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느 들판 논둑아래 엎어진 허수아비 하나 있을까?
비도 맞고,바람도 맞고, 눈도 맞은채 구질구질 세월의 때묻은 옷 입고
엎디어 있을까?
어리석기만 했던 허수아비야
가을내도록 참새가 골려 먹던 허수아비야
날마다 두 팔 벌리고 세상을 안으려 했던 거니?
두 팔만 벌리면 참새가 무서워하던?
그래도 허수아비야, 잘한 것도 하나 있긴 하구나
두 팔 벌리고 가을 햇살을 몰아넣어서 벼를 익게 하였구나
헤진 밀집 모자 눌러 쓰고 우리아버지 낡은 와이셔츠 얻어 입고 땡땡한 가을 햇살에 얼굴 까맣게 익어가며 참새 쫓느라고 애 썼어
영악한 참새가 어디 네 말을 듣던?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랬지 허제비라고(제 구실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 을 빗대어서 부르는 말이야 ㅎㅎ 넌 그래도 본래 순하고 거짓말을 몰라
사람들은 그나마 널 충직한 우리의 허제비로 들판에 세웠지
참새도 안 무서워하고 방아깨비, 잠자리도 안 무서워한 허수아비야
논둑풀속에서 물뱀이 스르르 지나다가 네 다리를 감고 올라가도 넌 그냥 꿈틀거리기나 했지 물뱀보고
"으흥 그럼 안 돼 저리로 가"
이런 말 한 번 못했지
참새들이 떼지어서 포르르 날아와서 쫑알대며 벼이삭을 콕콕 쪼아 먹으면
"저리가 주인이 오면 너희들 죽을지도 몰라 어서 가 다치면 어떡해"
하고 느린 곰탱이처럼 눈 끔뻑거리며 몸짓으로 흐느적거리니
참새들이 콧방귀를 끼는게지 그럴 땐
아주 빠른 몸짓으로 우람하게 펄럭여 보란 말이야 넌 덩치만 컸지 실속이 없어
어느 해 가을이었다. 허수아비만으론 넓은 들판의 참새들을 쫓을 수가 없어서
국민학교 2~3학년인 쪼무래기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으로 참새를 쫓으려 갔다. 그 날도 논둑 하나를 아래위로 경계인 갑도랑 덕순이가
참새를 쫓으려 갔다.
갑도는 새총을 들고, 덕순이는 긴 장대를 들고 논둑길로 가고 있었다.
"나 이 새총으로 새 잡으면 참새구이 해 물끼다, 참 참새구이 얼매나 맛있노"
"갑도야, 난 이 장대로 참새 잡으모 내가 잡았다꼬 우리집에 가서 장대에 높이 당글어 매 놓을끼다 사람들이 다 보거로"
이런 사정도 모르고 참새들은 한 무더기 들판에 내려 앉아서 벼이삭을 콕콕 쪼아 먹고 있었지 정신없이
"엇 참새잖아 덕순아, 가만 있어 내 명중실력 이래뵈도 새총실력이 이성계아이가 가만가만 참새가 눈치채면 말짱 도로묵이다이"
"나가 장대로 팍 후리치까?"
"안된다 새총으로 잡으모 된다"
갑도의 새총안의 콩알은 벼이삭을 뚫고 참새한 마리르 팍 꼬꾸라지게 했지
그 날 참새구이는 당연히 동네에 고소한 냄새를 풍겼고
덕순이는 긴 장대로 참새의 눈알을 밤탱이가 되게 했지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참새들이 겁을 먹고 한 동안 갑도네 들판에 내려 앉지 않았지 날마다 깡통줄이 출렁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가을 들녘을
풍각쟁이처럼 딸깍거리던 그 가을도 성큼성큼 사라지고 겨울이 왔다.
허수아비는 할일없이 허제비가 된 채 언덕밑에 널부러졌다.
겨울이면 마당에 멍석 깔고 벼를 내 널어 놓으면 콩쥐네 마당에 내려 앉던것처럼 참새가 포르르 떼지어 날아들어 벼를 쪼아먹던 그 참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이제 허수아비는 심심하고 외로운 겨울을 만났다.
아마도 밤에는 도깨비로 변할테지 ...가끔씩 허수아비도 참새가 그리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