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41년전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에서 체포된 간첩 김진계이야기

이바구아지매 2011. 7. 2.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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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나는 다시 민간인이 되었다.

1.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하염없이 눈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옥밥을 먹었던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고,
어디에 취직할 곳도 없는 서늘한 늦겨울이었다.

아침마다 김치를 넣는 큰 플라스틱 통에
밥만 가득 넣어, 남산 도서관을 갔었다.
종일 책만 읽고 글만 썼다.
점심이 되면 50원짜리 우동을 사서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짠지 한쪽과 우동국물에 싸온 밥을 말아먹어도
눈물나게 행복했다.
철창과 수갑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저믈녘 집으로 내려올 때
서편 하늘에 짙게 깔린 붉은 노을 아래 서울 장안을 내려보며
"어찌 이리 넓은 땅에 한뼘 내 땅이 없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만치 갈 곳이 없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래도 아침마다 배낭을 매고 나가는 내 뒤에서 늙으신 아버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찬송을 불러 주셨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주님 주 하나님
의심말라 하신 이 능력으로 불러 주셨네"

........
<한겨례 신문사>를 취직하려고 준비했었다.
갈 곳이 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민청련 사건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되었던 교수님 한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젠가 시대가 바뀔걸세. 박사과정에 들어오게"
연구실에 인사드리러 갔던 나에게
그 교수님은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
지금은 명예교수이신 연세대 국문학과의 이선영 교수님이시다.

그래서 다시 박사학위 과정을 준비했고, 동시에
감리교신학대학원에 들어가 목회과정 대학원을 공부했다.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소민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장문학사에서 어떤 책을 준비하는데, 한번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구두곽 속에 녹음된 테이프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메모했다는 누런 종이들이 가득했다.
그것을 소설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었다.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하고 동의했다.


2.
그 할아버지를 만나러 강릉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그 무렵,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늙은 분 한분이 나오셨다. 눈빛, 눈빛이 쏘는듯이 살아 있었다.
김진계 할아버지, 그는 18여년간 감옥에 있다 나온 남파간첩이었다.

1918년 강원도 명주군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는 징용살이를 한 뒤,
해방 후에는 남로당원으로 경찰생활을 하고, 1950년에는 인민군 군관으로 한국전쟁을 겪었고,
1953년에 재대하여 평안북도 안주군 평률리에서 리민주선전실장으로 일하다가,
1958년 중앙당에 소환되어 남파공작원으로 수차례 남북을 오갔던 사람이다.
그러던 중 1970년 10월 6일 거제도 다대리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18년간 대전 대구 교도소에서 복역하여,
1988년 12월 21일 71세의 고령으로 석방된 인물이다.

1990년 6월경 나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강릉 위의 사천 해변가의 그의 집에서 나는 거의 2개월 가량을 함께 살면서 구술을 받고 집필했다. 글을 쓰다가 힘들면

자전거를 몰고 바닷가를 달렸다. 그래도 지치면 사천 해수욕장에 가서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출판사에 원고를 갖고 왔을 때, 편집부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지적해주고 고쳐주었다.

그래서 출판된 책이 김진계 구술, 김응교 보고문학 <조국>(상하권, 현장문학사, 1991)이다.

그런데 책이 출판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다시 안기부의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구술자의 증언이 한국 안기부의 체제와 고문장면이 너무 명확하게 서술되었다는 이유였다.

다시 변호사를 준비하여 법정에 서야 할까 고민하는 시점에, 출판사에서는 제목을 바꾸어 출판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래서 책은 출판된지 3개월만에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져 출판되었다.


3.
그러던 1991년 12월 11일, 주인공 김진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소민영의 차를 타고

새벽 꼬박 밤을 새워 강릉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관에 흙을 부었다.

재미있는 일은 이 책이 서강대 북한학 대학원에서 필독서로 선정되었던 일이다.

 이어서 경남대 북한학연구소에서도 필독서로 선정되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북한 사회를

이만치 잘 증언한 책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안기부에서도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어느 요원의 말이었다.

특히 간첩을 교육시키는 장소와 장면에 대한 증언은 결정적인 정보였다고 말했다. 또 영화로 만들겠다는 감독이 있어

몇번 만난 적이 있다. 그 감독은 몇편 영화를 만들더니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갔다.

이런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늙으신 할머니도 곧 돌아가실 분이였고, 따로 연고가 이어지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판권을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내 자신의 평생 짐으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빛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있던 박선욱 시인과 상의하여 몇군데 개작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 얘기까지 보충하여 다시 고쳐 책을 내기로 했으니, 그것이 풀빛 출판사에서

1993년 2월 20일 완결본으로 출판된 "김응교 장편실명소설 <조국>(상,하권)"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책을 더욱 보강해야 한다. 예컨데 김진계 할아버지는 남파간첩이 아니라,

영등포 지역에 머물던 고정간첩이었던 것이다. 그 말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쓰면 할아버지는

다시 잡혀 들어가시는 운명이 될 것이었다.

김진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시 한편을 지어 계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다.

 내 시집 <씨앗 / 통조림>(하늘연못, 1999) 89쪽에 있는 <무쇠다리>라는 시를 여기에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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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다리>


마지막인가
말라 죽어가는 수탉이 이럴까
침상의 노인은 눈빛 한 번 보내곤
헉헉 된숨만 몰아 쉰다

꺼뭇 저승꽃 번져 핀
까칠한 오징어 살갗
차고 메마른 겨울 나뭇가지
노인의 다리를 천천히 만져본다
차갑게 썩어가는 뼈마디

일정 때 남지나해에서 미군 폭격에
깊이 박힌 파편을 도려냈던 징용병의 장딴지
해방기엔 경찰에 잡혀
쪼인트 몸둥이찜질 당했던 정강이
남파공작원으로 왔다가
거제도에서 으스러진 무릎 관절
십구 년 옥살이에 멍도장 스민 허벅지
피 통하지 않는 발꼬락을
엄지부터 잘라내고 있는
강원도 사내의 다리, 현대사의 상처들이
물너울보다 깊디깊게 물결치고 있다

할아버지, 이 다리는 거대한 다리입니다
.....기레, 이 다리루 안 가본 데가 없구먼
요 다리두 인젠 제 구실을 다한 거라

빙글 웃으시는 할아버지 눈가에
백두에서 녹아흐르는 눈석임물 반짝인다
나는 손아귀에 헐렁하게 잡히는 야윈 발목
복숭아뼈 언저리 가만히 쓰다듬는다
수천리 눈보라길 뚫고 달려온
고구려인의 말발굽 소리 마구 들리는
차가운 무쇠다리에, 볼을 대본다

 

조금  길게 인용한  위의 글은    김응교 시인의  글입니다.

 

 

파이팅

지금부터  빨강머리 앤의 발로 쓰는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까요?

 

 

2011년 6월27일 월요일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로 갑니다.

이곳에는 남파간첩 김진계가  1970년 10월4일 간첩선을 타고와서  상륙했다가  1970년10월6일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적어놓은 표지판이 있고  당시상황에 대해 물어볼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983년 12월3일

부산 다대포 침투간첩 생포 사건과는 다른 이야기)

 

 

먼저 마을 어귀에 세워둔 표지판을 사진에 담아 봅니다.

내용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게  사진을  가까이에서 다시  담아봅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1970년 10월 2일  원산을 출발하여 4일 다대리에 상륙하고 또 4일 검거되었다고 

 되어있는데 앞서 읽은 김응교 시인의  설명과 달리 체포날짜가 6일이 아닌 4일로 되어 있습니다 . 

 

 

원산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진을  확대해서  다시 보면  꼭 해주에서 출발한 것처럼  침투경로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 표지판은  얼마간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1970년 10월 2일 원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상을  거쳐 10월4일 심야에

거제 해금강 앞바다에 모선을  세우고  보트를 내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거제유스호스텔 앞쪽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감낭골 벼락바위 부근  끄트머리 지점이죠.

 

 

<감낭골 벼락바위 부근 >

 

당시 간첩을 체포했다는 곳으로 가 봅니다. 거제 최고봉 가라산(585m) 줄기에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비가 온 뒤의 숲길이 젖은 상태라 체포현장까지 가지  못하고  논에서 일하는 분에게  대략의 위치를

물어보니  새로 짓고 있는 건물에서 뒤쪽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41년전, 당시의 상황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알려 주시는  공영길님(58세)

 

 

 

이제 총소리를  처음 듣고 신고를  했다는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미리 전화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고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주시며 41년전 다대리에서 체포 된  간첩  긴진계의

이야기를 펼쳐주시더군요

1970년 당시 마을 이장을 할때였는데  10월6일 새벽4시경에  다대마을에서 1시간정도

걸어  도장포마을(바람의 언덕 옆 마을)에서   도선을 타고 구조라에 도착, 다시 걸어서 부산가는  배가 출발하는  지세포로 가려고

집을 나서  새벽길을 걷고 있을 때  멀리 숲속에서  불빛이 보이고  권총소리가 들려 파출소에 신고하고 그대로  부산으로

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간첩이 생포되었고  그가 김진계였다고 합니다.

 

 

 

 

이분이  당시 신고자 강영수옹입니다. 

 신고포상금으로 당시 돈으로 100만원

받았는데   나중에  찾아오는  외부손님이  많아서  오히려  적자났다는 얘기며, 어느 날은  일본에서 온 밀수선을

발견하여   신고한 이야기등   바닷가에 살면서 접했던 다양한 경험담도  들려 주십니다. 

 

 

간첩 김진계는  앞서 읽은  김응교 시인의 글에서  대략 소개되었지만  강원도 명주군 출신으로  일본에  징용되어

동남아에서 노무자로 고생하다가  해방되기전  고향으로 돌아왔었고  이후  해방정국 시기에는  남로당 신분의 경찰로

고향에서 근무했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치안대활동을 했으며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 갈때  함께 가서 인민군군관이 되었으며 

 20년간 북한에 살면서  북한여성과 재혼하고 5명의 자녀를 두었고  50년대 말부터  간첩교육을 받고 수차례 강릉,속초 등지에 침투했습니다.

 

 

6.25때 북으로 가기전에  남한에는  본처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후취가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다급한 상황이 되자

 데려가지 못하고 단신으로  북으로 가게 되었다고 구술하고 있습니다.

거제도 동부면(당시) 다대리에 침투한 목적은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 였고  최종적으로는  서울에 거점을 마련하여 지하당구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울진, 삼척 등지에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김신조가 내려와서 잡히는 등  강원도 해안은  경비가  강화되어

거제도를 침투경로로  잡았다고  아래 사진에 보이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 시중에서 살 수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1990년 출옥 후 모습과 젊은 시절의 모습>

 

 

 

                                                       

 

이 책은 남편이 20년전에 사서 읽고 집에 보관하던 것인데  책이 발간되던 당시는  6.29 선언 이후의 시대배경에 힘을 얻어

정순덕 등 빨치산이야기, 삼청교육을 받은 사람들 이야기 등의  책이  많이 발간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책(상권)은 현장문학사 1990년 9월 18일 초판 발간인데  김응교 시인에 의하면 1990년 6월에 김진계를 처음만나

2개월 가량 같이 지내면서 구술을 채록하고  1991년 책을 발간했고(하권)  3개월뒤 <귀향>이란 이름을 달고

출판된 일이 있으며  1993년에는  풀빛출판사에서 김진계가 죽은뒤 김응교 장편실명소설<조국.상/하권>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응교 시인은  위에서 김진계가 남파간첩이 아니고 영등포 지역에 머물던 고정간첩이라니 나로서는

뭐가 뭔지  모를 지경입니다.  내가 만난 강영수옹의 당시 설명도 책 내용과는  많이 다른데 

책에서 김진계는 10월 4일 다대 침투당시

자신을 내려주고 가는 보트가  발동기를  걸고, 모선으로 돌아 간다고  전등 불빛으로 신호를 해서   곧 해안 초소에  발각되었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도랑을 건너뛰다  한 쪽 다리가 부러지고, 곧  예비군이  추격해 와서  숲속에 숨어  10월5일 하루 종일을  보내고

10월6일 새벽에 난수표와 암호문 등을 태우고 자결을 하려고  권총을  세 발  자신에게  쏘았는데 상처를 입고 기절해 있을 때 

예비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고 구술했는데  

강영수옹은  자신이  동네 이장이었고  집 뒤가  바로 파출소인데  10월4일 간첩침투를

알리는 싸이렌이 울리고 예비군이 출동했다면

10월6일 신고때까지  간첩침투를 몰랐을 리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간첩 김진계는  책에서 줄곧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우리는  북한을  두고 하는 말이며 

남한 감옥생활 3년만에  본처, 친지등의  권유로 전향하지만  1988년 12월21일 석방될때까지  18년간 대전교도소 등에서  복역하고

이 책을  남기고  곧  고향에서  사망했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당시 간첩 김진계를  헬기로 태워갔다는  다대초등학교(현, 명사초등학교 다대분교장,2007년 폐교)와

당시 매우 분주했을 다대파출소를 둘러보고   유명한 갯벌 체험장  다대갯벌을 사진속에 담아 봅니다.

 

                                                                

 

 

명사초등학교 다대분교장

 

 

 

                                                                     

다대파출소

 

                                                     

  

거제제일의 갯벌 체험장에서 빨강머리 앤 .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