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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뒤로 다가 온 설 (구정)을 달력으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빨강색으로 확연하게 도드라진 25,26,27 ...삼일이 무섭다.
나를 노려보는 빨강옷을 입은 숫자들, 이미 나는 겁에 질렸다.
며칠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프다 팔,다리,어깨까지도...
바로 명절증후군이 찾아든것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괜히 짜증만 난다
일가친척들이 많이 찾아올것이고 일일히 반갑다며(진정으로 그들이 반가울까?) 세배하고
술상보고, 떡국차리고, 때되면 밥상도 차려야한다
이런 설이 어찌 두렵지 않겠나
이제 일이 겁난다 그리고 세배드리러 찾아오는 일가친척들도 솔직하게 말해서 나를 겁에 질리게 한다.
어쩌다가 맏며느리가 되었는지?
덩치도 작고 일도 잘못하고 사려깊지도 못한 속좁은 여자인데
이렇게 막중한 책임감이 부담으로 느껴지는 맏며느리란 위치...
나도 어린시절에는 설이 마냥 좋기만 하였다
설이 다가오면 얼마나 설레이고 좋았는지
작은 조막손으로 손가락 열개를 폈다 오무렸다 를 수 없이 반복하고
"까치까치 설 날은 어저깨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라는 노래는 설을 기다리는 내내 수백번 아니 수천,수만번을 불렀었다.
설을 기다리는
내 어린 가슴은 긴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환희의 기쁨처럼 두둥실 떠 올라 한살 더 먹는 나이 따위는 두렵지도 않았다.
설이 가까워지면 제일먼저 이불호청을 빨았다 이불호청은 빨아서 삶아 풀 먹이고 다듬이질
하여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때문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었다(나는 물론 엄마의 충실한 조수였고...)
우리집 윗채의 작은방 옆 쇠여물죽 끓이는 큰가마솥에 장작불 가득 때놓고 물 팔팔 끓여서 양잿물로 이불호청을 벅벅 치대문질러서
큰 쇠다라이에다 따뜻한 물과함께 이불호청을 담아 이고 집에서 5분거리인 냇가로 갔다
이불호청이 담긴 뜨거운 쇠다리이를 또아리에 받쳐 이고 신잘로를 걸어가면 엄마의 머리위 다라이에서는 안개같은 하얀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따뜻한 물과 양잿물냄새가 겨울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달려들면 그런 엄마의 치맛자락 뒤를 따라가던
겨울 한 모서리가 따뜻하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맑은 개울물도 물안개를 피워올리고 거울속같은 물속에 이불호청이 떡 하니 잠수를 하면 손 호호불며 조막발로 자근자근
밟다가 도저히 못 참을정도로 발이 아리면
식어가는 다라이속으로 얼른 쫓아가서 발을 담궜다 그 때 느꼈던
온기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엄마는 생활속의 지혜로 빨래가 끝날때까지 쇠다라이에 남아 있던 물은 다 식지 않은 온기로
빨갛게 꽁꽁 언 내 발과 손을 녹여주었으니
그 따스함은 유년의 그리운 빛깔로도 반짝인다.
숨이 멎을것만 같은 찬물속에 두 발 번갈아 깨목발 콩콩뛰며 누비바지 동동 걷어올리고 물속에서 고운 조약돌 주워
차롓상에 올리는 일도 참 좋았다
작은정성이 복을 받는 일이라며 차롓상에 올리는 조약돌 하나도 흐르는
맑은물엣것 건져야 정성이 가득하다 하였기에 ...
설이 점점 더 가까워져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오면 엄마는 광속 찬장에 잘 정리 해 두었던 누르스름하고 푸른 녹빛을 내는
놋재기를 다 꺼집어내서 노랗게 윤기나서 반질거려 놋재기에 얼굴이 비치도록 닦으셨다.
타고남은 재와 볏짚을 뭉쳐서 공들여 놋재기를 닦으셨다 엄마의 고개는 땅을 향하고 투박하고 마디센 손의 날렵한 움직임이
온종일 이어졌고 놋재기의 푸른녹은
서서히 벗겨져서 황금색으로 빛이났다.
그렇게 황금빛으로 빛나던 놋재기가 신기하고 좋아서 나도 해 보겠다고 두 다리 벌리고 앉아 놋재기의 푸른녹에 눈을 맞추었다
푸른 녹 벗겨내는 엄마의 재묻은 손끝 솜씨는 마법의 손이었다.
아무리 닦아 보아도 씩씩거리는 소리와 입에서 침이 줄 흘러서 엄마가 닦아놓은 황금빛으로 빛나던
놋재기에 얼룩을 만드는 일이 고작 내가 한일이었지만
한나절을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용을 쓰며 놋재기를 닦아도 싫지 않았다
이윽고 설이 내일로 박두하면 장독대 옆
너른 뒷켠에 솥뚜껑 걸쳐놓고 치자물에 옷입혀서 굽는 가자미 지키고 서서 타지않게
뒤지기도하고 솥뚜껑에 불기운이 고루 퍼지게 잘 조절하는 일 또한 내 몫이었다.
하마같은 불기운이 급하게 쏟아져나와 내 볼따구를 마구 쏘아대고
겨드랑이와 벌려진 입속까지 불기운이 스며들고 불가까이로 바짝 숙인 앞머리를 불기운은 낼름 혀내어 이쁜
계집아이의 앞머리를 파르르 태워먹고 머리끝을 엉성하고 몽땅하게 매듭만들어주고 단백질 냄새를 금방 짙게 풍겼다.
그래도 좋았다
내 하얀 코구머신(흰고무신)에 그으름이 시커멓게 내려앉아도 좋았고
콧구멍과,손톱밑이 까매져도 좋았다.
그래야만 설이 오니까...
설날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설빔 옷 갈아입고 세배를 몇번이나 할지 세어보고 또 몇차례 수정하였다.
이번설에는 못오신다는 서울 삼촌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 세뱃돈을 쓱 내밀것만 같았고
멀리 사는 친척들이 뜬금없이 턱 나타나서 내 새배를 받고 기분좋게 새뱃돈을 풍성하게 쥐어줄것 같아서
동구밖을 시도때도없이 목을 빼고 내다보기도 하고...
오후 나절이면 외가에서도 외사촌들이랑 외삼촌들이 오시면 내 세뱃돈의 액수는 껑충 뛰었고
다음 날 할머니네 친정쪽 친척들이 또 세배를 오시면 그야말로 횡재하여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모은 세뱃돈은 바라만 봐도 흐뭇하여 그 기쁨을 동네방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자랑을 했다
하지만 세뱃돈도 얼마 못가서 눈독들이던 오빠들한테 고스란히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설이 좋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엄마도 명절증후군에 몹시 시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이 다가오기 보름전부터 '휴" 하는 긴 한숨소리가 엄마의 가슴바닥에서 솟아났지만
그 땐 정말 몰랐다.
"우리집에는 설에 호박시루떡도 하고 인절미, 호박부치미,식혜 수정과 그리고 참깨강정도 한다"
라고 설음식하는것조차 미리 주절거리고 다니며 친구들한테 자랑하던 철 없던 계집아이
엄마가 몹시 힘들어한것이 " 명절증후군"이란 놈인 줄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 시절엔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아예 생겨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설은 길어서 보름동안이나 이어졌고 가까운 일기친척들이 세배를 다녀가고 나면
이제 동네 어른들이나 이웃집까지도 설음식을 다라이에 담아 이고 가서 세배드리고
덕담을 가득 내려주고 오셨다.
그렇게 정월 대보름까지 설이 이어졌고 대보름조차 설의 연장선이었다.
그러고보니 울엄마 무지 고생하셨다 무슨일복은 그리도 타고났는지?...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다 해 낸 우리엄마 명절증후군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혹여 고것이 화병으로 가지는 않았을까?
어제는 다시 김치도 담궜다
올 들어 두번째 김장이다
시동생이 좋아하는 대구아가미젓갈과 갈치젓도 챙겨놓고
빠짐없이 차례상에 차릴음식준비며 세배올 친척들에게 대접 할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하려니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다
설날에는 차례를 지내고 남편과 산에 가기로 약속도 했는데 아마도 못갈것 같다
일가친척들이 모처럼 오시는데 산은 무슨 얼어죽을 ...
정말 부담스러워
맏며느리란...보이지 않는 굴레같은 것
사표놓을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다.
나도 마음 편하게 살짝 큰댁가서 얼굴 내밀고 반가워하고 또 아쉬워하며 돌아가는 그런 위치였으면 정말 좋겠다.
울 시어머니 내 마음 읽으셨을까?
"많지도 않은 형제 설에 만나 실컷 웃고 떠들고 해야지 언제 그러겠노 그 날 욕좀 봐라 우짜겠노 니가 맏며느리인데..."
명절만 되면 실컷 써 먹는 맏며느란 자리 슬그머니 떠 밀어 놓고 뒷짐 지고 있으면 안될까?
요번 설에는 아무일도 하지않고 딩굴딩굴 하면 안될까?
참 "역할 바꿔보기"라는 놀이도 있던데
나 딱 삼일만 막내며느리 하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