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11월의 길 , 다솔사의 낙엽길을 걸으며...

이바구아지매 2011. 11. 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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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익은  가을이  마지막  햇살을 오목거울속으로 불러 모아,  언덕을

넘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겨울에게 넘겨  주려는  시간,

몸도,마음도  계절에  쫓기어 허둥대지만

 그런 와중에도 가을이 주는 마지막  감성을 욕심부려 

  넉넉하게 챙기려고   11월의 길 찾아  나섰다.

 

2011년11월9일 , 오늘은 정갈한 낙엽길이 인상적인 다솔사 [多率寺]를 만나 산사가  간직한  보물을 찾아본다.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번지  봉명산(와룡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다솔사는

고품격의  사찰로 이미 정평이 나 있기도 하지만

만해 한용운 선사가 일제강점기에 올곧게 수도한 곳으로 , 혹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이곳의   안심료에서 

 문학사에  빛나는 명작  '등신불'을 창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다솔사의  낙엽길에서    문학의 향기를 솔솔 맡으며  산사의  

 골짜기로  무작정  쏘다니며 하루쯤의  시간을 허비해도 무조건  좋으리라... 

 

.

 

 

 

 


 

 

 

 

드러누워서 딩굴어도 좋을만큼. 낙엽이...

 

 

11월의 길....다솔사의  낙엽길...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 을 생각하며 ...

 

 

 학창시절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중  '님'은  '조국' 혹은 부처라고 배웠지만 

정작 억지로 끼어  맞추기한 느낌이 들었던 '님의 침묵'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연정을 품은  연애시를 솔직하게 노래하였지만 

 시인의 속내조차 드러내지 못하도록  사람들은

 ' 조국'으로 포장해 버리고 말았다.

'님의 침묵'에서 가리키는  님은,  조국이란 큰 그릇에 담길 버거움이 아닌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였지만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반하는  고려속요처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쯤으로 폄하된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오늘  다시' 님의 침묵'을 되새김질 해 봐도  여전히

산사에서   만난 인연의 여인을   향하여  연정을 품게 된 한 남자의 연애시로  이해하는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가, 혹은  구도자가 아닌 한 남자가  이성간의 솔직한 사랑을 고백한

 시로 감상하는 것이''님의 침묵'에  대한 진정한  예의인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곁들여  본다.

 

시인 고은선생은  ' 한용운 평전'에서 '님의 침묵'은   '오롯한  연애시라고 적고 있었는데 

이런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가을을 털어버린 나무들과 낙엽길은  

  사랑하는 '님'이  막 숲을 떨치고  지나간 느낌으로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한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다솔사 [ 多率寺 ]

시간은 흘러 조만간 돌계단에 끼인 낙엽들이 가을을 데리고 가버리겠지

 

 

 

 

 

대양루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수험생들과 학부모의 발길도 이어지는 곳

 

 

 

 

 

 

 

 

 

 

 김동리선생이 머물며 창작활동에 전념한 '안심료'

이곳에서 문학사에 빛나는  명작 '등신불'이 태어났다.

 

 

 

 

안심료에서 ...

누군가는  또 다시 이곳에서 고뇌하여  탈고한 작품이 불교문학으로  꽃피울지도 모를  일이다.

 

 

다솔사 [ 多率寺 ]

역사적 변천

 

511년(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내용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대웅전·나한전(羅漢殿)·천왕전(天王殿)·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을 건립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磨崖佛)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 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道明)·낙화(樂華)·성진(聖眞)·풍운(風雲)·세진(洗塵)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이 절은 일제 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한용운과 김동리를 나란히 모신 다솔사 안심료

 

 

 

 

 

한용운선사와 김동리선생을 소개 해 놓은 일대기

 

 

 

 

 

님의 침목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되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 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등신불’과 경남 사천 다솔사의 인연

. 단편소설 ‘등신불’에서 저자 김동리는 일인칭 화자 기법으로

일제강점기에 학병이된 ‘내가’ 주둔지 부대를 탈출해 등신금불이 있는 중국 양자강 부근의  정원사로 어떻게 갔느냐로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경험을 작품화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는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스님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쓴 작품이다.

 일제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스님들이 결성한 만당의 본거지,

 다솔사 대웅전 앞뜰이 내려뵈는 객사에 앉아 동리는 만적의

 소신공양을 떠올리며 등신불을 썼다고 회고한다. 이 소설로 인해 다솔사는 차의 도량에다 불교문학의

고향이라는 명성이 더해졌고 동리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쓸수 있었다. <옮김>

 

 

 

안심료 옆의 장독대

 

 

 

먹거리를 다듬는 산사의 여인들

 

 

 

 

명작의 고향

 

 

 

 

 

 

 

 

 

적멸보궁

 

 

 

기왓장에 새겨진 기도의 효험도  대단할까?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

 

 

 

 

바람에 구르는 낙엽소리와 발밑에서  바삭거리며

 부서지거나 혹은 압축되며 더 단단해지는    낙엽의 소리를 들으며...

 

 

 

 

 

불가에서는 윤회설을 강조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 개의 전생은   수도하던  스님이었을지도?

 

 

 

 

시몬, 나무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김동리의 '등신불'

 

 

 

줄거리
나는 스물 세 살 때인 1943년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으로 끌려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탈출을 결심하고, 대정대학에 유학한 바 있는 불교학자인 진기수 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생면 부지 적국의 옷을 입은 한국인인 '나'를 믿지 않자, 나는 오른손 식지를 깨물어 '원면살생(願免殺生) 귀의불은(歸依佛恩)'이라는 혈서를 써 올려, 결국 그의 도움으로 정원사에 도착하여 원혜대사를 배알한다. 이곳에서 나는 수업을 하는 도중, 금불각을 발견하고 불상 역시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등신불을 대했을 때 나는 전율과 충격을 받는다. 등신불은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결가부좌상이었다. 젊은 승려인 청운의 이야기와 만적선사 소신성불기를 읽고 나는 만적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만적은 법명이고 속세에서의 이름은 조기이다. 그는 금릉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머니 장씨는 사구에게 개가하여 그의 외아들 사신과 같이 산다. 기와 신은 같은 또래인데, 어머니가 신에게 돌아갈 재산을 탐내어 신의 밥에 독약을 감춘다. 우연히 그것을 엿본 기는 그 밥을 자기가 먹으려 한다. 어머니가 이를 보고 기겁을 한다.
며칠 뒤에 신이 집을 떠나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기도 어머니의 사악함에 환멸을 느껴 가출하여 중이 된다. 만적은 법림원의 취뢰스님의 상좌로 불법을 배우다가 열여덟에 취뢰스님이 열반하자 은공을 갚기 위해 불전에 소신공양할 결의를 보인다. 그러나 운봉선사가 만류한다. 운봉선사의 알선으로 혜각선사를 만난 만적은 스물 세 살 되던 해 겨울 금릉에 나갔다가 10년 만에 문둥병에 걸린 사신을 만난다.
만적은 '신'의 목에 염주를 걸어 주고 절로 돌아와 소신 공양을 결심하고는 화식을 끊고 이듬해 봄까지 먹은 것은 하루에 깨 한 접시씩뿐이다. 이듬해 봄 법사스님과 공양주 스님만을 모시고 취단식을 하고 한달 뒤 대공양을 한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육신이 연기로 화해 갈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으나, 단 위에는 내리지 않았으며, 또한 그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원광이 씌워져 있었다. 이러한 신비가 일어나, 모인 사람들은 불은을 입어 모두 제 몸의 병을 고친다. 병을 고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사재를 던져 새전이 쌓이게 된다. 모인 새전으로 만적이 탄 몸에 금을 입히고 금불각에 모신다.
나는 금불각의 등신불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며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아로새긴 부처님(등신불)이 하나쯤 있어도 무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마친 원혜대사는 '나'에게 남경에서 진기수 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 입으로 살을 물었던 오른손 식지를 들어 보라고 한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대사는 아무런 말이 없다. 북소리와 목어 소리만 들려 온다.

 

 

<출처 책향기 자욱>

 

 

 

 

이쯤에서 김동리  등신불<等身佛)>'의 무대가 된   중국 양자강 북쪽 정원사<淨願寺> 의

  금불 각(金佛閣)속에 안치되어 있다는' 소신공양한 만적(조기) 의

일그러진 모습을  등신불상으로  직접 만나볼 언젠가를 위해  기약 [旣約] 없는 시간을 비워 놓으며  

또한  불교문학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 해 본 좋은 시간

11월 어느  날, 

 우리는 다솔사의 낙엽길을  걷고 있었다.

 

 

 

 

다솔사多率寺]: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