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이에게서 메일이 왔다. “만나 뵙고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메일을 보냈댄다.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니 출판사랜다.
나는 처음에 나의 작품집이라도 내준다고 하는 거냐 뭐냐, 하고 솔깃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니다. 감성에세이를 한 번 써보지 않겠냐는 거다. 웹사이트 어딘가에서 몇 꼭지를 봤는데 팔릴만 하겠다는 판단이 섰다는 거다. 팔릴만한-이라는 수사에서 나는 뭐랄까 정나미 같은 것이 떨어져 버린다. 팔릴만한-이 경제스틱한 단어의 어디에서도 진정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책은 오직 하나의 상품일 뿐이고 상품은 돈이 되어 돌아오는 절차에 충실해야 하고 돈은 잘 팔려야 된다는 저 유명한 상업의 논리 앞에서 문학이란 차마 문자도 꺼낼 수가 없게 된다. 文자, 저 수줍은 글자를 어찌 감히 꺼낸단 말이냐.
그런데 감성에세이라는 건 도대체 뭐냐. 어쩌면 저 칠십년대에 엄청 읽혔다는 김우종의 글쓰기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밤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 밤이 내리고 또 내려 깊어지면 당신은 무엇을 하실 건가요. 나를 생각하실 건가요. 오, 고마우셔라. 그래 주세요. 나를 생각해주세요, 어쩌고 등등등 하는 것들, 물론 나도 그런 글쓰기를 좋아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만 좋아한다. 이를테면 내 안에서 누군가가 무엇을 부를 때,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고독이 몸부림 같은 것을 칠 때 나는 아마 그런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글쓰기를 배설행위라고 정의하기도 했거니와, 나는 대체로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때만은 인정한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글쓰기는 내 안의 무엇인가를 몰아내고자 하는 일종의 환풍기능으로서의 작용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놈의 몸부림치는 고독을 몰아내는 행위로서의 환풍기능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주 가끔일 수밖에 없다. 만약에 고독이라는 것이 날마다 몸부림을 친다면 어쩔 것인가. 고독 자체도 그리 즐거운 것은 아닌데, 그놈의 것이 안에서 몸부림까지 친다면 나는 아마 터져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인 거다.
팔릴 만한, 이라는 수사에는 좋은 글이니 의미 있는 글이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배면에 자리한 것은 오직 하나 돈이다. 어쩌면 돈이 될 것도 같다는, 그래서 관심이 간다는, 그래서 편지를 썼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따금 그런 내용의 이메일이나 전화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내게 있어 문학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어떻게 시작했는데 어떠어떠하다는 등등 주저리주저리 읊조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조차도 뭐랄까 신물이 난다.
대체 나는 왜 문학이라는 이 지지리도 궁상맞은 그러면서도 엄숙하고 심각하고 장엄하고 등등 강경한 주장을 스스로 펼쳐야만 하는 이런 장르를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나이에 붙잡게 되었는가?
가진 돈이 이십몇만원이라고 아직도 주접을 떠는 새끼가 대통령이랍시고 앉아 있던,팔십년대라는 빌어먹게도 남루한 저 패의 시기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문학 따위를 내 생의 나침반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도 그 후 구십년대 초반 살인에의 의지로 눈알을 시뻘겋게 달구었던 지극히도 사적인 체험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문학이란 뭐 말라비틀어진 문학이냐 어쩌고 눈을 내리깔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문학이란 것을 틀어잡았다. 내게 있어 문학이란 건방떠는 어투로 말하자면 인간을 이해하고 그 틀 위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이가 내 글을 읽고 좋다고 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것은 어쨌든 나중의 일이다. 블로그다 뭐다 개인 커무니티를 여기저기에 널어놓은 까닭은 내 외로움의 아주 작은 부분을 달래줄 필요 때문이지 그 자체는 문학도 무엇도 아니다. 문학도 무엇도 아닌 그런 글쪼가리들을 책으로 내라고 권하는 것은 따라서 내게는 모욕이 된다.
책도 요새는 아이스크림이나 화장품처럼 소비된다는 느낌이다. 있었던 것이 없었던 것으로 혹은 있던 것이 없는 것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 그래서 또 만들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소비재라 하거니와, 사전적인 풀이로나 실생활에서나 심지어는 관념적으로도 책이란 도대체 소비될 수 없는 물건이다. 책은 일단 제책소를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하나의 자료가 된다. 그리하여 그 자료는 수마나 화마로 멸실되지 않는 한, 고의적으로 절단하거나 폐기하지 않는 한, 또는 너무 오래되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게 되지 않는 한 책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대담하게도 아니 어쩌면 아주 신선하게도 책을 소비한다. 책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나무를 소비하는 것이고 삼림을 소비한다는 것이 되는데, 소비가 대체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 반해서, 희한하게도 책의 소비는 오직 소비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찍어내자마자 풀어볼 틈도 없이 폐지공장으로 향하는 책들, 그런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종류씩 출판되는 시대, 물론 주머니에 돈푼깨나 지닌 자들이 벌이는 일종의 미친 짓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그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그것이 설령 행복 비스무레한 것이라 해도, 그런 책들이 서점에 깔리는 바람에 독서인구가 감소하는 부작용까지 부인할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인 진단이 아니라 내 개인의 체험이기도 하다. 책방을 가서 책 한 권 고르기가 이즈음은 얼마나 어려운지. 제목만 보고 사서 들고 왔다가 두 장을 못 넘기고 내던진 경험이 얼마인지, 이런 경험은 아마도 나뿐 아니라 더러더러들 있었으리라.
오늘 내가 이만큼이라도 자유롭게 말하고 내 생각을 개진할 수 있는 것도 앞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운동권 인사들의 덕분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우리는 술좌석에서 대통령 이름자를 싸가지 없게 언급했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얻어맞고 경하면 벌금이요 중하면 간첩으로 몰려 사촌까지 망하게 하는 일을 겪어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사실상의 무임승차로 오늘의 자유를 누리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팔십년대 그 치욕의 시기에 내가 한 일이란 기껏해야 스크럼을 짜고 백골대에 맞서는 후배들의 목마른 목에 물이나 떠다준 게 고작이다. 사진기를 들고 현장을 찍기도 했고 메모지를 열심히 소비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내 개인의 공부자료로나 사용했을 뿐 공개석상에 내놓을 용기는 없었다.
어쨌든 그 시기에 나는 결과적으로 문학공부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때를 돌아보니 그것은 분명하고도 엄중한 하나의 공부였다. 그렇게 내 안으로 삼투해 온 문학은, 그것은 내 자신이 설령 음풍농월이고자 해도 음풍농월일 수가 없는 그 무엇이었다.
요컨대 문학은 신이 없는 내게 신이었고 종교가 없는 내게 종교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여,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글들은 지금도 함부로 누구 앞에 내놓지를 못한다.
문학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에야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낼 수 없어 당황스러워하지만, 과거에는 그 자체로 거대한 그 무엇이었다. 아무리 깎고 또 깎아서 폄하를 한다 해도, 쥐어짜고 또 쥐어짜서 걸레를 만든다 해도, 문학은 최소한 역사를 기록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소스라는 측면에서 문학은 위대했다. 그런 것 같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 어쩌면, 이른바 신세대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대단한 보수주의자요 어쩌면 수구꼴통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신세대뿐만이 아니다. 동년배들이라 해도, 십년이나 이십년쯤 선배라 해도 용납하지 못한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음풍농월이 나쁘냐? 음풍농월은 문학이 아니란 말이냐?
시비는 시비를 낳는다. 나는 그런 시비에 답하지 않으련다. 왜 답하지 않느냐고 다시 시비한다면, 부끄러워서 차마 입 열지 못하겠다, 한 마디나 하련다.
어줍잖은 소설 하나가 당선이라는 이름을 걸고 신문지에 실렸을 때 문인협회 가입하라는 권고랄까 뭐랄까 하여튼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다. 문단을 전혀 모르던 시기에는 여기저기 걸린 무슨 세미나니 뭐니 하는 문인협회 이름의 현수막이 내 눈길을 끌기도 했었다. 그런데, 설익은 강아지 뭐 어쩐다더라고 문협이라는 곳을 조금 알고 난 뒤에는 시쳇말로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나는 결단코 저따위 짓은 안 하고 살겠다는, 철부지 객기 같은 것이 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객기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얻었달까 깨우쳤달까 뭐 그딴 게 하나 있다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또 그리고 선천적으로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끼리끼리 떼몰려 다니는 짓으로는 무엇을 봐도 그 핵을 볼 수 없거니와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야 불가항력이란 이름 뒤로 잠시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끄러움이 참담의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수습할 길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전두환이가 저토록 거짓에 거짓을 직업처럼 해대는 것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수습할 길을 찾을 수 없는 참괴감 때문이지 그가 무슨 상판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인면수심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죽은 뒤의 일이야 여러 종교마다 각각의 신을 내세우며 각각의 주장을 펴고는 있다지만 그 실태야 어차피 죽은 사람이나 알 수 있는 일일뿐 산 사람의 몫은 아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선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부끄러움을 최소화하는 것, 이것이 곧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아닐 것인지.........하는, 이런 망설임과 주저의 지점에 나는 지금 서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아마 내 문학의 위치이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이렇게나 말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뱃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 덕 쟁 이 (0) | 2006.12.24 |
---|---|
[스크랩] 감동플래시 (0) | 2006.12.12 |
[스크랩] 너무나 아프게 하는 글 (0) | 2006.11.15 |
[스크랩]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들... (0) | 2006.11.13 |
[스크랩] 가을 여관 앞에서 (0) | 2006.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