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들 할머니가 오신다고 전화가 왔다
짐이 많으니 마중나오라고?
출근하는 남편을 오랫만에 배웅하고, 버스정류장에서 한 참을 기다렸다 짐이 많다해서 카트기를 끌고 간 덕택에
차에서 짐을 내려 바로 싣고 집에 수월하게 왔다
친척집에서 재배한 수박 2덩이와 강원도산 감자라며 한 포대나 가져오신게다
"소담아,귀염아,범일아 다 나와서 할머니께 인사드려라
어서 가나도..."
아이들이 잠자다가 엉겹결에 나와서 인사를 드리는 게
공손하지를 못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왜 아들이 정신없는 꼴을 하고 있노?
바라바라 이 할매가 너그 챙기먹일거라고 새복에 헌주네집에 가서 이리 챙기 왔는데 부지런해야지
성공을 할라모 넘 잘때 공부하고 넘 잘때 일해야하는기라
넘들하고 똑 같이 자고 놀고 하모 절대로 성공몬하는기라
그라고 가나아토피에 좋다는 약하고 소담이 무릎 관절에 좋다쿠는 약도 사 왔다"
"어디서 샀습니까?"
'약재이한테서 샀다 큰 맘 묵고 안 샀나 손지들 줄라꼬?"
"어무이예 인자 그런데서 사지마이소 제가 병원에 가서
처방전 받아서 사면 되는데 이 알 수 없는 약을 자꾸 사면
돈만 날리고 약이 될지는 모름니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사면 어무이 없는 돈만 축내고 겁나서 사용을 못합니다"
아침에 열심히 싸 왔는데 이런 이야길 듣는 우리어무이
기분이 별 안 좋으신 모양이다
"아이고 나는8번이라서 나만 죽어라고 해다 바치고 좋은 소리도 몬듣는 8번이구나 "
"어무이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그라는데 내가 우리집에서 8번이라고 항께
8번이모 아무짝에도 몬 쓰는 번호라쿠더라
쓸모가 있는 번호가 될라모 적어도 1,2,3번까지고
그 뒷번호는 아무짝에도 몬쓰는 번호라꼬 그라데?"
"어무이예 가나가 어무이를 8번이라하는 것은 우리가족이
모두 8명이란 뜻인기라예 달리 다른 뜻이 있는기 아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인터넷에 돌아댕기는 그 말 같은데
"4번아, 잘 있거라 6번이 간다"
라는 메모지를 남기고 사라진 시골영감님이 서울 아들네집에서 당한 설움 그 이야긴거 맞지예
그 집 며느리가 1번 큰 딸
2번 작은 딸 3번 강아지4번 남편
5번고양이 6번 시아버지 이렇게 번호를 매겨놓고
부르는 걸 시아버지가 알고 홀대하는 며느리집을 떠나면서
식탁위에 얹어 놓은 메모지이야기가 인터넷에서 돌아댕기는데 어무이는 어디서 그런 이야길 들었어요?"
"할마시들이 모이가 하는 이바구가 말짱 그런 것 아이가
누집 딸이 반지해주고 보약해주고 요샌 딸가진집은 비행기타고 나는 딸도 엄꼬 번호도 8번이고 이래가 우짜것노?"
"가나야, 할머니 8번을 1번으로 바꿔드려라 응 할머니
잘못하면 울겠다 1번으로 바꾸자"
"안 돼 1번은 범일이오빠야 바꾸면 안 돼 할머니는 8번이야"
'바라바라 죽어도8번이라쿠네 말짱 허다 나는 똑 손지들이 좋아가 내 안 묵고 갔다 주고 돈생기모 용돈하라꼬 줬더마는 이레 서럽거로 8번만 주고 사람들이 그란다
8번이모 져다 내삔다고 그란다"
'애가 무얼 알고 그러는 게 아니고 제 멋대로 즉흥적으로 하는거라예 제가 조금 알아들으면 번호를 1번으로 바꿔 드릴게요"
"나가 아무리 할매들한테 8번은 아무 뜻이 엄꼬 아가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야길해도 그 놈의 할매들이 말속에 뼈가 있는 거 모리나 이라네 나가 우리가나가 미워서 그런기 아이고 갑자기 8번이란 번호가 생각난께 그렇제
말이 난김에 물어보자 우리아들이 직장에나 댕기모
할매한테 와서 용돈이나 한 잎 챙기주고 우리할매가 나한테 참 잘했는데 이런거로 알까? 너그 이모집(시이모) 손주들이 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해도 할매가 키우고 공부할때 밥 해 주고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데 교수라캐도 용돈 한 잎 안 주서 할매가 섭섭다고 그라더라"
"멀리 있으니 그렇겠지요 다 착하던데 이모님이 아프니까 그런 생각이 드나봅니다 이모님도 얼마나 잘하시는 분이세요? 우리아이들은 할머니 생각 많이 합니다
키워주시고 정성 쏟으신 것
제가 아이들한테 늘 이야기 합니다
항상 할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마이소 잘 할겁니다"
참 미안한 아침이 되고 말았다
아주 사소한 일, 웃고 넘길일을 썩 유쾌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요즘 우리어무이 주변에 예전같은 분위기가 아닌 모양이다 사람들은 날로 삭막해져가고 부모자식간에도 예전 같지를 않고 그러다보니 우리집에 맞지도 않는 말이 곡해 되기도하고 또 염려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좋은 아침에 별난 번호타령에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
아침상에 어무이가 좋아하시는 메가리를 호박에 지져서
상을 보며 다시 유쾌해지기 위해서 웃을 수 있는 거리를 찾아 보았다
"어무이예 서울에 가면 복지아파트라고 있다네예
그런데 그 아파트가 낡아서 복자의 받침'ㄱ' 달아났대요
그럼 무슨 아파트가 될까여?"
"그래 그기 무신 아파트가 되노 재끼장 가오바라
한 본 써 보자"
"할머니 귀 대 봐요"
범일이가 할머니 귀에 대고 소곤소곤했다
"보지아파트? 아이구 대잖타 그런 이름도 다 있나
참 대숭시럽다 어서 밥이나 무 보자 참 내 어엽네
그라모 자지아파트는 없나?"
"어무이는 참 한 술 더 뜨네요 고만 아이들앞이니 ㅋㅋ"
아침밥을 드신 어무이가
"8번간다 열심히 공부하거라 "
어무이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자꾸만 8번의 여운이 남는다 혹시 기분이 많이 나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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