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일곱살의 가을빛

이바구아지매 2008. 1. 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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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 우리 고향 가입시더 내사마 부산이 지긋지긋하요

악착스레 돈 벌면 뭐하요 남 좋은 일 다시키는데"

"그리 부산이 싫다면 가야지 하기사 고향에 부모님 계시고 나는

외동아들인데 부모님 모시고 살아야지 "

 

내가 일곱살이었던 가을에 우리 가족은 부산 범내골을  떠나왔다.

학교에 다니던 큰 오빠만 남겨 두고 그 당시에 거제도에는 할아버지께서

둘째오빠부터 바로 위의 언니까지 데리고 사셨다.

마산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큰고모네 식구들도 할아버지댁에

살고 있었고  부산에서   약국하던 둘째고모네 가족 일부도 

  할아버지댁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댁에는 식구가 아주 많았다.

내 기억으로는 밥상을 한끼에 일곱상에서 여덟상까지 차렸으며

날마다 무슨 잔치집 같았다. 게다가 손님이 끊어지는 날이 없었고...

 

 세째고모네는 그 많던 재산(지금의 삼성조선소자리)을 팔아서 중국으로

가셨는데   불이 나서 고모네 가족들이 다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모부네  다른 가족들은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시집올 때 딸셋  아들  하나인  아주 귀한 아들한테 시집을 오셨다. 외가는 외할아버지가  아들넷 딸 둘을 두셨는데

장남은 국민학교를 마치고 몸이 약해서 집에  머물렀고

둘째 외삼촌은  아버지랑 친구사이로 국민학교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잘 하여 일본인 담임선생님도 많이 좋아하시며

꼭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라고 하셨다는데 인물또한 배우처럼 잘 생기셨다. 아버지랑 항상 라이벌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와서  고향에서 면서기를 할 때

외가에 가서 죽치고 살았다고 하셨다.  딸을 달라고...

아버지는 중매쟁이들의  구미당기는 혼처자리로 입방아에  오른

  신랑감이였다는데  중매쟁이들의 혼처자리를 다 마다하고

외할아버지께 당당히  엄마한테 장가들겠다고  얼마나 정성을 다하였던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였던가 

아버지의  용기는 대단하셨다..

 

그래서인지  평생을 엄마만 사랑하시고 옆눈 한 번 안 팔고  저 세상 가셨다.

 

 

  외가에 있던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몽땅 실려서 우리집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고 나서 아버지랑 혼인을 허락하셨다는 로맨틱한 사연...  외삼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는 세아들을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서 반듯한 직장을  갖게

 해 주신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분이셨다고 한다.

불행히도 일본에  큰 아들 대신 강제징용에 

 끌려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도 아파서 일찍 돌아가셔서 난 본 일이 없다.

큰 외숙모가  외할머니인줄  오랫동안 잘못 알았다.

 

외숙모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지만  후덕한 마음씨와   부지런함으로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가시고 자식또한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셨다.

엄마는  외삼촌들의 후광으로 늘 큰 소리를 치곤 했다.

아버지쪽 보다 외가쪽 가문이 훨씬 좋다고 이 소리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엄마가 늘 우기는 헛세를 곧장 부렸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성인이 되는 동안에까지 외가에 가서 지낸 추억이

 많다. 지금 생각  해 보니 잘난 외삼촌들의 저력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부산이 징그럽다며 복잡한 큰댁으로 돌아가려 했던 엄마는

사실 부산에서 큰 사고를 쳤다.

계주를 하여  아버지 몰래 돈놀이를 하다가 곗돈을 떼여 혼이 크게 난 적도 있고, 큰 금액의 돈을 빌려가서 자살을 한 사람과 제법 큰 돈을 모았는데 고향사람이 빌려 달라고 사정하여 며칠뒤에 갚겠다는 바람에 그 말을 믿고

돈을 몽땅 빌려 주어 재산을 다 날린 꼴이 되니 도시 사람들이 무섭다며 우겨서 결국 큰댁인 복잡한 할아버지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 그  중 한 사람은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현시장에  언니랑 가서  생선을 사려고    고르려니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들컥 우리를 붙들고

"혹시 아버지 성함이 옥 영자 현자?"

아버지의 존함을 대면서 안부를 물어 돌아가셨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갈치 한 상자를  그냥 주셨다.

"내가 줄거라곤 이것밖에 없네  돈 떼 먹고 도망 간 년   여태 이러고 산다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제

아이구야 가만 보니   니가 이래 마이 컸나?눈이 동그랗던 그 아구나 

어짜노 이 죄를 다 어째갚노 내가 너그집 재산을 다 날리묵었는기라

너그 아부지는

똑똑하고 사람이 좋아서 거절을 못했는기라 돈을 빌려 달라고

고향사람들이 몬살게 마이 굴었제  그래도 찾아가모  꼭 밥을

챙겨 먹이가  가게  안 했나 하기사 거지도 밥상 채리준 너그집이었는기라

오래 살아야 하는데   어쩌다가 그리되었노?

죄 짓고 몬산다는 말이 요런긴갑다.  엄마한테 미안타캐라  죽을 죄를

 지었다 내 이 죄를 평생 몬갚을끼다  "

하시며  눈물을 훔치던 생선장수 아주머니...

 

그 날 우리가족이 거제도에 이사를 오느라고 금성호 배를 탔었다.

배는 출렁거리며 가을바다로 뱃고동을 불며 부산을 출발하여

거제도로 향해 나아갔다.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아가씨,동백아가씨를

뱃머리에 남겨 두고 아버지는 엄마의 성화에 직장조차 그만두고 부산을 떠나 왔다. 가을바다는 햇살이 반짝이고 물결은 찰랑대며 파도는 잔잔했다.

배안에선 충무김밥도  오징어볶음과 무김치랑 함께 팔았다.

 

두어시간 만에 옥포항 부두에 배가 닿았다 부웅 뱃고동을 울리며 부두에 정박을 하였다. 훗날  우리집에서 들어보면 뱃고동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4km밖까지 뱃고동 소리가 들려 오면 우린 밥상머리에서도

"옥포에 배가  들어오네"

하고 밥을 먹곤 하였다.

 

 이미자의  흑산도아가씨가 다시  옥포 바닷가를 노래로 물들였다.

배가 옥포부두에 도착한 것이다.

배에서 내리자 해는  지고 바닷가에 다닥다닥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초가집들의 굴뚝에선  이른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언덕 위의

밭고랑에는 무잎들이 해바라기 하고 고구마 넝쿨도 넓은 고구마밭을 휘감아 납작한 고구마잎은 하늘을 향해 활짝  펴고 있었다.

언덕 위의 감나무에는 빨갛게 익어 가는 감들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었고...

 

할아버지네로 가려고 큰 신작로 길을 향해 걸어가는  들녘에는

벼가 익어서 가을바람에 한들거리고 언덕 위의 억새풀도 흰수염을 간들거렸다.익어가는 벼를 참새한테 안 뺏기려고 허수아비는 찌그러진 밀집모자를 쓰고 논가운데서 가을 바람에 흐느적 거리며 참새를 속여 먹었다.

뒤 돌아 보니 금성호는 다시 통영으로 향해 떠나가고  바닷 갈매기는 끼룩끼룩대며 바다위로 날아 올랐다.

 

발부리에 채이고 부딪던 돌맹이들과  흙먼지를 맞으며 신작로에 올라서서

내가 신은 빨강 운동화를 내려 다 보니 희뿌연 먼지를 가득 맞아

도깨비같은  모습이었다.

어둠이 몰려 오니 옥포고개를 빨간색 두 줄이  옆으로 그으진  버스가

와서 우릴 태워 할아버지댁으로 달려갔다.

덜컹덜컹 비포장 길을 어둠속으로 달려 갔던  그 밤 길

 

 

   ㅎㅎ  내 일곱 살의 가을을 그려 본  수채화  거제도에  이사  오던 날

가을이 수 놓은  풍경을 기억속의  그림으로  덧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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