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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온 풍경)
겨울은 밤이 일찍 내린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 벌써 어둑발이 먼산을 슬핏 내려와 세상을 휘감는다
며칠동안 밤바다를 못보았더니 조갈증이 나서 작심하고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돌아나와 버스정류장옆 큰길을 건너서 다시 꼬불한 언덕길을 뱀처럼 꼬불하게 걸어갔다.
그렇게 꼬불하게 걷다가 만난 첫번째 가로등을 바라보니 불빛을 쏟으며 나뭇가지에 걸려 달인척 고고하다
눈섭같은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나와 밤하늘의 별자리이야기를 시작하고...
작아진 초승달은 수박잘라 베어먹다 남은 껍질만큼이거나
혹은 아가를 임신하여 아랫배가 살짝 도톰한 한 모습이거나
달리 보면 솜뭉치 살짝 풀어 얹어놓은 풍경인 일월 초순의 하얀 달빛으로...
내가 걸어가고 있는 바닷길은 별빛같은 불빛이 바다건너로부터 퍼져온다
어림짐작으로는 50m 거리앞? 화려한 불빛이 촘촘히 나타나는 바다저편 불꽃으로 빛나는
그곳은 부산의 송도라더라.
겨울밤이면 우리동네 저편에는 부산의 송도가 나타나 그리움을 툭툭 던져준다
송도는 숨바꼭질을 하듯 겨울 밤에만 살포시 나타나는 모습이 마치 신기루같다
그것도 찬바람이 쌩쌩 불면 송도는 더 가까이로 다가와서 발밑에 서기도 한다
긴 다리 하나 놓여 있으면 바다저편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우리동네 풍경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부산송도에사 바라보는 장승포의 밤은 어떤 모습일까?...
겨울밤에만 나타나는 송도는 마법의 도시 혹은 마법의 불꽃같다
마치 만날 수 없는 견우와 직녀같기도 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고 그리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같기도 하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저녁 6시가 가까워지니 밤하늘에 듬성듬성 별들이 성글게 수를 놓으며 나타난다
멀리로 보이는 옥녀봉 산봉우리 근처로 석양이 붉게 물들고
바다위에 동동 떠 있는 동백꽃숲 잔뜩 우거진 지심도가
검은 바다에 병풍처럼 떠서 그 섬에 사는 인가에서도 가물한 불빛 깜빡이고
파도는 비행기소리를 내기도하고 기차가 떠나가는 소리를 내기도 하다가
가끔은 구미호의 소리를 내는것도 같다.
언덕 위의 가로등은 더한층 외롭고 무섬증 나게 한다
게다가 저 언덕 위에는 "귀신이 산다" 라는 영화를 찍었던 세트장이 흉물처럼 서 있던 곳
그곳에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불꽃놀이로 귀신이 나와서 노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러다가 불이라도 내면 큰일이다 갑자기 아이들이 하고 노는 모습이 걱정되지만
너무 먼거리라 어쩌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풍경만 기억한다
어쨋거나 불을 피워놓은 불꽃이 바람에 흔들거리니 겨울밤의 풍경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제발 불은 나지 말아야할텐데...
해안도로를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에 파도소리가 철썩거리며 함께 한다
밤은 소리없이 별무니만 쏟아낸다
투명한 하늘이 검푸른 바다를 내려 다 보는 모습 또한 연인같다
깊은 밤 우리가 잠들면 하늘이 살짝 내려와서 바다를 감싸 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천천히 걸어서 언덕같은 해안도로를 끝내고 등대로 내려가서 발밑에서 철썩거리는 파도를 확인하고
갯내음을 촘촘히 맡아보다 이내 장승포항구로 발길을 옮겼다
수십척의 배들이 정박한 옆으로 어두컴컴한 수협어판장 근처에서 아지매서넛이
메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줌마 그 메기 한마리 얼마해요?"
"싱싱한건데 국 끓여 무모 억수로 맛있는기라요 금방 잡아온거아이요 만원만 주소 "
갓 잡아 올린 메기가 퍼득인다 바다로 가고 싶다고...
내 포켓속에는겨우 2,000원이 있을뿐인데...
아쉽지만 비린내만 맡고 가는 수 밖에...
수협 어판장근처는 유별나게 어둡다
금방이라도 바닷물살을 가르고 귀신이 올라올것 같다
괜히 뒷꽁무니가 무서워져서 도망치듯 어둠을 밀쳐내며 항구의 불빛쏟아지는 쪽으로 달려간다
발자국 소리도 놀라서 헉헉댄다
불빛에 보니 밤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 청어를 많이 잡아 싱글벙글 하였다
얼추 한바케스에나 잡았다
낚싯꾼은 오늘 미끼를 톡톡 따 먹고 바케스속에 담긴 청어가 좋아서 연신 담배를 뻐꿈거리고 서 있다...
아무래도 담배냄새 보다는 청어의 비린내가 훨씬 맡을만하다.
밤 낚시를 즐기는 낚싯꾼들의 옆을 성큼성큼 스쳐지나니 동글납작한 장승포항에
나그네 배들이 수십척이나 정박하여 불 밝히고 둥둥 떠 있다
오늘은 예서 묵을 작정인가보다
'명영호 "조타실의 Tv에서 드라마를 하는 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화장( 배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아저씨는 저녁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를 끝냈는지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언제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밤에도... 다만 간간히 뱃전에 나와서 바다를 내려 다 볼 뿐
집에간다면 밥 짓는 일쯤은 아내가 하고 화장아저씨는 아내가 지어주는 밥과 메기탕과
청어구이를 맛보고 흐뭇하게 웃어주기만 하면 될텐데...
조리대 옆 화덕에는 20인분도 넘게 밥을 할 수 있는 풍년압력밥솥이
걸려 있고 씽크대 옆으로는 그릇을 씻어 건져 놓은 소쿠리와 구석에는 김치통 두개가 버티고 있어
근처에 서 있는 내게도 시큼한 냄새가 느껴졌다.
화장아저씨는 빼꼼거리던 담배를 툭툭 털다가 지나가던 내가 배 안을 유심히 보자
도둑인줄 알았는지 순식간에 험악한 인상을 지어보인다
얼른 도망가야지. 훔쳐보는것도 도둑질이니까...
어느새 바닷가를 한 바퀴 휘돌고 집으로 간다
바닷가 돌에 다닥다닥 붙은 굴이 불빛에 하얗게 도드라지던 장승포 바다를 저벅저벅 혼자서
걸었더니 두어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오랜만에 밤 바다가 고팠던 나는 실컨 밤 바다를 먹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장승포의 밤 바다는 참으로 아름다웠다...청어의 비릿한 냄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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