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Dr.John R. Sibley 박사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바구아지매 2011. 4. 1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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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어느 날,

옥포중학교 학생들을 인솔하여 거제도에 속한

  부속섬 칠천도를 도보견학할 계획이 잡혀있었다.

 나의 역할은 해설사로

사전답사를 위해 칠천도로 가는 길에  칠천연륙교를

건너려고 거제시  하청면 실전마을을 지나 다리 입구로 향해 걷고 있었는데,

다리가 시작되는 초입 길 왼편으로 남은  짜투리땅을 이용하여

 만든 자그마한 공원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

 궁금하여  그곳으로 가 보니

  제법 많은 공덕비와 시비들이 있어 재미삼아  

 세어보니  20여 기 정도,

그 중 유독 눈길이 가는 공덕비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흑단색  화강암에 ' 손요한원장 '이라 새겨진 공덕비를

  무심코  읽어 내려 가게 되었다.

 

손요한? Dr. John R. Sibley박사님이라?

 한참을 기억 속 단초<端初>를 끄집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래 맞아  바로 그분이야.'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찾아 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진료를 해 주셨던  온화한 성품의  외국인 의사가 바로  손요한원장님이었지.

요즘처럼  외국인이 흔하지 않던 그 시절  병원에서 본 외국인 의사가 진료를 해 주었던 기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최초로 만난 외국인이었던 의사선생님.

.

 

오래전 거제도 역시 낙도 오지로 의료 혜택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1926년 미국의 New Jersey주에서 출생한 그는 개신교의  의료선교사로

1960년 한국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고, 

  대구 동산기독병원을 거쳐 1969년 이곳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로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공덕비에서 읽은  미국인 의료선교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  집에 돌아와서  몇날 몇일을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려 잃어버린 나를 찾아 과거를  헤매이는것처럼 

그 분만을 생각했다.

 

 

네이버의  검색창에 희망을 걸고 그분의 일대기를 찾아 보려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주부의 역활을 망각하기도 하였지만

 

용케 찾아 낸 검색어 하나가 주는 작은 발견의 기쁨은 이미 설레임을 넘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기쁨과 흥분만큼이었던 것

찾아 낸 검색어를  따라 곧장  클릭 해 갔더니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예방의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은 유승흠교수님의 블로그가 나왔고

Dr. John R. Sibley박사님의 이야기가 잠깐 언급 되어 있었다.

 

유승흠교수님께서는 젊은 시절 거제도에서 1년간 예방의학의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거제도로 오게 된 계기가 바로 Dr. John R. Sibley박사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교수님의 블로그 내용 중 자신의 정년퇴직에 맞추어 펴낸 저서 '내 삶의 편린들'이란

A4용지 크기의 두꺼운  대학노트같은 분위기를 내는  책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였는데

 

책 제목으로 봐서는  도저히 의과대학의 교수님이 펴낸 것 같지않다는 생각에

잠깐 동안 웃음이 나기도 하였지만 이런 생각이 오류를

범하는것이란 판단과 함께  어쩌면 이 한권의 내용에 그분과 함께 한 이야기가 가득하리라

생각하고  유승흠교수님의 책을 교보문고에 당장 주문하였다.

그리고 책이 배송되어 오기를  기다리며 흥분했던 시간들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것이다.

 

 

당시에 이 마을에는  전기조차 들어 오지 않아 (내 고향 거제시 하청면,

연초면은 1973년에 여름에 전기가 들어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가발전을 일으켜서 치료를 하였다고 

 유승흠 교수의 저서  <내 삶의 편린들>에 기록 되어 있었다 . 

거제도민중  특히 거제도의 북쪽에 위치한 연초, 하청,장목면민들을

 위해 8년간 헌신적인 인술을 배푸셨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거제건강원이란 정식병원이름 보다

실전병원으로 알려져 친숙하게 불리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병원이 소재했던  동네 덕택에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그렇게 알려진듯

거제건강원?  무슨 병원 이름이 지금으로 보면 꼭 개소주를 만들어 파는 건강원쯤으로 보인다.

 

전혀 불려지지않은  이름 거제건강원,

 나 뿐만 아니라 거제사람들은  모두 실전병원으로 불렀다고 기억한다.

 

   Dr. John R.Sibley 박사님을 추억 해 보면

 내가 고1때 1975년 코스모스 만발한  어느 가을날쯤으로 기억한다.

여러날째 머리가 아프고 눈마저 피로하여  고통을 호소하자.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실전병원에 가셨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외국인 의사선생님께서 먼저  환하게 웃으시며

잔뜩 겁 먹은 나를 향해  안심시키려는듯

 "귀여운 소녀 안녕  "

 

하고먼저 인사를 건네고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친절하게 웃으며 유창한  우리말로 물으시고 이마를

만져보더니  공부한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라며

 이 약을 먹고 며칠동안 푹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는데

키가 훤칠하게 크신 그 분의 하얀 미소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의료선교사 일을 열심히 하다 돌아가신

고 이태석신부님의 일대기를 그린  '울지마 톤즈'가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는데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아름다운 행적에 감동하여 울었다.

의료활동은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도 <톤즈 브라스밴드>를 결성하여 아름다운 음악으로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미국 의료선교사의 눈에 비친 거제도  역시

수단의 톤즈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것이다.

지금 생각 해 보니  이곳 실전병원(거제건강원)에서

 낙도 오지 섬주민들에게 건강을 지켜주는 인술은 물론이거니와 

 부인 손진희 (Jean Butler Sibley)여사의 활약상 또한 대단하였다고 생각한다.

  가정방문을 통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직접 공부를 가르치기도 하셨다니

당시의 Dr. John R. Sibley  박사님이야말로 살아 있는 성자였고 부인 역시

심훈의 상록수의 채영신이 아니었나 싶다.

 

어렵게 구한 몇장의 사진을 보며 유승흠 교수님의  눈으로 본 그분의  이야기도  언급 해 보며

오래 전 이 땅에 와서  가난했던 섬 사람들에게  아픔의 고통을 덜어 준

미국인 Dr. John R. Sibley 박사님의 이야기를 따라 가 본다.

 

 

 

 

 

거제도민의 건강을 책임져 준 Dr. John R. Sibley박사님과 그의 가족들과 초창기 의사

이 사진의 뒷배경은  칠천도며 당시에는 이 섬으로 나룻배가 다니고 있었다.

 

 

 

 

 

거제도를 끔찍하게 사랑하셨던 Dr.John R. Sibiey,  미국에서 오신 부모님과

그리고 병원사람들과 마을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였다. 

 

 

 

 

*거제시 장목면 구영에서 여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건강교육을 하는 실전병원 간호사

 

지금으로부터 약40년전 거제도의 풍경이다.

간호사는 가족계획의 일환으로  피임법에 대해서도 알기쉽게  설명 해 주었을것이다.

 

낮에는 바다로 나가  조개파고 고둥줍고 해지면 호롱불 밑에서

골무끼고  떨어진 옷가지 꼬매었을 순박하기만 하였던  거제도여인들.

 

 

 

 

이 사진은 아마도 John Sibley박사님께서 

실전마을 주민을 사진 찍어 주었을것으로 추측된다.

병원 근처의 어느 여염집 여인의 모습이겠다.

당시엔 신문으로 도배된 벽에서 우리는 재미난 시사만평을

읽기도 했는데 김성환의 '고바우영감'

길창덕의 '순악질여사'는 잊지 못할  카툰이었다.

 

 

가난했던 거제도민들을 위해 인술을 배풀었던  아름다운 사람들.

 

 

 

 

 

1969년, 흙집 지어 거제건강원(실전병원)의 문을 열었고 

 전기도 없어 자가발전을 일으키는 등

   낙도 오지 거제도민들에게 8년동안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주시고

고국으로 돌아가신 Dr.John R. Sibley .

 

 

 

 

Dr. John R. Sibley가  떠나는 날의 환송식,

 바다가 내려 다 보이는 실전리 마을 환송식이 있었던 그곳은 이후  병원도 의료인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도로가 뚫리고 그 터에 있던 병원은 거제의 중심 고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비가 세워졌다.

 

 

 

 공덕비에 새긴 영어 이름이 틀리다.  

 

Dr. John R.Sibley

 

틀리면 어떠랴. 우리는 그를 잊지 않고 있는데...

 

 

 

 

실전병원이 있던 자리에서

 

 

연초면민의 한사람으로써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다.

요즘은 미국의 뉴저지주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눈이 커진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과 교수로 정년퇴직시

 이 한 권의 책을 내놓은 유승흠교수님의  저서에는

 예방의학 수련의사(레지던트) 로서  선교사 Dr. John R. Sibley 의 권유로

 시작한 지역사회 보건사업,

자원하여 전기도 없던 거제도에서

 1년간 봉사활동을 펼쳤던 내용이 역시 추억의 편린이 되어 책속에서 미소짓고 있다.

 

 

 

 

 

 

 

유승흠교수는 우리나라의 잘 나가는 기업 '유한양행' 가의

자제분으로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신 분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한민국의 의료계를 이끌어 오신 거목이시다.

오래 전  연세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수련의 시절에 거제도에서 1년간  시블리 박사님을 도와

거제시 연초면 보건지소장(무보수)을 지내신 분이기도 하다.

 

결혼 초기 아내와 거제도로 내려와 경험한  당시의 가난했던

거제도이야기가 고스란히  책속에 드러나 있기도 하다.

시블리 박사님의 부인 손진희(Jean  Butler Sibley)여사가 손수 

 만들어준 작은 케이스(귀한 물건을 담아 두는 통)

하나는 얼핏보면 아주 사소한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소중하게 여기고  사진으로 찍어 저서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유한양행가의 자제분답게 경제의 흐름도 잘 읽어  주식을 사서 묵혀

두었더니  무려 500배나  껑충하였다는 이야기며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따스한 '인정' 이

이제 '기부' 라는 이름으로 꽃 피워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분 역시 존 시블리 박사님이 베푼 인술에 버금갈만 하다.

 

 

 

 

 

 

거제건강원(실전병원)이 현재 거제백병원으로 거듭났다.

거제에서 가장 큰 병원이며 전통을 자랑하는 병원으로 자리매김 한 병원이다.

 

 

 

 

거제백병원의 전신 거제건강원 탄생의 역사적 의미를 영구히 보전하고자 새겨진 동판

 

 

 

 

거제도를 사랑한 의료선교사 Dr. John R. Sibley의 최근의 근황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의 외손자 패리 오브라이언이 

 몇년에 한번씩 거제도를 찾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받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거제도민 특히 연초,하청,장목면민들은

미국의 의료선교사에게 진 크나큰  빚을 어찌 갚을까?

 우리는 단지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하는 것일까?

 

일부 사진출처 <<거제백병원 역사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