌문 소리, 전봇줄 소리를 이토록 절묘하게 포착해 내다니.

  다 아는 것 같지만 방귀 소리는 듣고 또 들어도 즐겁다. 마음 놓고 뀌면 ‘푸웅’, 남 몰래 뀌려다가 잘못하면 ‘뾔옹’, 내리막길 뛰어가다 뀌면 ‘뽕뽕뽕뽕’ 기관단총 소리. 입을 봉긋봉긋, 씰룩씰룩하면서 방귀 소리 내보고 싶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소리도 있다. 화선지 위로 붓 가는 소리. 저자는 이를 ‘거치륵 거치륵’이라고 했다. 정말 ‘거치륵’일까 싶어 가만 눈을 감아 보니 놀랍게도 ‘거치륵 거치륵’으로 들린다. 게다가 이 소리가 화선지 밖으로 나오면 ‘속되지 않게, 아취 있게’로 들린다고 한다. 붓 소리는 분명 영혼의 소리인가 보다.

  사찰의 풍경 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소리를 ‘뎅그렁 뎅그렁’이라고 하면 멋이 없을 것 같은지 저자는 차라리 시를 들려준다. ‘만등(萬燈)이 꺼진 산에/풍경이 웁니다/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無上)의 별빛/아, 쇠도 혼자서 우는 슬픔이 있나 봅니다.’(김제형의 ‘풍경’에서)

  풍경 소리에 실려 투명한 그리움이 거침없이 밀려온다. 우리 소리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출처 : 시인의 뜰 <洗蘭軒>
글쓴이 : 洪海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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