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회색이다.
겨울은 나즈막하니 하늘이 내려 앉는 그런 계절이다.
어제도 나는 중학교 카페에서 일본에 사는 친구랑 한 동안 쪽지와
메신저를 주고 받았다.
잘 살고 있느냐, 남편은 승진을 했느냐, 아들은 군대에 갔느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을 간직한 도시 '하코다테'의 밤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냐
일본의 봄은 사쿠라로 시작한다던데 사쿠라꽃 피는 날 황궁으로 소풍을 가 보았느냐, 또 한가지 말도 되지도 않는 피천득의 마음속 작은 연인 꼬마숙녀
아사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 ?두 중년 여인들의 메신저와 쪽지 수다는 끝이 없었다.
덕분에 쪽지 수다와 메신저는 날이 갈수록 길어져서 어떤 날은 밥을 태우고
어떤 날은 반찬을 만들 시간이 부족하여 남편 몰래 시장에 가서 만들어진 반찬을 몇 가지 사 오곤 하였다.
그런 날 남편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반찬투정에다 집안에 곳곳이 먼지투성이니
하고 엉뚱한 잔소리로 밥맛이 뚝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우리들의 쪽지글이며 메신저 를 갑자기 멈출 수 있나?
남편을 잘 만나 시집을 환상적으로 간 내 친구 정희는 아직도 사진으로 보면 서른 살 정도로 보인다.
남편을 잘 만나서 그런가?
일본의 회맛이 일품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온천욕을 밥 먹듯 하여 그런가?
그도 아니면 골프를 힘껏 휘둘러서 그런가?
가시나 정말 복도 많다.
우리는 오래전에 헤어졌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부터 다른 학교를 선택했다. 나는 내가 진학했던 학교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진학하고 싶었던 학교가 아니어서 선택은 했지만 학교 생활이 불만스럽고 재미없었다.
학교에 입학하여 둘러 보니 중학교때 우리동네로 시집 온 대문집
큰 며느리인 미란언니의 동생 미환이도 우리학교에 입학하여 한 동안
같이 다녔다.
미환이는 기타를 아주 잘 켰다. 음악가처럼 날마다 기타를 학교까지 들고 와서 뜯으며 멋드러지게 노랠 불러서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렵 이 멋진 미환이를 좋아하는 여친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정희였다. 내가 알기로는 둘이 무지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중학교 때 혹시 첫사랑은 아니었을까?
기타를 잘 치던 미환이는 공부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로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것 같았다.
. 대신 영어공부만 죽으라고 해댔다.영어가 좋아서 그랬을까?
하루는미완이가 쪽지를 주었다,
정희한테 꼭 전해주라고 ... 정희는 다른학교로 진학했었고 동네도 멀어서
그 때 준 쪽지를 깜빡하고 그만 전하지 못했다. 성의부족으로
.... 만나서 할 말이 있다 꼭 할 말이 ...
그런 내용이었다. 미환이는 누나가 살고 있던
우리동네에 종종 왔는데 그렇게도 중요한 연서쪽지를
어이없게도 그만 전하지 못했다. 미환이는 실컷 기다렸을테고
정희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모른채 ..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후 미환이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남학생들은 여학생과 달라서 그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감쪽같이 몰랐다. 아니면 미환이가 몰래 떠나려고 마음의 결심을 했는지...
우리동네로 시집왔던 미환이네 큰누나도 얼마 후에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미환이는 미국에서 치과의사가 되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학교 카페로...
훗날 들은 소식인데 정희는 한 동안 미환이를 못잊어 많이 힘들어 했다고 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때 내가 쪽지를 전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정희는 마음 넓게도 그 때의 내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정희가 말은 안했지만 내가 많이 원망스럽고 미웠을지 모른다.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다 함께 모여서 지나간 이야기 한 번 실컷 해 보자고
메신저로 키득키득 대다가 자존심이 센 정희에게 미환이 이야긴 끝내 못해보았다. 하긴 지나간 이야기는 본인이 꺼내지 않으면 못하는 것
그렇게 우리는 지나간 이야기를 기억하면서도 현재에 충실하며 잘 살아 가고 있다.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고왔던 정희... 하긴 피천득의 가슴속 아사코는
잘났다고 거들먹 거리는 것 같아 보이는 미국장교랑 사는 모습에...
3번째 만남은 아니 만났어야 했다고 무척이나 아쉬워한 피천득의 인연처럼
마음속의 꼬마숙녀로 영원히 살아 있어야 했던, 아사코가 있는 일본에서 옛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ㅎㅎ 정희야,미안
...우리학교 앞 찐빵집에서 토요일 오후3시에 꼭 만나자고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
나는 정희와 미환이가 그렇게나 먼 곳으로 떨어져서 멀리 날아가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정말 인연이란...
그런데 왜 정작 본인들은 말도 안하는데 나만 이럴까?
때로는 남의 일이라도 내가 무척이나 아쉬운 그런 일이 간혹 생기기도 하나보다.
미환이랑 정희의 작은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