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훌쩍지났어도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황폐화된 포로수용소 흔적이나 녹슨 철조망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2008년 2월17일 혼자서 거제시 고현리 상동리에 위치한 '거제포로유적공원'
에 들러서 찬바람 맞으며 말로만, 혹은 책으로, 영화로,드라마의 소재로 종종 쓰였던 거제포로수용소 내부에서 포로들이 생활했던 모습을 디카로 가득 담아 보았다. 전쟁의 상흔, 포로들의 아비규환, 그 흔적이 너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서 좀 아쉬움이 남긴 하였지만 전후세대인 나도 겨울바람 만큼이나
아픈 역사의 모습을 읽어낸 의미 깊은 날이었다.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결정 된 이유
전쟁에서 포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에서도 남한군과 북한군뿐만 아니라,전쟁에 개입한 유엔군과
중공군까지 양 진영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생겨났다.
전쟁초기에는임시로 대전 등지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으나,1950년11월에 접어들자 포로가 크게 늘어13만 7,000여명에 달했다.
유엔사령부는 경제적 부담을 들기 위해육지에서 560m떨어진 거제도에
포로들을 격리시키기로 결정했다.
육지에서 쉽게 이송할 수 있으며, 계룡산,옥녀봉,국사봉,등으로 둘러싸여
경계하기 용이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거제도의 중심인 고현 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1950년2월~6월, 15만여 명의 공산군
포로가 고현향으로 이송되어 각 단위 수용소로 분산 ,배치되었다.
공산군 포로는 인민군 반공포로,중공군 포로,여자포로,인민군 친공 포로,
남한 출신 의용군등 포로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었다.
그 후 17만3,000여 명에 가까운 공산군 포로의 경비와 관리를 위해
유엔군 측 경비 병력9,000명(한국군 1,300명,미군 7,700명)이 거제도에 주둔했다.
자유를 향한 17만명의 의지가 철조망을 끊어내기까지의 몸부림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사상과 이념이 대립된 전쟁터 6,25가 남긴 제2의 전쟁은 거제도에서
또 다시 아픔을 낳게 되었다.
전쟁의 상처와 그 흔적들이 사진속으로 걸어 들어 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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