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목에 누워서 천정을 쳐다 보고 있으니 스믈스믈 기어나오느 게 있다.
어릴 때 뛰어 놀던 우리동네 작은 들녁이다.
참 작은 마을, 아주시골도 아닌 것이 도회지도 아닌 것이 어정쩡한 우리동네.
연초면 삼거리에서 바로 옆동네...(대바늘)
나는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오래 된 기억 중에서 어린시절에서 결혼하여 마을을 떠나 온 뒤까지도 소식을 접한
추억과 슬픈이야기로 마무리 된 오롯한 삶 비극으로 끝난 친구네 살아온 모습이
자꾸만 스크랩이 되니 안 되겠다.
그냥 적어보아야겠다.
이야기를 적으려니 친구의 슬픈 모습이 내 앞에 선다.
먼저 친구한테 양해를 구하련다.
"친구야, 미안해..."
난 아주 어렸을 땐 기차가 다니던 철길 옆에 살았었다.
부산 범내골...
기차소리를 많이 듣고 커서 인지 기차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고향에 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고향 거제도로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네로 돌아왔다.
작은 마을 대바늘로 돌아왔을 때 나이는 일곱살쯤이었던가?
동네아이들이 다 낯설었다.
이웃아이조차도 낯설었던 때 내 눈에 먼저 들어 오는 강렬한 사람이 있었다.
날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몸매가 가냘프고 목소리가 꾀꼬리같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말했다.
"저 미치개이 또 날뛰네 온 동네 보리밭은 다 쓰대고 어데서 저런 심이 나꼬"
그런 날 밤이면 어느 집에서나 다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들판을 쏘다니다가
밤이면 칼을 들고 어느집엔가 달려 가서 사람을 다치게도 했다.
그 여자는 우리동네 친구 완이네 엄마였다.
우리동네에 언제인가부터 들어 와서 살았다는데 마을에 처음 올 때부터 미쳐있어
친척이 있는지, 혹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완이네아버지는 우체국장이었고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완이는 나랑 동갑이었다.
위로는 부산대학에 다니던 두 형도 있었다.
완이네엄마도 정신이 이상해지기전에는 부산경남여고를 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완이엄마한테 직접 들었다.
완이엄마는 늘 노래를 불렀다.
"목련 꽃 그늘아래서~~~"
4월과5월이면 꼭 이 노래를 불러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로렐라이 언덕'을 부르기도 했는데 길가던 사람들은
'가수같아요. 어찌저리 노랠 잘 불러요."
하고 입을 벌리면 다물지를 못했다.
완이엄마는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지금으로보면 성악가 조수미... 같았다.
완이네의 생활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엄마의 자리가 없는 그 집...
그러나 완이 엄마는 정신이 좀 돌아오기라도 하면 동네조무래기들을 모아 놓고 노래며, 춤도 가르쳐 주
고 심지어 아무에게도 교육 받지 못한 성교육을 완이엄마로부터 참 자연스레 배웠다.
사춘기, 생리, 임신 이런 것을 학교에서나 집에서도 배우지 않고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었다.
사춘기가 되면 자연스레 이성이 그리워진다는 것 ... 자위며 성체위등도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동네를 지나가는 다공마을 애들은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완이네집옆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춥거나 덥지 않은 방가후에는 늘 그 자리에서 그런 성교육을 받았다.
매일 그런 이야기에 진절머리가 난 우리마을 아이들은 그 자리에 안가도 다공아이들은
재미있다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방가후 시간을 온통 그기서 다 보냈다.
완이네집엔 슬프게도 두살 많은 누나가 있었는데 역시 바보였고
두살아래인 남동생도 바보였다.
막내 여동생은 정상같아 보였다.
이런 복잡하고 어지러운 완이네집.
완이는 친구하나 없었다.
누가 미친여자아들하고 친구를 하겠나???
국민학교 저학년 때 완이는 서울 친척집에 양자로 갔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른 친구가 떠났다면 아쉽고 그리웠을텐데...
완이가 떠난후도 완이엄마는 노래부르고 춤추는일만 늘상 했다.
밥을 먹는 일도 본 적이 없고 잠을 자는 것도 본 일이 없었다.
우리동네 들판은 완이엄마의 공연장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어느 날 한통의 전화에 난리를 겪었다.
"아니, 여자애가 처신을 어떻게 미치갱이 자식이 전화를 다 걸어??? 전화 줄 씻어 놔"
우리아버지는 참 완고하셨다.
우리집은 양반집이고 아무하고나 어울리면 안된다고 늘 말씀하신 양반이다.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양반쌍놈타령을 하실까?
내가 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한동네아이인데도 말한마디 해 본적이 없는데...
꼭 완이는 근처에도 가면 안 되는 그런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런 어느 날 완이가 우리집 대문가에 와 있었다.
다행히 우리아버지가 안 계실때였다.
"우리집엔 왜 왔어.?"
"나, 너하고 친구하고 싶어. 안 될까?"
"무슨소릴 해 너하고 나하고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 너 우리아버지한테 걸리면 죽는다.
빨리 가. 다신 우리집에 오지 마."
하고 홱 하니 들어와 버렸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완이가 양자로 간 친척집에서 십수년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그러자 데려 갈 때와 아들이 생긴 후의 마음이 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완이를 다시 집으로 보내버린 것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전학을 왔지만 친구들은 금새 알아버렸다.
중학교때 우리반이었던 여자애랑 양대산맥을 이루는 일명
'스티브와소머즈'로 놀림을 당한 친구들...
지금에사 생각 해 보니 완이네의 불행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제 내가 철이 드는 것이다.
얼마나 냉정하게 돌려 보냈던가.
완이엄마는 훗 날 삼을 팔러 다니는 맘씨 고약한 아주머니가 작심하고 완이아버지한테 달라 붙어
우리동네 누구도 말없이 동네주민으로 받아주고 피해를 입혀도 말없이 불쌍하다고 봐 주었는데
삼장사여자는 완이네 재산을 다 팔아치우고 완이엄마는 가두어서 굶겨 죽였다.
굴째봉에 완이엄마는 묻혔고 그 후론 재산도 좀 있었고 우체국장을 한 아버지의 여력도 그 여자손에서
무참히 난도질을 당햇다.
두살위인 누나도 어디엔가 버리고
둘째 형도 군대에 가서 자살을 했다.
자살하기 전 우리오빠한테 편지를 해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하며 사는 게 힘들다라고...
편지를 받은 일주일 후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울오빠랑 함께 부산대학을 다녔는데 오빠가 많이 슬퍼했다.
삼장수여자는 막내 수야를스무살도 더 많은 대우조선협력업체에 다니는 중늙은이한테
갔다 받쳤다.
아무 것도 모르는 눈이 똘망거렸던 수야는 열여덟 나이에 아기엄마가 되었다.
남편이 심술궂고 용심스러워 자상하게 대해 주지 못하고 때리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나 보다 훨씬 먼저 시집을 가서 우리집 셋방살이가 된 수야가 얼마나 가여웠는지...
세상에 이렇게 한 집이 쑥밭이 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체국장이셨던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살아 계실까?
정상이던 큰 형은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실까?
나랑 동갑인 완이는???
그 때 너무 냉정하게 친구를 거절한 나...
완아, 그 때는 정말 미안했어. 사과할게...
어디선가 살고 있겠지. 잘 살아. 굿굿하게...
지금은 완이네가 살던 그 집 터엔 그림같은 집이 있다.( 우리동네 언니가 사서 그림처럼 다시 지었다.)
4월5월이면 목련꽃 노래를 날마다 불렀던 완이네가 친정집에 갈 때면
담장밖으로 목을 빼어 부르던 그 고운 노래가 그립다.... 소녀같았던 완이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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