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우리동네 윤씨네 사람들... 보고 싶은 그들

이바구아지매 2007. 1. 15. 15:54

 

내 기억 저편에는 아직도 떠나간 아이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놀고 있다.

 

우리집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혜야외갓집. 왼쪽에는 화야네가 살았다.

 

우리집이 하도 넓어 이웃에 가려면 대문을 이용하기 보다는 그냥 우리집 남새밭을

 

가로 질러 화야네집에 가는 날이 훨씬 많았다.

 

화야는 나보다 한학년아래인 후배 하지만 그 시절엔 한살이 아니라 서너살은 친구로

 

가능했다.

 

특히 시골동네에선  우리 아부지는 7살위인 친구 원이아부지를 말 한 번 올려 주지 않고

 

꼭 아랫사람 대하듯하셨다.

 

우리아부지는 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으로 양반은 쌍놈한테 말을 높이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우리엄마 꽃가마 타고 시집 올 때 우리집에는 몰락 해 가는 양반집으로 허세만 부리고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머슴이둘 부억할망구 그리고 애기담살이가 있어

 

엄마는 양반의 허세가 가히 볼만하더라고 회상하신다.

 

그런 몰락한 양반네의 마지막 고집은 큰목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어릴 땐 벌써 다 어울려 놀았는데 양반쌍놈이란  말만 돌아댕긴 것에 불과했다.

 

우리동네는 칠원윤씨 집성촌으로 우리집과 두서너집만 타성으로 윤씨들의 텃세가 제법 심한 그런 마을

 

이었다.

 

우리집을 둘러 싼 집들도 다 윤씨들이었다.

 

화야네도 두말하면 잔소리 윤씨였다.

 

우리집엔 왠만한 과일나무는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감나무 한 그루는 수백년이 된 듯 했고 밤나무 들도

 

아주 오래 된 밤나무였다. 그 밤나무들이 있어 동네아이들은 물론이고 이웃집 화야네는 언니랑

 

밤이 익어가면 도둑고양이처럼 우리 밤밭에 기어 들었다. 우리집 밤나무산은 유년의 먹거리제공과 놀이

 

터였다.

 

어떤 날은  새벽이슬을  밟으며 와서 밤나무밑 마늘을 엉망으로 짓뭉개놓아서 우리오메 기분을 상하게도

 

했다.

 

화야는 언니가 수두룩 했다.

 

내가 어렸을 대 언니들은 이미 국민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돈 벌러 떠나고 없었다.

 

화야바로위의 언니가 나보다 두살 위로 그 언니랑은 우리집 밤밭에만 눈이 가 있었다.

 

돌담이 우리밭과 화야네 장꼬방과 경계였다.

 

화야아부지는 우리아부지와 동갑으로 존함이 지구로 우리는 안 듣는데서 놀리기도 했었다.

 

우리동네 쪼무래기들은 거의가 윤씨성을 가져서 그런지 한참 놀이를 하다가 보면 어느새

 

편이 갈라져서 나랑 언니는 힘없는 옥씨가 되어 있었다.

 

윤씨성을 가진 아이들은 왜그리 단결을 잘 하던지...

 

내가 언제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윤씨성인 언니들은 늘 나와언니한테 빚진것 받으러 왔다고

 

했고 무엇이 빚 졌냐고 물으면  작년추석에 밤 한 되 주기로 했다고도 했고

 

설에는 부침개10장, 찰떡10개 이런저런 빚이 참 많았다.

 

왜 그랬을까???언니들은 윤씨성을 가졌고 나이도 나보다 서너살은 위였다.

 

나는 어릴 때 우리언니랑 한동안 같이 살지 않아 참 서먹한 사이로 성장하고 있을 때

 

사창거리에 사는 서너명과 순이네집윗쪽으로 가는 언니들의 텃세는 아주 심했다.

 

공놀이, 자치기, 공기놀이, 줄넘기를 편 갈라서 하다가도 어느 새 나랑언니는

 

이방인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아주 사소한 일도 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그런 집요함이  있어

 

이런저런 기억들이 다 가지런하게 떠 오른다.

 

어른들도 나랑언니가 지나 가면 우리할아버지의 호를 거들먹거리며 단지손자, 수티손자, 깍지손자

 

대접손자, 옹구손자. 이랬다.

 

그런 어떤 날 그것이 심하다싶으면 어른이더라도 말대꾸를 했다.

 

"옹구손자라서 뭐 잘못됐어요."

 

"깍지손자라서 우리가 바보라도 됩니까.

 

밥 얻어 무로 갔소 돈 빌리로 갔소"

 

그 때 우리할아버지의 아호가 동호씨였다.

 

경상도말로 동호는 '도' 라고 발음이 흐릿하며 성격급한면을 잘 보여 주는 말을 줄여쓴다는 것

 

그래서 '형님요' 라는 말도' 햄요' 라고 한다.

 

요즘은 옛날만큼 그렇지 앟다.

 

많이 좋아졌다.

 

그러다가도 선거철이나 되면 또 윤씨들은 확실하게 뭉친다.

 

우리면내에선 윤씨와씨l가 성대결을 많이도 한다.

 

그러면 번번히 옥씨가 진다.  숫자가 작기 때문에 그렇다.

 

참 우습게도 인물을 보지 않고 옥씨가 출마하면 잽싸게 윤씨중의 누구를 출마케한다.

 

인물이 아니고 숫자다.

 

이런 모습을 보고 커서 그런지 성대결에 집착이 강했던 동네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이웃집아이 화야네가 고등학교 무렵인가 동네를 떠나서 이사를 가는데도

 

그다지 슬프거나 아쉽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더러 이상하게도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

 

무슨이유로든 핑계를 만들어 싸움을 하러 오기도 했던 그들...

 

그 땐 우리도 우리편이 필요해서 우리집에서 좀 위로 올라가면 사는 언니네랑 이형제를 맺어

 

싸울 땐 같이 힘을 보태기도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늘상 졌다.

 

화야네엄마는 사업수완이 있는 사람으로 산에다 절을 지어서 팔아먹기도 했고

 

몇층건물을 지어서 당구장이며 양장점을 세놓기도 하던 한 때는 참 잘나가던 집이

 

폭삭 망하고 알거지가 되어선 화야엄마는 중풍치매까지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남의 집셋방에서...

 

지금 생각 해 보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이고 이웃이었는데... 이젠 보면 웃으며 반갑게 손잡아 줄 수 있겠다.

 

그 땐 뭣땜에 그랬을까???

 

기싸움이 도대체 무엇이었나

 

요즘 보면 선거철에 그런 걸 이용하는 어떤 묘한 힘에 휘말린 것이다.

 

우습다 그런데 화야네는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웃이었는데...

 

우리동네 윤씨언니들도 다 보고 싶다.

 

실이어니, 자야언니, 옥이언니. 봉희언니들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