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에서
전방급 신물언아사...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이 순신 장군의 유언)
노도 가는 길에 ...
1598.11.19. 10시경 관음포에서 순국하셨다.
이 순신 장군 영상기념관 앞에서
남해군 이동면 이동중학교에서 ...
소설 '다리' 의 작가 조재철님이 다닌 학교. 백련마을로 가는 길에 ...
운동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해고등학교가 마주보고 있다.
며칠뒤 이동면에서 마늘 축제를 한다네. 이 표지판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은 '이어마을'이었지 아마..
차를 세우고 마늘 쫑 빼는 아지매한테 물었다.
"백련마을 가려는데 어디로 가요?"
"쭉 가면 원천마을이고 고 담이요 "
밭 언덕 위에는 분홍색 금평교회당이 있었고...
마늘향기가 폴폴 날아 오르던 돌담이 있어 마냥 정겨운 느낌이 들던 집,
아지매는 5월의 고운 그림이 되어 주었다.
드디어 노도 가는 배 '제2금산호'에 올랐다.
321년전 서포 김만중선생이 가셨던 바닷길로
그 옛날 남해의 외딴 섬으로 유배길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기막혀 하던
그 분의 심정을 헤아려 보며...
배를 탄지 5분만에 내리라고 한다. 백련마을에서 노도까지는 정말이지 헤엄 쳐 건너도 될법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선수라면 식은 죽먹기.
조금 더 배 타고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으면 ... 아쉬움이 남는 배타기...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섬 노도 ...
이곳에 오기 전 노도는 서포의 향기가 가득한 섬일거라고
상상하였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거리가 조금 멀다.
서포의 유허지와 초옥, 우물터로 가는 길에 만난 노도아지매들,이
풀을 뽑고 있는 이 곳은 상주초등학교 노도분교로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앞으로 <서포의 문학교실>로 단장할 예정이란다.
바다가 내려 다 보이는 노도분교 운동장,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멎은 지는 이미 오래.
아이들이 뛰놀지 않는 잔디밭 운동장에는 잔디와민들레 자운영이 무성하여 노도아지매들을 힘들게 한다.
몇이서 풀을 뜯길래 혹시 품삯은 받느냐고 여쭈었더니 남해군으로부터 일하는 댓가를 받는다고,
" 몇명이 있으면 학교 문을 다시 열까요?"
"다섯,넷?"
"우리 아이들이 다섯, 그럼 몽땅 데려오면 학교 문이 활짝 열리겠네요 하하"
"그라소 그럼 우리동네 좋겠네 노도분교 운동회도 하고..."
너무 심심한 노도 , 남편도 심심한지 가던 길 멈추고 담넘어 학교를 처다본다.
구영자(65) 아지매가 자꾸만 들어와 보라고 권해서 따라 들어간 학교 사택,
벽에 붙은 그림은 노도마을 어른, 여든 한 살 정봉기할아버지의 작품이란다.
할아버지는 그림도 잘 그리지만 노도마을 할머니들을 모아서 한글도 가르치신다고..
정봉기할아버지의 또 다른 작품 "여보게 자네~~"
할아버지의 명언 ...
노도를 찾은 날, 그곳에는 늘 푸른 나무, 상록수 한 그루가 있었다.
바로 정봉기할아버지, 심 훈의 상록수가 노도섬의 정봉기할아버지를 모델로 삼으신건 아닐까?
참 그러고 보니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을 공모하였다.
상금 500원을 걸고 (당시 소 한마리 60원하였음))
'조선농어촌문화'에 기여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집한 것이다.
심훈은 당시 부모님이 낙향하여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장질 심재영이
청년 십여명과 농촌계몽에 앞장서서 인근 마을까지 활동하고 있었고, 이 때 샘골의 채용신의
부음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회장으로 치루어졌으며 그녀의 업적이 소개되고 영원불멸의
명주, 무산아동의자모, 선각자중의 선각자라는 글로 신문 첫줄을 장식하였다.
심훈은 세차례 정도 샘골을 방문하여 자세히 채록한 후 '상록수' 를 썼다.
1935년5월4일 쓰기 시작하여 6월 26일에 탈고하고 그 해 9월 10일 석간 동안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15일까지 127회 걸쳐 연재하였다.( 옮긴 글)
김만중이 살았다고 추측되는 초옥과 샘터로 가는 길에,
길가에 널부러진 대빗자루(왕거시리,거제도말) 가 눈에 띄어 얼른 들고 쓸어 본다.
이 길 지나가는 길손들이 깨끗하게 쓸어놓고 가는 전통을 남겨도 좋지 않을까?.
푸르른 5월, 역사는 무심한 세월을 실어나르고 있었나보다 우거진 숲속은 새소리만 가득하다.
무심한 세월은 수백년을 흘렀지만 문학의 뿌리는 영원하다.
옛날옛날에 이 곳에 <노자묵고할배>가 살았더란다 (노도의 전설)
그 할배는 서포 김만중선생으로 노자묵고할배로 섬사람들에게 비친 까닭은 김만중의 죄의 형벌이 바로 '위리안치' 였기 때문이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에서 거주의 제한을 가한 형벌로 굉장히 엄한 벌이었다. 집 둘레를 울타리로 치거나 탱자나무혹은 가시덤불로 둘러쳐 거주민과의 접촉을 금한 중죄인으로 다스렸던 것 ... 섬사람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김만중이 살았을 법한 초옥의 부엌에 들어가 무쇠솥 뚜껑을 열어 보니
녹슨 흔적은 없다. 밥해 먹은 일도 없는 듯(그러니까 최근에 들여 온 새솥) ... 아쉬움이 남는다.
노도섬을 조금 더 꼼꼼하게 찾아 보았더라면 밥해 드셨던 주방기구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무심한 세월은 어느듯 318년이나 흘렀다.
조선 후기 정치가로서 소설가로, 한글애호가이며 수필가로 한 시대의 획을 그은 대문호 서포의 고뇌어린 일생
일편이 흔적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우리 국문학을 대표하는 문학가, 그가 가고 없는 숲에 다래나무, 천선과나무,후박나무,동백나무,종려나무 등 남도의 나무들만 인걸을 그리워하는것 같다.
김만중선생의 영혼은 아직도 노도섬에서 떠나지 않고 어디선가 지켜보고 계실것만 같다.
초옥의 마루끝에서 남해 바다를 내려 다 보며 구운몽,사씨남정기,서포만필 등
마지막 필력의 힘을 쏟으셨을 당시를 그려보니 불편한 거동으로 , 목은 또 얼마나 마르셨을지.
"서포선생님, 앤이 물 떠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김만중이 직접 파다는 샘터, 마침 목이 말라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려니 물속에는
도룡뇽의 알인지 두꺼비 알인지 분간이 안되는 알들이 가득 부화중이다. 개구리 알은 아닌것 같다.
너무 징그러워 사진에 담지 못했다.
관리를 잘 해서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까지는 엉터리지만 앞으로 정비를 잘 하여 맛있는 김만중표 샘물을 마시게 되기를 기대 해 본다.
억만년을 한결같이 푸른 쪽빛으로 남은 남해섬 노도, 이 곳은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이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다니 어쩌면 하늘이 내려 준 천혜의 섬일지도..
후세사람들이 김만중선생을 길이 흠모하라고...
이제 산 위에 있다는 허묘를 찾아 올라 간다.
이미 갈증이 나서 견디기 힘들지만 김만중이 당한 위리안치의 고통에 비긴다면 지금의 갈증쯤이야 참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남편은 더워서 산위로올라가기 싫다고 혼자 갔다오라한다. 여기까지 와서 가장 중요한 곳을 보러 가지 않겠다니 원 ...
노도의 5월은 여름같다. 경사가 심한 돌계단 100m를 혼자 고독하게 오르려니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2년전 7월 염천할 무더위 속에 거의 90각도의 돌계단 990개를 빈혈기를 느끼며 올랐던 '오녀산성'
(중국인민공화국 요녕성 본계시 환인현에 위치)난공불락의 요새 위에 있었던 기억이 다시 눈 앞에 선다.
오늘 오르는 돌계단은 총 232계단 숫자세기를 좋아하는 의지의 한국인 ...또 세었다.
얼마쯤 올라가면 평지가 나올까?
김만중선생의 허묘(가묘) 는 이곳에 한달정도 안치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엎드려 절하였지만 침묵만 흐를뿐이다.
산을 내려 오니 반갑게도 멀리 가지 않고 초옥을 가만 가만 관찰하는 남편이 있어 사진속으로
끌여들여 본다. 이 초옥은 김만중이 이근처에 살았으리라 추측하여 최근에 지은 초현대식(?) 건물이다.
위리안치의 형태는 더더욱 아닌 채 많은 아고증을 다시 거쳐야겠지만 그래도 많이 미흡하다.
노도,.. 앵강만 초입에 있는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백련마을 앞의 섬으로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하여 '노도'라 불린다.
노도가 떠 있는 모양이 마치 삿갓처럼 생겼다하여 '삿갓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앤의 눈에는 싸리로 만든 소쿠리 형태를 하고 떠 있어
아무리 보아도 소쿠리를 받쳐 놓은 형태가 앞으로 노도는 잘 사는 부자섬이 될것 같다.
풍수쟁이는 아니지만 소쿠리터는 부를 상징한다고 시어머니께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난다.
김만중 알아보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학작품 <구운몽> ,<사씨남정기>,<윤씨행장>,<서포만필>
등은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남긴 유배문학으로 우리문학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다음이야기는 남해의 작은 섬 '노도사람들 '들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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