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뱃길...

문 씨 상 회

이바구아지매 2007. 6. 5. 15:23

내가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도 가끔씩  연초에 갈 일이 생기면 으례히 그 길을 지나갔다

 

국민학교 6년을 다니면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부는 날에도 우리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

 

그 집 앞을 지나갔다

 

'문씨상회' 문씨상회 아저씨의 존함은 문 우 수

 

아저씨네 가게는 잡화점을 했고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회였다

 

학교 가는 길에 무엇을 살 일이나 그냥 친구를 따라서 물건을 살 일이 없어도

 

그냥 꼭 들러야 할 것 같은 그런가게였다

 

그런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은 다 그랬을것이다

 

'문씨상회' 는 6.25사변 후 피난와서  내가 다니던 학교 가는 길의 가장 목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저씨네는 6.25때 가족들과 거제도로 피난왔고 전쟁의 애환과 보릿고개의 배고픔과 이런저런 내 고향의

 

삶 속에  깊게 뿌리내려 사신 분이었다

 

아저씨는  늘 밝은 모습으로 허허허 하고 웃으셔서 지금 생각해보면 꼭 하회탈을 닮으셨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에 노트를 바꾸기 위해  갓 낳은 따끈한 계란과 어제, 그제 낳은 계란까지 합쳐서

 

들고 아저씨네 가게로 가서 노트도 바꾸고  나면 우리는 아저씨네 유리통에 가득한 공갈사탕이

 

  눈에 밟혀서 그냥 가게를 못 나서고 쭈삣쭈삣 거리면 아저씨는 금방 내 마음을 알아채고

 

커다란 공갈사탕을 하나 쓱 집어주셨다

 

그 공갈사탕을 받고서야  당당하게 가게를 나섰고 그런 날엔 내가 공부를 일등이라도 한 것 마냥

 

기뻣다

 

그 날 하루종일 공갈사탕은 주머니속에서 바스락거리며 내 손길에서 오돌토돌한 느낌으로

 

온 종일 설레며 조물조물 만지기만 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서 다듬이질하던 방망이로 탁 쪼개서 바스락 하고  부스러진 공갈사탕의

 

파편들을 언니, 나 동생 셋이서 갈라 먹기도 하고

 

그 순간의  달콤함은 참으로 강렬하여 지금도 입안에서 단맛이 도는 느낌이다

 

문씨상회에는   없는 것이 없는 가게로 석유까지 팔았는데 우리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다시

 

 긴 정종병(댓병) 을 가지고 다시 석유를 사러도 갔다

 

아저씨는 병에 나발을 꽂고 기름을 부어 주는데 바닥에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잘 부어 주었고

 

병 모가지에 끈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도 확인 해 주시고 들고 가는 요령도 정확하게 알려 주셨다

 

잘못하면 석유병이 미끄러져 깨지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다니던 길은 자갈길이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

 

면 넘어져서 병을 깨버리는 사고가 더러 일어나기도 했으니까

 

 우리학교 주변에는 피난민촌이 와그러러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내가 와그르르란 말을 쓰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 집들은 한결같이 힘 센 장사가 발에 힘주고 차버리기라도 하면 와그르르 무너져버릴 것

 

만 같은 허술한 하꼬방집이었다

 

학교 가는  길 양쪽 에는 하꼬방으로 된 두평, 세평 이런 집들이 즐비하였고 내 친구도 서넛

 

 그 하꼬방집 아이들이 우리반에 다녔다

 

2학년때 내 짝 재환이도 그 하꼬방집아이로 할머니가 풀빵을 구워 팔아서 막내아들과 내 짝 그러니까 재

 

환이는 손자로,  아버지랑 어머니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으면 데려 가기로 하고...

 

그 집 할매풀빵도 참 맛있었다

 

통통한 볼살이 발그레하게 물들던 모습 풀빵 굽는 연탄불에 복다그리한 할매모습.

 

 

대부분 피난민들이 사는 하꼬방집들은 가게를 했는데 사는 게 윤택하지는 못했다

 

신기하게도 문씨상회만은  날로 번창하고 장사가 잘 되는 게  우리들의 눈에도 확 보였다

 

우리 논 바로 옆에 논도 사서 농사도 짓고  논에 와서 모내기를 할 때면 맛난 음료수랑

 

 빵도 가져와서  우리가족에게도 나눠 주기도 햇는데 문씨상회아저씨는

 

"총무계장, 나야, 우수야, 우리 술 한잔 하우다 내레 쇠주 한 잔 갖고 왔지비 어서 오우다

 

고거 참 오날 몬하모 낼 하모 댐뫼 싸게 와 갑장  "

 

이러면 우리 아버진 좋아서 술 한잔 얻어 걸치고 대낮부터 술기운이 핑 돌아서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하고 노래 한 곡을 시키지도 않는데 부르시는 자동테입이셨다

 

"총무계장 노래 참 잘 하우다 어데서 그리 노랠 배웠소? 일본에서 배웠소?"

 

"하하하 일본에서 밤무대 좀 뛰었소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하지요?"

 

"여자들이 줄줄하지 에이요? 총무계장 인물도 좋찬소 고고 여자 한 명 델고 오지 그랫소?"

 

이렇게 방천에 앉아서 하회탈같은 웃음웃던 문씨상회 아저씨는  다른집들과는 여러가지로 많이 달랐다

 

부산에 금방도 내고 자식들 살림도 내 주고 알토란같이 잘 사셨다

 

"너그들 에지가히 디비라이 그라다가 학교 지각한다이 싸게싸게 가라우 그럼그럼"

 

우리가 학교로 가기 전에 우루루 몰려 드나든 곳 우리학교  전교생 800~900명이 아침부터 분빈 가게

 

그 가겐 늘 만원이었고  아저씨네 식구들은 아침 등교시간에 다 나와서 장사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나 보다 2~3살 많은 선배도 있었는데... 

 

 

얼마전에 연초면사무소에 볼 일이 있어 내려 갔더니

 

늘 문씨상회 앞에 달려 있던 전화번호6번  문씨상회란 간판이 사라지고 없었다

 

수십년을 지키고 섰던 그 간판 에 엉성하게 손으로 붓글씨 쓴  모습으로 달고 있었는데

 

이젠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아주머니만 고운 모습으로 장사도 그만 두시고 근처 아파트에 사신다

 

'내레 휴전선만 거치면 한걸음에 내 고향 갈낀데 언제 통일이 될낀고? ..."

 

'갑장 , 통일 될때까지 사시오"

 

아버지가 그러시면  아저씨는

 

"내 고향 앞 능수버들 참 고앗지비  대동강에 봄이 오믄 우린 대동강물에 나가 낫도 씻고

 

버들강새이도 꺾어 묵고  이쁜 처이 있나 히끈히끈 거릿지비"

 

"아이들  엄마도 인물 좋은데?"

 

"파이라파이라 우리 이북에서는 저 인물 인물축에도 아이 들지비"

 

 

이르시기도 하셨고 우리반  홍 금순이엄마는  짜증 난 일이 있으면 이렇게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삼팔선 문 열어 다오 나 이북 갈래요"

 

이렇게 피난민들은 우리동네 살면서도 스스로 잘 적응 못하는 이방인이었는데 문씨상회아저씨는

 

항상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아서 그런지 장사 잘 하고 늘 만족해 하는 우리들의 하회탈이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 근처의 아주 오래 된 가게 그 가게가 살며시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오늘도  아쉬운 그 옛길을 걸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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