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열두살때였제 해방이 안 되었나
왜놈들하고 싸우다가 근근히 해방이 안 되었나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때리빗다쿠데 그래가 일본이 항복을 안 했나
일본이 항복하기전에 요 사람들은 일본에 가모 공장도 많다고 그래가 돈 버리로 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우리오래비도 장시포국민핵교를 졸업하고 형부가 일본에 감서 오래비를 안 데꼬 갔나
일본에 간 오래비는 공장에 취직 해가 돈도 잘 버리고 설, 추석대 되모밀감도 한 상자씩
보내주었제 얼매나 많이 있었는고 그 때는 밀감이 일본에만 났는갑데 참 그때 밀감을 부치보냄서
감자를 보낸다고 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얼매나 살벌은지 장시포 비암바 모티(현: 대우조선소)에 있던 갱생이아제
집에도 고마마 폭탄을 때리가 그 잘 살고 좋은 집이 어그러지삐고 갱새이아제아지매도
폭탄을 맞고 안 죽어삣나 우리는 무시바서 굴에 들어가가 숨고 그 때는 거떡하모 굴에 들어가가 숨어띠
라 숨으로 갈 때는 묵고 살끼라꼬 미숫가리, 보리가리 요런거로 갖고 가고 그랬제
참 너그동네 중길이라꼬 알제?
"아 예 중길넷집 들어 봤어예 배 타고 일본 가다가 폭탄에 맞아 죽었다꼬 하데예?"
"그래 마이도 죽었다
만날 굴에 숨으로 가는기 일이었는기라
그라다가 해방이 된다꼬 난리가 안 났더나 좋다꼬
이지삐도 안 한다 1945년8월15일 해방 된 날 아이가
천지도모리고 좋아서 날띳다아이가
그래도 우리오래비가 일본서 돌아와가 아부지한테
"아부지요 우리 말여이도 학교 보내 주소 일본에는 여자들도 다 공부로 하대요
마이 배아야하는기라요 저래 나 놓지 말고 학교 보내이십다"
그랑께 듣고 있던 아부지가 고마마 열을 냄서로
"벨시럽다 가수나가 공부해가 어데 쓰끼고? 도청서기보낼라꼬 ?
가수나 공부시키가 아무짝에도 몬신다 씰데가 있어야제"
그 때 나가 핵교 보내도라꼬 우깃다쿠모 핵교 가시낀데 안 우기가
머스마동생만 핵교가고 나는 핵교 문턱도 몬가밨다
왜그래 바보였던고 악을 쓰고라도 보내도라꼬 해 보는긴데
동생상기는 중학교도 가고 큰오래비는 일본에서도 공부로 좀 더 했으끼다
우리형부도 일본서 학교 댕깃고
그런데 해방이 되고낭께 요번에는 뺄개이들이 막 안설치나
뺄개이는 공부 좀 한 유식한 동네총각들이 다 뺄개이로 했는데
우리집에도 만날 같이 뺄개이하자고 찾아와도 그 떄 오래비는 장개로 가가
우리새이가 빨개이도 하지말고 고마 있으라케가 빨래이를 안 했는데
하도 빨개이세상이 돼논께 군인들이 또 집에 찾아와가 징키고 안 그랬나
빨개이가 잡히모 군인들이 잡아가가 직이기도 하고 총살도 안 시키삣나
너그동네도 난리 안 났나 마이 죽었제
"그 때 마이 죽었지예 지세포에는 바다에 쭉 세워놓고 총으로 갈기삐더라쿠던데예
나는 몬바서 잘 모리지만 애비친구 삼촌도 의대생이었는데 총맞아 죽었다꼬하데예
지세포바다에서, 임신한 산모까지도 겨울바다에 딱 잡아 넣고 빨개이 짓 한 거 실토하라꼬 ? 참말로
끔찍했다 하더라꼬예"
어디서모 안 그랫싯고 세상이 얼매나 무서벗는데
우리오래비는 산중에 있는 논에 가서 소도 보고 물도 대는데 군인들이 따라와서
빨개이라꼬 실토하라꼬 이빰저빰을 갈기고 십급을 시키가
놀래가 정신이 이상해짓는기라 참 불쌍했다
공부 좀 했다꼬 빨개이끼라꼬 맞아가 놀래가 참 똑똑했는데 세상을 잘몬만내가
오래비가 나 너그아부지한테 시집보내놓고 안 그랬나
아주배골 배용구, 뱅구 두 동시다 뺄개이 했는데 듣고 뎅김서 총살로 안 시키삣나
군인들은 뺄개이집이라캐삼서 집에 와서 골뱅을 지고 몬살게 안 굴었나
6.25전쟁중에 나가 시집을 갔고 너그 아부지는 전쟁중에 순경이 턱 와가 군대로 잡아가삐고
너그아부지도 군대생활 5년을 안 했나 그래서 6.25참전용사가 안 됐나 수송병으로
강원도 춘천에서 있다가 나중에는 제주도에도 안 갔나
너그아부지 춘천에 살 때 나도 한 일년 그게 안 살았나
춘천은 그 때도 도시고 차도 많고 참 좋더라 거제도는 조선소 들오고나서 요레 됐제
춘천이 좋더마는 너그아부지가 고마 집에 가자캐가 안 왔나
집에 온께 고향이 참 우습데
강원도에 있응께 휴전이 됐삣다꼬해서 돌아왔더마는
거제도에는 피난민이 쏟아져 들어오고 반공포로들도 억수로 안 왔더나
그 때 인구가 얼매나 많았는고 세상이 어엽더라
아주어만집에는 방에 양갈보들이 방을 얻어 놓고 미군들을 꼬시가 돈을 버리고
그 양갈보들은 다 부산그런데 사는 아지매들이 자슥들 공부시킬라꼬
방을 아주에도 얻어 놓고 고현수월이런데도 두개씩 한 양갈보가 방을 따로 얻어 놓고
두집 살림 하는기 천지고 우습도 안했다꼬
너그집 산에는 피난민들이 마을로 이루고 안 살았나
그 쪽 연초삼거리쪽에는 그 때 부산국제시장 같았다꼬 없는기 없고 콩나물공장까지
다 있었다 나는 나무로 해가 너그산에 몰리 사는 그 동네에도 가서 나무도 안 팔아묵었나
묵고 살끼라꼬?
너그집에는 그 때 온산에랑 그 너른 집에랑 안 그래도 부잿집에 돈 검었을낀데???
"우리할부지가 그 때 화페개혁 할 때 돈 다발을 집에 살던 피난민이 가지고 부산으로 톳겨서
비료공장 지가 떼부자 됐다꼬 하는 건 알아예"
너그 할부지, 아부지사 유식한 사람들이라가 그 때 횡재했을낀데
하이튼 나무도 마이 팔아묵었다
송정에는 또 얼매나 어엽은 일이 있었는거 아나?
"몰라예"
논바닥에 구디로 파 놓고 포로들이 저그끼리 치고박고 하다가 죽으삐모
고마 들것에다 담아 와가 미군들이 논바닥에 던지삐는기라
그라모 논물이랑 송장물이 섞이가 튀 오리모 미군들이 고함을 치데
"갓 때미" 라꼬 미국말로 하데
죽는 종류도 여러질이라 맞아 죽고 자살하고 수월 해명 다 군인막사가 온 천지였다가
그래가 죽기만 하모 송정에 실어와가 논구덕에다 던지삣다아이가
우리가 논에 모심기라도 하모 논바닥에서 사람뼈조각을 얼매나 건지오린다꼬
죽은 시체가 묻힌 논바닥에서는 흙도 시커매지가 농사도 잘 안 되고
송정에서 농사진 것은 쌀로 팔로 장시포랑 가모 송장굴에서 키안 쌀은 묵기 싫다꼬 했다
"혹 우리 논에도 송장을 묻었어예?"
아이다 우리논은 그런 일이 없는데 많은 논에다가 송장을 쳤다아이가
"아 그래서 지금도 충해공원묘지가 송정에 생긴 것 아인가예?"
그거는 모리것다
할말이 천지빼까리거마는 오늘은 고마할란다
낼 또 본대로 씨버리보지머
말여이 잘 한다 머할라꼬 지나간 이바구에 맛을 디리가꼬..."
말려이는 나의 시어머니 존함이다 정확하게는 '김말연 여사님'
시어머님은 1934년생으로 1945년8월15일의 광복과 1950년 6.25동란이며
어지러운 전쟁중, 후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계셔서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대로 옮겨 보았다
'이야기뱃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집만 가모 사는긴가???(말여이 생각???) (0) | 2007.04.01 |
---|---|
별이할매가 본 세상풍경 (0) | 2007.03.29 |
정윤이오빠네 (0) | 2007.03.25 |
다시는 이라지맙시다 (0) | 2007.03.24 |
막걸리에 대한 추억 (0) | 2007.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