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박봉이 할머니

이바구아지매 2007. 1. 11. 12:15

 

박봉이할머니는 우리 이웃집에 오래오래 살다 돌아 가신 어른이다.

 

언젠가부터 내가 생각 해 본 할머니는 한이 참 많으신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한이란, 서러움에 복바친 사연이 많은  사람의 속내 ?

 

사전으로 찾아보면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겠지만  분명한 건 사전에서 찾지 않더라도

 

눈으로 가슴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다.

 

 

 

박봉이할머니...

 

우리집 울타리 밖에서 서너발자국만 걸으면 오래되어 고목이 된 왜감나무,

 그리고 달달한 맛 내는  단감이 주렁주렁 달리는 집으로  동네 할마시들이 모여 앉아

 

놀이터처럼 365일  놀았던 집

 

지금부터  봉이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 볼까 싶다.

 

봉이할머니는 예순이 넘어서 이혼을 한 이혼녀였다.

 

그것도 서류상 이혼이 늦어져서 그렇지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은

 

우리가 재수나쁘다고 생각하는 일본여자랑 아들 둘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우리는 짐작했다.

 

말하기 편하게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자.

 

 

봉이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밤에는  외로움이 더했을 것이다.

 

하긴 내가 본 봉이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여서 여자의 외로움  이런 것에 대해선

 

거의 생각 해 본 일이 없었다.

 

봉이할머니의 이혼한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몇 년만에 한 번 꼴로 다녀가셨다.

 

일본에서 온 할아버지는 연세보다 젊고 멋있어 보였다.

 

조총련계 간부였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할아버지가 오신 날도 봉이 할머니는 심드렁하게 혹은 아주 냉정하게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서 맴돈다.

 

동네친척이며 할머니들이 일본신사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넓은마루가 다 차도록

 

둘러 앉아서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어떤 모습을 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참 서먹한 분위기였던 그 날의 모습 그리고 서먹한 일주일이 흐르면 할아버지는

 

또 일본으로 가셨다.

 

이혼...

 

그 당시에 나는 결혼을 하고 나면 죽음이 둘을 갈라놓아야만 이별이란 걸 하는 걸로

 

알았다.

 

참 신식이다 그 당시에 이혼이란 걸 다 했으니

 

내가 아주 어렸을적에 본 최초의 이혼

 

그 속 내막을 잘은 모르나 떠도는 소문엔 아들을 못낳아서 이혼을 햇다고 햇다.

 

이혼을 할 때도 재산을 봉이할머니한테로 다 주었다고 알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 날 일본에서 일본여자와 사이에서 난 아들형제가 봉이할머니네로 왔다.

 

하얀 칼라와 검은넥타이를 한 아주 멋진 20대의 남자들은 우리 시골에선 구경을 해 본 적도 없는

 

신사였다. 일본에서 은행에 근무한다고 했다.

 

우리쪼무랭이들은 장독뒤에서 그 일본 남자들을 구경했다.

 

봉이할머니는 큰 어머니가 되는 셈이었다.

 

우리또래 친구 헤야의 외삼촌인이었다. 관계가 묘하지만...

 

혜야는  이웃 외가에서 외할머니랑  사는 아이로

 

  아버지, 어머니랑  여섯 형제들은 통영에서 살았다.

 

혜야는 고등학교까지 외가에서  다녔고 직장생활은 물론 결혼해서조차도 외가에 살면서

 

봉이할머니께 참 잘 했다.

 

할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정도로 결국  봉이할머니의 노년은 병나기전까지 외롭지 않았다.

 

혜야가 얼마나 잘돌봤던가.

 

참 봉이할머니가 병나기전에 기막힌 사건하나가 생겼다.

 

잘나가던 조총련간부 할아버지가 퇴직하고 병이 난 것이었다.

 

일본여자는 자기가 아들을 둘이나 낳았으니 한국의 재산을  받아오라고도 했고

 

그렇게 재산을 가지고 시소를 하다가 봉이할머니가 거절하자

 

이런저런 맘고생으로 병이 났고 중병에 걸린 할아버지를 일본여자는

 

비행기에 태워서 한국으로 보냈다.

 

봉이할머니도     미운 영감을 ,미워도 아버지였던 사람을 혜야엄마는  받아 들이지 못했다.

 

결국 병이 깊은 할아버지는 또다시 비행기를 탓고  며칠 뒤엔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참 슬픈 일이었다.

 

봉이할머니도 청상과부처럼 살아온 세월이 너무 안타깝고 지은 죄는 밉지만 병걸린 사람을

 

양쪽나라에서 비행기를 태운 것도 잘 한 일은 못된다고 오래오래 마을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훗 날 봉이할머니는 후두암에 걸려서 몇 년 고생하다 딸네집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가 서울 살 때 그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봉이할머니네가 살던 집의 흔적도 없다.

 

누군가가 사서 공원벤취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쓴다고  봉이할머니가 사시던 집을 허물었다.

 

다행히 아주 작은 추억하나만 근근히 기억의꼬리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집 밭언덕에 있는 단감나무 한 그루 그것도 측량을 해 보니 우리집터였고 단감나무는 말할 것도 없

 

이 우리것이었다.

 

하지만 그 단감나무는 한 맺힌 봉이할머니의 삶을 다 기억한다.

 

한 번 씩 친정집에 가면 단감나무를 오랫동안 쳐다 본다.

 

감나무는 말이없다.

 

봉이할머니는 죽어서  이 집을 떠났고 혜야도 먼 곳으로 신랑따라 떠났다.

 

 

얼마 전 혜야의 소식을 들었다. 동창으로부터...혜야가 창원에 살고 있단다.

 

꼭 한 번 만나 봐야겠다.

 

 

만나서 엣이야기나 실컷 해 보고 싶다.

 

 

 

 

 

헤야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올 땐 일제물건을 많이 가져 와서 늘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둔

 

혜야가 얼마나 부러운지...쫄쫄이 주름치마, 칸다꾸, 그리고 예쁜 꽃무늬블라우스도

 

이웃집들에는 일제낫을 하나씩 주기도 했다.

 

우리아버지도 일본에서 공부 한 사람이지만 이미 오래 전이라서 우리집에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책가방으로 사용하던 가방과 여행용가방을 아버진 항상 소중히 간직하셨다.

 

일본이 나쁘지만 본받을 것이 많다고도  하셨다.

 

특히 과거의 좋은 문화유산은 영원히 간직하는 민족이고 대대로 가업을 이어가는 것은 본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우동집을 하면 아들이 동경대학을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가업은 이어져간다는 것

 

어찌 멋지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