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때 기차가 밤낮으로 지나다니는 기찻길 옆에 살았다.
제일제당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어린 날 데리고
기차소리를 들으며 이 노랠 불러 주셨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그기가 바로 부산 범 내골 이었다.
낮에는 혼자 집을 보았는데 그런 시간이면 나는 어김없이 기찻길에
나가서 놀았다. 날마다 그렇게 놀았다. 아버지는 회사에, 엄마는 물장사
(가정집에 물을 길어 다 주고 한달치 돈을 받음)를 ,나가시고
큰 오빠는 학교에 가고 혼자 덩그러니 집에 있으면 혼자 있기 싫어서
집을 뒤쳐나가서 철둑길로 마구 내달렸다. 나는 친구도 없었다.
기차가 지나는 선로위를 겁도 없이 내 달렸다. 왜 달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더운 여름날에는 홀라당 벗고 철로를 달려가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던
큰오빠한테 붙잡혀 집에 붙들려 와서 다시는 안 나겠다는 맹세를 하고
죽도록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한 오빠는 엄포만 놓고는
풀빵을 사다 주었다.
오빠는 혼자 집에 남아 있는 내가 많이 불쌍하다고 했다.
그 해 여름에 나는 더위에 옷을 홀라당 벗고 여전히
철둑길에 나가 놀았다.
그 날도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집에 오다 홀라당 벗은 날 보고 붙잡으려고
달렸는데 내가 선로에 넘어졌고 그 때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오빠는 죽을 힘을 다해 나를 꺼집어냈고 옷을 입지 않은 나를 안고도
좋아서 마구 뽀뽀를 해댔다고 가끔씩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기차소리를 무지 좋아했다.
지금도 내 알람소리는 기차소리다. 그냥 좋다.
새벽이면 기차가 빽빽하고 닭이 홰를 치듯 우리집을 울렁거리며 지나
가면서 잠을 깨웠다. ㅎㅎ 기찻길옆에 살면 자식이 많다고 하더니...
나의 형제는 8남매다. 아들여섯 딸 둘...다복하여라 ...
어린 시절부터 기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살아서 그런지 거제도로 이사를 와서
기차구경도 못하고 시골아이로 변하자 어릴 적 들었던 기적소리가
종종 그리웠다.
기차가 없는 동네 ,하지만 거제에는 기차대신에 넓고 넓은 바다가 있었다.
나는 가끔씩 생각해보았다. 바닷가를 기차가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그 이야기를 하면 어쩌면 철로가 놓일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지역신문에 나기도 하였다. 철도가 꼭 필요하다고...
국민 학교, 중 학교, 고등학교를 거제도에서 다닌 나는 늘
기차가 그리웠다.
방학때 부산에 가면 기차를 타 보고 싶어 가슴이 벌렁거렸다.
날마다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는 어느 시골 간이역이 있는 그런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다.
나는 기차가 지나는 풍경이 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져서 방학을
맞아 부산에 올라가면 가끔씩 혼자서 기차를 타고 작은 간이역인
기장 , 일광 ,삼랑진 이런 곳에 가 보았다.
해운대의 청사 포 에도 가 보고 해가 지는 청사포의 저녁무렵이 얼마나 좋던지.
왜 그렇게 기차가 좋았을까? 어렸을 때 늘 듣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통일호, 비둘기호를 타고 가 보았던 간이역들
박 불량이가 좋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만나려면 적어도 기차를 타고 오고 가야 한다는 것
칙칙폭폭 소리를 내는 차창너머로 시골풍경이 나타나고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모습이며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달려 있던 풍경이며
들판의 추수를 끝낸 황량한 빈 들판이며 까치가 포르르
날아올라 감나무에 앉는 모습을 좋아했다.
창가로 보이는 과수원의 사과가 좋았고, 불량이네 고향도 그런 곳이라 했다.
작은 시골 역 '청도' 그래서 처음부터 더 끌렸는지 모르겠다. ㅎㅎ
지금까지도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생각을 가끔씩 해 보곤 한다.
바다가 옆에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고, 기차가 다니는 작은 간이역이 있어
기적소리를 울리며 꽁무니가 산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면 ,콧등이 짠해지며 괜히 그리움이 울컥 솟아날것 같은 그런 곳
나는 그런 기분을 느껴보며 살고 싶었다.
또 기차의 앞모습이 산모퉁이를 돌아서오면 내가 기다리는 누군가가
꼭 그 기차에서 내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나는 기차가 지나가다 두 세 사람 내려주고, 두 세 사람 태워가는 간이역에 묘한 향수를 느꼈다.
동해남부선을 타고 가 본 일광역은70,80년대의 전형적인 건물 형태로
건물색이 누렇게 바래 쓸쓸하게 보이는 건물이 해 지면 가로등
하나만이 지키고 있던 간이역의 역사였다.
영화 (갯마을)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일광역은 기차역에서 걸어서
5분이면 일광해수욕장이 나왔다.
하루 종일 밝은 해가 비춰 부쳐진 일광이란 이름.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역무원도 떠났다고 한다.
대합실 벽에 붙은 긴 나무의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그 곳
하루에 두 차례 기차가 정차하는 곳
그 곳이 간이역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교통이 많이 발달한 지금은 편리한 자가용으로 혹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보고 싶은 곳을 얼마든지 여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추억을 가득 머금은 간이역들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간이역이 되었다.
부산 근교의 삼랑진역과 물금역은 부산으로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아서 기차통학생들의 이야기도 무지 많았다고 기억한다.
어느 카페에서 읽은 글인데 물금역과 삼랑진역의 학생들이 양분되어
패싸움을 하고 예쁜 여학생이라도 있으면 서로 사귀어 보겠다고 싸움
박질이 나고 혹 학교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정학처분을 맞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도 몇 번인가 삼랑진, 물 금, 일광, 이런 간이역에 내렸다가
남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던 적도 두세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단체로나
까불지 일대일로는 여학생들에게 약하고 아무렇게 하지를 못했다.
오히려 쑥쓰러워 멋적어 했을뿐
가나가 조금만 더 크면 옛날에 가 보았던 작은 간이역들을 한번
찾아 보아야겠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따뜻하니까 간이역이다’
숨 막히게 아름답지만, 숨죽이게 외롭지만 그 길의 끝에 '승부'역이 있습니다.
사방의 어디를 둘러봐도 시퍼런 산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첩첩의 산에 가려져 가난한 연인의 신혼 방처럼 작아진 하늘 아래,
한 채의 간이역과 다섯 채의 집들이 있습니다. 라고 승부역을 돌아
본 누군가가 이렇게 글을 남겼다.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라고 바위에 새겨진 이 글귀는 60년대 부임해 온 어느 역무원이
쓴 글이라는데 오지중의 오지에 위치한 간이역이지만 사람이
보고 싶어, 기찻길이 한 눈에 내려 다 보이는 역 위의 한두
채인 집으로 올라가 봤다는 첩첩산골
간이역이야기, 오늘은 오래전의 기억들이 흩어져 있는 간이역이
생각나는 고즈녁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