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 내 발자국(일기)

연 탄 이 야 기

이바구아지매 2007. 12. 3. 05:11

"톡톡톡 ... 무슨소리야?"

"드르륵"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니 비가 내린다.

찬 기운이  으스슥 어깨로 스며드니 이 비 그치면 진짜베기 겨울이

세상에 찰랑거릴 것 같다.

 

갑자기 연탄 생각이 울컥 솟는다.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꽃 스물두개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춤 추는 모습을 닮았다.

그리 생각하니 점점 더 추워지고 연탄 생각이 간절해진다.

 

내 곁에서 연탄이야기를  가득 쏟아내려는 검은 숯검뎅이가 활활 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온다.

 

1986년  그 해 겨울 봉천동의 겨울은  내 종아리살과 볼살을 한점씩 떼어 갈 기세였다. 내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첫 겨울은 지하창고에 연탄을 1000장 들이는 일이었다.

 

우리집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7동 1620번지 6통5반으로  그 해 3월1일에

결혼하여 가을에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근처에 있는 s대 경제학과를 목표로 한 늦깍이 만학도로 

우리나라에서 재수생 학원으로는 종로학원과 쌍벽을 이루던

대성학원 문과10반에서 제법  성적이 좋은 재수생이었다.

 

이런 사생활이 연탄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밖에 추적거리는 저 비는 가난했지만 꿈이 뭉개뭉개 피어오르던

새댁시절이   마치 가장 잘 타오르는 연탄불의 모습과도

닮은  강한  인상이 내면에 깔려 가지런히 추억되어 슬몃 헤집고 나오니

함께 추억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세금 2000만원으로 얻은 봉천동집은 독채로 방이 셋, 거실, 주방

그리고 제법 넓은 지하창고가 딸려 있었다.

내 나이  2학년 오후반때  서울살이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주인집 막내딸   이름은 방혜영 그 해 단국대학에 진학을 했고...

 

서울 사람들은 냉정하고, 깍쟁이고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른다는

 야트막한 상식을 가지고  감히 도전했던 서울살이...

남편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곁에서 은근히 타오르는

한 장의 연탄불이 되기로 했다.

  

 이런 불꽃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더 환해지겠다.

(사진출처, 엠파스 포토앨범)

 가장 아름다운 꽃...추운 날이 따스함으로...

(사진출처, 엠파스 포토앨범)

 

 

연탄을   한 창고 들여 놓은 다음 몇 장의 복사물을 들고  몇 곳의 전봇대에

가서 붙였다.

"하숙합니다

깨끗하고 조용한 방 , 젊은 지성인 환영, 도서 3000권  있음

TEL: 863~0468  금액 , 차후 결정"

 

ㅎㅎㅎ 아름다운 추억이구나

내가 서울에 가서 처음 한 일은 '하숙치기' 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은 벌어야 하고  그래서 이렇게저렇게 따져 보니

젊은 새댁이 하숙을 하면 인기도 있을 것 같고 또 늘 하는 일이라서 별 어렵지않게 할 것 같기도 하고... 사전에 시장조사는 다 했지만

막상 남편의 학업에 지장 주지 않으며 잘 할 수 있을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전봇대에게  부탁을 했다.

"전봇대야, 내게 꼭 착하고 좋은 하숙생 보내 줘  부탁할게 난 꼭 돈을

벌어야 해"

그렇게 한 스무장을 부쳤을까?

부친 장소는 지하철역 서울대입구역에서 관악구청쪽과 낙성대입구역까지

참 사당동쪽 방향에도 부쳤구나.

 

겨울 매서운 칼바람과  눈바람이 몰아쳤던  그 해 겨울에도   천장의

연탄이  있어  따뜻한 겨울을 났다.

 

우리집에서 큰 도로 하나를 건너면  연탄을 대 주던 근처의 쌀가게' 충남상회 '

가 있었다.겨울이면 시커먼 리어카에 연탄을 가득  싣고 오르막길, 내려막길을

리어카를 끄는  숯검뎅이 아저씨랑 뒤에서 밀던 숯검뎅이 아주머니는  겨울에도 땀을 삐직삐직 흘리시며 연탄 칠이 된

 검은 목장갑을 끼고 땀을 �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연탄주문을 하면

좋아서 꾸벅꾸벅 절하시던 모습도 떠 오른다.

지금 살아 계실까? 연탄도 팔고 쌀도  함께 팔던 흑백의

 대비가 참 궁금했던 시절

연탄은 겨울한철 장사라서 쌀과 함께 파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옆 집에 사시던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와  돈놀이를 하던

아주머니네는

어느 날 갑자기  아주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참 안타까웠는데

그 집 아들둘중 형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작은 아들은

경찰대학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우리집 바로 앞집은 상당히 잘 살던  중소기업체 사장님이 살고

있었고

성은 윤씨였다.

우리집과 더불어 셋방을 살던 셋방살이 전성환이네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남편이 실직해서  지하방에서 쥐 죽은 듯 고요하여 문 두들겨서 통성명을 하고 묵은 쌀을 얼추 반가마 주었다.

"아 ,하느님이구나,작은예수?"

훗날  어느정도 친근한 사이가 되자 내게 한 말

"보름가까이 굶었어요. 물만 먹고..."

성환이네는 훗날 악착같이 산 것으로 안다.

고향은 전북 전주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쌀과 연탄은 부자였다.

지하창고에 연탄이 가득했으니까? 그 덕택에 우리집 지하창고엔 도둑도 많이 들었다. 연탄을 훔쳐 가려고...

새벽에 연탄 불 갈려 가려면 얼마나 서글퍼고 무섭기도 했는지...

남편은 연탄가스에 질식할 것 같다며 아예 가려 하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탄 불을 갈고 또 불의 온도를 조절해야 하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화덕 하나에 3개씩 들어가는 연탄보일러로 3개의 화덕에 연탄을  수시로 갈아줘야 하고 연탄을 갈며 아래에 채인 연탄가루를 국자처럼 생긴 긴 쇠주걱으로

연탄재를 일일히 퍼 올려야 했으니 봉천동에 산 2년동안의

  겨울은 연탄이야기로

가득할 수 밖에  연탄가스의 냄새는  속이 메스껍고,두통이 나며 기침이 마구

나던 검은 연탄가스는 또 얼마나 무서운지,  뉴스에서는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우리집은 다행히 연탄보일러가 지하에 따로 있었고 내가 수시로

가서 연탄불을 살폈다.

많이 가는 날은 12번도 갔었다. 각 화덕의 불이 똑 같이 타오르지 않고

각기 달랐으니 어떤 날은 연탄재가 27개나 나올 때도 있었다.

연탄가스가 하도 지독해서  남편은  지하실 근처만 가도 꼭 죽을 것 같다며

용산에 가서 괴물같은 마스크를 사 와서 얼굴에 뒤집어쓰면 영락없는 외계인이었다. 기관지가 약한 남편은 연탄 근처에라도 가게 되면 콜록콜록 거리니...나는 일복을 타고 났는가?

 

어쨋거나 우리집에 하숙하겠다고  온  하숙생들 ... 그 첫 하숙생은 3달치나 하숙비를 떼 먹은 신아일보 기자를 사칭한 000씨 가짜 기자. 나중에

억지로 나가라고 했다.

하숙생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어서

그 때 우리집을 거쳐간 수 많은 하숙생들은  대부분이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로

인호, 성환이,한일이,영호,김기사(별명).기환이, 용준이, 2년동안  거쳐간 학생들은 제법 많았고 다하지 못할 이야기도 많이 엮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얼마나 많았는지...  젊은 지성인이 가득했던

우리집은 늘 복잡하고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87년 1월에는" 툭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서울대생 고 '박종철의 물고문'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다.

우리집에 하숙하던 서울대생들은 분노했다.세상이 분노하였다.

.우린 모두 가슴에 검은 깃을 달기도 했다.

특히 부산이 고향이던 성환이,박종철이 다닌 부산의 혜광고등학교후배였던 000는 눈물로 얼룩이진채 ... 그 해 겨울은 무지 살벌했다.

곧 이어서 연대생' 민주열사 이한열'의 죽음도 보게 되었고...

내가 서울로 간 시점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거의 불투명한

시기였던 때였다. 암울한 서울의 거리  그 거리는 춥고 한기만이 느껴졌던 때... 몸과 마음을 녹여 주는 연탄불이 필요하던 때

 그 시기에 나는 연탄불이 되어 활활 타올라 보고 싶었다.

 

난생처음으로 김치를 150포기나  담궈 본  겁도 없었던 때

시장에 배추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날마다 도시락을 싸 준 일

그들이 포장마차를 했을 때 200만원을 빌려 주어 열심히 장사를 하게 해 준 일들은 참으로 보람 된 일이었다.

연탄불도 가끔 갖다 주고 ...

참 그 집 딸내미 이름이 영숙이라했나? 효숙이라했나? 잘 자랐을까"

늘 포장마차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서울사람들이 깍쟁이라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 큰 애를 수술해서 낳을 때 봉천6동의 김권 산부인과에서

 120만원의 수술비가 턱 없이 부족해서

"원장님, 제겐 60만원 밖에 없어요.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괜찮다며 두말 않고 수술비를 50%나 깎아 주신  원장님은

지금 살아계셔야 하는데...

좋은 이웃들도 참 많았다.

 

2년 후 우리가 안암동으로 이사 갈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가득했었다. 우리집은  늘 대문이 열려 있었고 현관에는60~70켤레의 신발이 가득했었다.

하숙생들이 친구들을 데려 와서 일주일은 기본으로 머물기도 했으니...

골목시장의 갈치파는 할매는 먼 세상 갔겠지

"새댁은 뒤태가 미워 꼭 아들 낳을거야"

하고 듣기 좋은 말 해 주었지...그 아들이란 말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에사 맞는 답이 되었고...

ㅎㅎ 봉천동 골목시장에서 500원 주고 산 마늘찧는 절구통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도아어머니"

내가 하숙을 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잊지 못할 큰 언니같은 사람

"새댁은  싹싹하고 친절해서 참 잘 할거여 암만 그 집 사람들 출세도 허고

나는 그리 믿네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인가  어째그리 다 똑똑허까이 이이"

친정이 벌교라던 도아어머니도 그 땐 참 예쁜  젊은 아주머니였는데...

그 당시에 하숙집 아주머니들 중 내가 제일 젊었다.

ㅎㅎ 음식 맛은 둘째고  이만하면 우리집이 인기

있을 만 하지 않겠나 도아네에서 남편과 서울대 대학원에 졸업반이던 시 동생이 한 동안 자취를 했었다.

언젠가 꼭 찾아 볼 고마운 사람들...

그들은 아직도 봉천동에서 살고 있을까?

 "우리 싹싹한 새댁 어여 와 금방 연탄 불구녕 확 열어났당께로!

여자는 아랫도리가 떳떳해야 해 하믄"

하던 도아어머닌 예순이나 되었겠지?

 

연탄불로 따뜻하게 지지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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