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 내 발자국(일기)

완이네집

이바구아지매 2007. 12. 12. 13:58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다니...

가끔씩  찾아 가는 친정집 근처의 완이네집...그 집 가족들은 오래전에

다 떠나가고 없는데...

 

완이네집,.

아직도 소녀같은 단발머리를 하고 ,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담장위에 손 얹어 놓고 바라보며 웃음 흘리던

완이엄마의 모습이 친정집 가는 길목에서   예전처럼  늘 그 자리에서 내다 본다.

햇살이 따뜻한 날이면  열려진 대문밖으로  나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또래아이들 모아 놓고 노래도 가르쳐주고 성교육도 시켜주다가

 어느 햇살이 좋은 날에는 또  들판으로 쏘다니며 칼춤도 추었다.

"학교 오다가 너그 동네 미치개이 봤다"

"미치개이가 우째 아를 낫시꼬?"

"그래도 억수로 똑똑하더라마 ?"

"미치개이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돌아삔기라쿠대?"

"완이저그아부지는 사람이 억수로 신사더라  코는 루돌프 사슴코고"

"완이 저그 형님들은 일류대학에 안 댕기나? 공부 억수로 잘 했는갑다 그자" 

하고 날마다 우리동네를 지나서 가는  친구들은 완이네 이야기로

아침을 열었다.

 

완이엄마는 미친여자였다.

완이엄마가 들판을 쓰데다니는 날은 동네의 누군가가 허벅지를 찔려 피가 나기도 하고,

어깨를 칼에 맞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네사람들은 그 집으로 쫓아가서 화를 내며  차마 따지지도 못했던 

 참으로 순박한 동네사람들이었다.

 지서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말이다.

그 땐 그랬다.적어도 그런 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진 않았다.

 동네사람들은 완이엄마도 동네의 한사람으로  인정 해 주었다.

누구도 뭐라고 짜증내지  않았고 , 그냥 우리동내 사람이고 우리 이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간 후 몇 년 뒤에 다시  돌아오니

그 땐 이미 완이엄마는 돌아가셨고   우리동네 제일 높은 산 굴재봉 꼭대기에  묻혔다고 했다.

친정엄마가 들려주는 말에 의하면 완이네로 들락거리는  뜨내기 삼장수가  있었는데  작정하고  완이네 새엄마로

 들어와서  그 많던  재산도 말아먹고 완이엄마도

가두어 먹을것도 주지 않고   굶겨 죽였다는 소문이 도네에 파다하게  나돌았다는데...

알 수는 없는 소문이긴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완이아빠는 아주 성실한 체신공무원으로  000우체국장에 재직중에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 친구 완이는(동네친구)? 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 사는 삼촌댁에 양자로 갔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삼촌댁 숙모님이 아들을 낳았으니  완이가 필요없게  되어 쫓겨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완이의 작은형은  오빠랑 같은 대학에 다녔는데 대학   2학년때 군에  가서 자살했다.

오빠의 말에 의하면 군대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편지에 쓰여 있었는데

그 편지를 받고 난 일주일 후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오빠는 친구의 죽음에  참 많이도 눈물을 흘렸었다.

완이의 한살 위의 누이 영자야언니는  바보여서  동네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바보자야' 였다

이름이 분명 영자였는데 ' 바보자야'라고 불렀는지  멋도 모르고 우리도 어린시절 늘 그렇게 불렀다

바보자야라고. 영자언니는 늙은 삼장수 아지매가  어느 날 차에 태워가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려버렸다고

했는데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완이의 아랫동생 구야도  지적 수준이 너무도 낮아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형사고를 쳤다 .건넌마을에 살고 있던

순아가 좋다며 밤에  홀라당 벗은 채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자고 있던 순아를 덮쳤다.

이 일이 있은 후  구야의 행방도  알길이 없다.

 

완이의 막내동생 수야는  서울 삼촌댁에서 이화여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데리고 와서 

 삼장수 아지매가 조선소에 다니는  중늙은이에게  19살 고운 나이에  강제로 시집을 갔다.

그냥 갔다 바치다시피 혼인을 한 것이다. 완이의  모자라는 누이 영자언니는  

 길을 잃어 헤메다가 죽었을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단정지었다.  제법  많던 재산은 삼장수한테 다 털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완이 아버지는 어느 어장집에 가서 그물 깁는 일을 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만큼  무겁고 슬픈이야기가 또 있을까?.

친정집 가는 날에는  언제나  완이네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곤 한다.

지지리도 슬픈 이야기만 넘치도록 많았던  그집.

완이네 가족들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그터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완이는 어딘가에서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어디서든 슬픔을 잊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완이녀석 고등학교 2학년때 전학을 오자마자  어느 날,  대뜸 나를 찾아와서

"나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라고 말했다.

"싫다, 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하고 대문을 쾅 하고 닫아버리며 쌀살맞게  내 쫓다시피 하였다.

그  때  그렇게 말하는 완이가 얼마나 밉던지.

고개를 떨구고 가던 완이의 뒷모습을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수십년씩 흐르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냥 동네친구인것을  새삼스럽게  물어 볼  필요조차도 없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내 마음도 많이 넓어졌고.

완이가 친하게 지내자고 했던 말이 어제처럼 또렷하게 생각난다.

우리집에서 20m 거리에 살았던 이웃친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 같아

우리집을 갈 때면 언제나  미안함과  짠한 생각으로  나를 힘들게 한다.

"완아, 미안 해 어디서든 잘 살아 그 땐 정말 미안했어."

 

 배추속이  차  가고...

 우리동네...

 

 완이네집...모두가 떠났다. 아주 오래 전에. 집 주인도 바뀌고

마당에 우물이 있었던 집, 마당에 목련꽃이 가득 피었던 집.

 김영삼 대통령 생가 가는 길... 대금산 진달래 축제가 이정표로 장식하고...

내가 살던 고향집(친정집)

 

때로는 지나간 기억속의 아련한 아픔이 뜬금없이  되살아난다.

가끔씩 찾아 갈 수 있는 고향집, 슬프기만 한, 친구네집 이야기

지지리도 슬픔이 가득했던 완이네집...이젠 내가 철드나보다.

완이랑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왜 이제사 그 생각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