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거제사람을 배우자로 맞은 통영 두 문인이야기(김용익편)

이바구아지매 2011. 8. 3. 17:24

 2011년07월18일  이 포스팅 제목과 같이하여 박경리편을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글을  읽어본  주변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비공개로 전환해버렸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자칫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어  매우 조심되는 부분입니다.  명예훼손죄의 법리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가중되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피해자가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논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不罰)이다.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 그 사실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310·312조).

명예라 함은 외부적 명예, 즉 사람의 인격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말하며, 명예의 주체에는 자연인·법인뿐만 아니라, 기타 단체도 포함된다. 공연히라 함은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 훼손이라 함은 반드시 현실로 명예를 침해함을 요하지 아니하고,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위험상태를 발생시킴으로써 족하다(통설·판례). 따라서 이 죄는 추상적 위험범에 속한다.

특수한 명예훼손죄로 사자()명예훼손죄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있다. 전자는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죄인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친고죄이고, 고소권자는 사자의 친족 또는 자손이다(308조, 형사소송법 227조). 후자는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데,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반의사불벌죄이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김용익 작가의 책들>

                                                < 소설가  김용익 >

 

 

                                    '꽃신(The Wedding Shoes)’ 의 작가로  세상에 알려진  김용익(1920~1995)은 통영시 태평동22번지에서 

통영군 통영읍의 마지막 읍장인  김채호와 어머니 김옥정 사이에 2남1여중 차남으로 태어나서  일본에서 공부하고

해방전 귀국하여  부산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1948년 도미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영어로 주로 한국소재의

소설을 쓰는 작가로 알려졌으며  1957년 귀국하여 1958부터 1964년까지  고려대 영문과교수를 지냈고 

 1965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여러대학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치다 1995년 귀국, 고려대학에서  잠시 강의하던 중

 지병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김용익이 거제 옥포사람 진도인과 결혼한 때는  해방전인 1943년 그의 나이 23세라고

아래 인용하는 그의 조카 김수환선생이 쓴  글에서 알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사람,진도인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옥포에 있는 동인한의원 원장님(김형래, 82세)으로부터  옥포 인구가  고작 2,000명(1960년경) 정도였던  때  

이곳 갑부 어장집과 그 집의  사위였던 소설가 김용익의 지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양의과대학(현 경희대 한의학과)을 졸업하셨다는  내 시어머니 친구분의 남편되시는

원장님은  의과대학 졸업 후 6.25 한국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곧장  고향으로 내려 와 이곳에서 개원을 하였고 당시   어장집의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았으며 한의원이 위치한 이곳 역시도   당시 어장집의 소유였으며

 그 때는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만 해도  어장막집 소유의 과수원이었던 옥포시내의 현재 모습>

 

 

상전벽해 [桑田碧海] 란 말이 실감나는 세월의 고개를  훌쩍 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부자였던 어장막집으로 장가 든 통영의 한 사내,

그 사내는 통영의 읍장을 지낸 김채호씨의  둘째아들 김용익이었습니다.

생활력이 애시당초  결핍된  아들을   염려한   아버지가

 기어코 부잣집으로  자식을 장가보내게 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가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작가는 부자를 혐오하며,  자신의 결혼생활은 청빈한 생활속에서  아내와  함께  

시를 읽으며 보내는 게 꿈이었다고합니다.

 

<여객선 부두 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소설가 김용익의 처가가 있던 자리>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마지못해 한 결혼이었지만

부부가 된 이후에 작가는 옥포의 처가에 몇번이나 들렀는지  그 또한  궁금해집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장집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셨고 후손들은

 이 곳을 떠나 서울혹은 해외에  산다는 소식입니다.

동인한의원 원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어장막집의 돈으로 도시  몇개(?)를 

 건설할 수 있었을 정도의 부자였다고 합니다.

옥포와 산 고개하나를 사이에둔  동네  연초면 송정리 마을사람들은 단나무

땔감을 지고 송정고개를 넘어 옥포어장막에 가서 팔기도 하고

 멸치 등 생선을  바꿔  식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종종 듣기도 하였습니다. 옥포만 넓은 바다는 당시 김용익의 장인

진명수씨의 바다로 통했을 겁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바다목장이었으며  지금의  

대우조선해양이 접수한 바다는 모두 어장막집의 사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테죠.

 

 

이제 옥포 성안로를 지나  아주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옥포고개로 향합니다

소설가 김용익과 결혼했지만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했던 진도인여사가 설립한 

사회복지법인  성지원에 가보려고요. 진도인여사  역시  당시 서울에서 공부한 

신여성이었다고 합니다.김용익과는 이혼을 하였다고 전하지만

언제 이혼을 하였는지등은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건데

 1960년대 중반 작가가  고대교수로 재직후 미국으로 떠날 때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진도인여사  역시도   10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남편보다  몇년 더 오래사셨습니다.

그분께서 성지동산에 남겨 준  성지원은 주인을 잃고도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6.25전쟁 후 생겨 난 고아들을 맡아 보살폈으며 이후로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맡아 돌보며 사랑을 실천하다 하늘길로 떠난 참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성지원을 찾아가서 진도인여사님의 모습이 궁금하다고 하자 아쉽게도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많이 아쉬웠습니다.

 

 

 

2010년 2월4일 제 5대 성지원장으로 취임한  이미숙원장은

설립자의 취지를 받들어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고, 기도하자 '라는 원훈아래

소외된 아이들을 가슴으로  따뜻하게 안아 준다고 합니다.

행복을 엮어 가는 성지동산을 꿈 꾸는 원장님은 <소외된 아이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기초를 다지는데  힘쓰며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여

 받음으로 얻는  기쁨보다 베품으로 얻는 기쁨을 배우도록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들려주시며  자랑스런 성지원의 봉사자와 후원자가 되어 줄것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

 

 

<1961년성지원 모습 /1960.2.25설립 >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고체한( 김민영의 고대석사논문 <김용익 문학의 서지연구>에서 사용한 표현)

 성격의 작가와  결혼하여 알콩달콩 함께 살아보지 못한 불행했던 여인,

무책임한 지아비를 둔 여인의 슬픈 운명이 옥포땅에 남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성지원에서 생활하던 언니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키기 훌쩍 크고 목이

 긴 여인이  수수한 옷차림으로 분주해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소설가 김용익의 아내였다는 기억이 이제서야 퍼즐맞추기처럼  맞추어집니다.

 

 

 

이제 차를 몰아 통영시 용남면 동달리 오촌마을의 고 김용익의 묘소가 있다는 곳을  찾아 갑니다.

용남면 동달리 오촌마을에서 김용익의 묘소를  정자에 앉아 쉬고있는  노인에게  물어 봅니다.

오촌마을의 어르신이 알려주신 대로  길을 따라 갔지만  묘소를 찾을 수가 없어 이산저산 헤매다가

어쩔수 없이 통영문화원으로 전화를 걸어 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추모제 행사때 사용한  걸개그림>

 

          

통영읍장을 지낸 아버지 김채호씨와 어머니 김옥정씨  누나 그리고 외무부장관을 지낸 형 김용식과

찍은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은 보이지만 아쉽게도 작가의  결혼사진과  그의 자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언젠가 검색을 통해 읽은 적이 있는데   작가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잘못 알려졌던 것입니다. 분명히 옥포의 어장막집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슬하에는 1남2녀를 두었고요.

 

 

위  김민영의 학위 논문에는

 

'가족사에 관련해  노출이 거의 없었던 작가였지만  (조선일보)기자였던 둘째사위인 정운성씨가

 김용익과의 인터뷰를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일반 인터뷰와는 달리 친밀감이 돋보이는

 접촉을 통해 그와 관련된 사실들이 노출 된 것과

김용익의 친손녀인 피아니스트 안젤라 지아 김(Angela Jia Kim)의 인터뷰에서

 김용익이 언급된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런 이유는 다 그의 고체한 성격때문이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아직 벌초가 되지 않은 묘소>

 

  

<소설가 김용익의  묘소에서 >

 

 

 

다시 통영문화원에 알아보고 태평로 22번지를  찾아 왔습니다. 

 네비게이션 덕을 톡톡히 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집 앞  대문가에  나란히 선  두 개의  표지석

왼쪽은  외교관  김용식(형님), 오른쪽은 소설가 김용익 입니다.

2011년7월21일  이곳에 서서  화려한 직업의 외교관 형님과 

기인이거나 혹은  초인 [超人]같은 삶을 살다 간 동생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 역시 의미있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토영이야~길>

김용익은 김용식의 동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단편소설가이다.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해 "내 밑바닥에 깔린 고향에 대한 시감이 원천"이라고 했다.

한국어로 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유학시절 영어로 쓴 첫 단편 <꽃신>은 영어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미국과 유럽 등지 교과서에 실렸다.

김용식은 "내가 가난하고 힘없는 신생 한국의 외교적 대변자였다면

 내동생 김용익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한국정서를 세계무대에 당당히 알린 작가이다.

후세에는 김용익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 집 앞에서 우편물 하나를 뽑아 들고 확인 해 봅니다 .

우편물 역시 태평로 22번지라고 되어 있지만

대문 앞의 길번지로는 태평로 18호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단편소설< 밤  배/

1968년 여름 미국Texas Quarterly 에 게재>

에서  옮겨왔습니다. 밤배는 영어로 From Here You Can See The Moon 입니다.

 

'"뜨끈뜨끈한 김밥 사이소 . 뜨끈뜨끈한 저녁 안 묵을랍니꺼."

할머니는 통로에 내려놓은 광주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여러번 소리쳤다.

주위의 얼굴은 화가 풀리지 않은  채 쳐다 볼 뿐이다 .

김밥과 꼬챙이에 낀 오징어 무침을 구두닦이 애가 큰눈으로 내려다 본다.

 무릎을 기운 바지,가느다란 목,배가 고픈 모습이다.

큰 물결이 창문을 들이치니 배는 굼실굼실 몸째로 흔들린다. 이제 두서너 시간이면

고향 산판에 내려 밤에 휩싸인 선창가를  아무도 모르게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10년 동안을 낮배로 돌아와서 고향사람의 웃음이 가득찬 부두를 보기를 소원했건만.

옛날에는 부산에 있는 형을 만나고 늘 밤배로 돌아왔었다.

형에게 얻은 돈으로 화구를 사가지고.

"그게 뭐꼬? 물감하고 붓하고 도화지라고? 나도 니 같은 형님이 있었으믄 얼마나 좋겠노.

 아무 일 안해도 그림이나 자꾸 그리고 있으믄 안되나?"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일부러 나는 밤배를 탔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미국에서 화가로 명성을 얻은 후에 1957년 귀국시  부산을 거쳐 고향 통영으로

돌아가는 밤배선상의 풍경입니다. 통영김밥이 팔리고 있는 것도 알수있습니다.

 주인공의 형은  도지사이고 부산의 경남도청(창원으로 옮기기전의 경남도청은 부산에 있었음)에 근무하는것 같습니다.

아마 1965년경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소설을 쓴 듯 합니다

 

또 작가는  <밤 배>에서 지겟군의 입을 빌어 주인공의  이혼사유를  이야기합니다. 

'조영감은 손님이 오니께 반가울 게요. 큰 아들 조지사는 영감 찾아볼 틈이 없이 바쁘다 합니다.

마누라를 홀딱 벗기고 그림을 그리려다 이혼을 당한 작은아들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소.'

 

이작품에서 조지사는  1963년 취임한 김용식외무부 장관이고 화가는  작가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아래는 김용익의 성품을 더 잘알수 있는,  조카 김수환선생이 쓴 <내가 알고 있는 김용익 선생>의 전문입니다.


 

'내 삼촌 김용익은 나와 나이가 17년차로 내가 어렸을 때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나의 큰 형님과도 같았다. 그도 나도 지금 태평동 22번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해방과 동시에 그는 미군 통역관으로 또 부산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그의 나이 28세인 1948년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의 청년기와 장년기는 서로 떠나있었으나 그가 한국에 있을때는 수시로 나와 만났고 그후 그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칠때, 내가 미국 보스톤에 유학가 있는 동안은 종종 그가 살았던 피츠버그를 방문하여 그를 만나 보았고 그후 내가 로스안젤스에 사는 동안은 그가 나에게 오셔서 함께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의 나의 삼촌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는 것을 보았다. 동경유학시절 한국초기의 문학잡지 “개벽” 등 문학잡지가 집에 많았던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해방되던 해 통영에 살던 어느 일본학자로부터 그의 방대한 장서를 넘겨 받아 수많은 책으로 우리집이 작은 도서관이 되었는데 일어책도 많았으나 주로 영어책이었고 그는 항상 영어책을 주로 읽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삼촌은 항상 책만 읽고 문학을 꿈꾸는 사람으로 비현실적이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나의 조부님 곧 그의 아버지(김체호, 마지막 통영읍장)는 그의 장래를 걱정하여 삼촌이 나이가 차자 문학가는 밥을 굶기 쉬우니 부자집 며느리를 얻어 밥이나 먹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하시어 그때 중매로 거제도 옥포의 큰 어장하는 집 딸에게 장가를 가게 하자 삼촌은 무조건 반대를 하였는데 이유는 단 한가지, 부잣집이 싫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장성한 후 직접 삼촌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결혼에 대한 꿈은 초가삼간에 살면서 아내와 함께 시를 같이 읽는 생활이었다고 하였다.

이때 삼촌과 나의 조부님 사이에는 결혼문제로 큰 분쟁이 있었는데 결국 삼촌이 이 일로 집을 나가게 되었다.

그 후에 삼촌 얘기를 들으니 그때 이차대전말기여서 할머니가 준비해준 쌀을 조금 가지고 나갔는데 (그때는 쌀이 참으로 귀한 때였다) 어느 절에 가서 쌀을 조금씩 주고 밥을 얻어 먹었는데 중이 그 쌀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항복하고 결혼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삼촌은 당시 이차대전중이어서 어느때고 징병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니 여자 맛이나 보고 죽겠다고 자포자기하고 결혼하였다고 나에게 고백을 하였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결국 결혼은 실패하고 말았다

나의 삼촌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확실히 좀 괴짜였다. 통역관 시절 미군장교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큰 장닭 한 마리를 주며 이것을 가지라고 하자 필요 없다고 하니 장교가 필요 없으면 다른 사람 주면 될 것 아니냐고 하자 할 수 없이 닭을 들고 길에 나가서 길가는 사람보고 이 장닭 가져가라고 하니 모두 미친 사람인줄 알고 피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는 지게꾼을 만나 이것이 병든 닭이 아니니 가지고 가서 잡아 먹어라고 하자 받아 가더라고 하였다.

 

이 시절  그의 처가인 옥포에 불이 나서 많은 이재민이 생겼는데 미군 당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원조를 요청하자 미군 담요와 미군 식료품인 레이숀 등 많은 미군 물품을 삼촌에게 가져가라고 주었는데 그 물품 중 단 한 가지도 집에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 

 그의 일생은 별로 가진 것도 없었고 교수 월급에 얼마간 출판된 책에서 나온 인쇄비로 비교적 청빈하게 사신 편이었다.

그의 책은 미국과 세계 여러나라의 문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출판되었으나 어느것 하나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없었다.

또 그는 베스트셀러의 작품을 혐오하였고 결국 베스트셀러의 작품을 쓸 수도 없었고 또 쓸 생각도 안했다.


그가 고려대학에 재직 중 이화대학에도 강사로 나갔는데 그의 큰 딸이 이화대학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화대학은 교수자녀는 입학에 특전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이화대학 총장이 김용익교수를 불러 자기딸이 이화대학에 응시를 했으면 발표 전에 왜 좀 미리 알려주지 안했느냐고 하자 되려 화를 내며 이 학교는 시험에 떨어진 학생도 교수딸이면 붙여주는 학교냐고 오히려 총장에게 호통을 치고 나왔다고 하였다.

 

또 자기과목을 택한 한 이화대생이 학기말 페이퍼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못하고 며칠뒤에 페이퍼를 집으로 가져오자 학생이 보는 앞에서 그 페이퍼를 찢어버리며 학교에서 내지 않고 왜 집으로 가져 왔느냐고 야단을 쳐 보냈다고 하였다.

그가 부산대학에서 가르칠 때에는 어느 학생이 시험을 잘 못 치르고는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왔는데 마침 그가 부재중이어서 케이크와 학생이름을 남겨 놓았는데 뒤에 이 사실을 알고는 그 학생의 시험지를 찾아 다시 검토를 해 보고는 오히려 점수를 더 깎아버렸다고 하였다. 그의 성정이 항상 이랬다.

그는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외모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에 입는 옷도 남에게 오해를 살만하였다.

 

그는 피치버그 듀케인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한번은 구내 경찰이 왠 거지같은 사람이 학교안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는 그를 구내 파출소로 끌고 가서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내가 이 대학 교수다.”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지 이름을 묻고는 즉시 교무실에 전화로 확인을 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보내 주더라고 하였다.

그 다음 주일 대학신문에 삼촌 기사가 특집으로 나고 그 허름한 모습이 신문표지에 실리고 나서 교내에서 그 경찰을 만났을 때 삼촌을 향해 깍듯이 경례를 부치더라고 하였다.


그는 술도 담배도 안했고 신문도 티브이도 안 보았다. 그는 한 평생 미국에 살면서 운전면허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이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녔다.

그는 크레딛 카드 하나도 없었고 시계도 없이 살았다.

내가 “시계가 없이 생활에 불편하시지 않느냐?”고 묻자 “ 모든 사람이 다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데 시간을 물으면 되지 무엇 하려 시계를 가질 필요가 있느냐.”고 하였다.

그는 가족에 대해서도 거의 무관심한 편이었고 세상일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말년은 쓸쓸하였다. 별세하기 5년 전 협심증과 신경증으로 고생하였고 가까운 가족과도 멀어지고 은퇴한 후 고려대학 초청으로와서 객원교수로 지내는 중에 병이 나서 1995년 4월 11일 고려대학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그의 둘째딸 수영이와 내가 마지막 그의 병상을 지켰다.'<한산신문2005.11.18>

<뒷쪽의 집이 김용익 형제가 출생한 집>

 

 

거제로 돌아 가는 길에 용남면 SK 주유소에 들러 다시 선생의 멀어진 묘소를 담아 봅니다.

사진중앙의 숲속에 작가의 유택이 있고 멀리 집들이 보이는 곳이 거제도입니다.

 

 

오랜시간 비공개로 두었던 글 오늘  공개합니다 .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