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민족은 일본이란 이름을 들먹이는 순간부터 긴장하기 시작하며 치욕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에 곧장 흥분하고 만다.
그도 그럴것이 반일감정을 족보처럼 간직하게 된 원인제공을 한, 일본의 죄값은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그 죄가 엄청나서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지경이다.
그들이 저지른 서른여섯 해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한 고통과 통한의 역사이며
어떤 비유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민족은 다만 말을 할줄아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던 억압받은 민족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라는 말처럼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대학살의
비극에 견주어도 부족한 악몽의 시간들, 하나하나 나열하여 길이의 수치로 이어본다면
지구의 둘레를 수만바퀴를 돌고도 남을 길이가 되지 않을까?
이런 흥분을 하며 길 나선다.
빨강머리 앤의 발로 뛰는 거제도의 치욕스런 역사이야기 ...
오늘은 거제시청 문서창고 속으로 꼭꼭 숨어버린 일본의 보급에 해당한다는 러일전쟁 승전 기념비 하나를 들추어 내어
일본열도와 맞바꾸자고 당당하게 제의하고 싶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송진포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승전기념비
이 거대하고 무거운 돌덩이는
1904년 러일전쟁에 크게 승리한 휴 일본이 건립한 승전비 [勝戰碑] ..
1904년 오늘, 일본의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연합 함대가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선전포고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만주와 조선의 쟁탈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제국주의적 욕망이 충돌의 원인이었던 이 전쟁에서 주변국들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를 거머쥔다. 이후 마치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인 양, 세계무대에 진출할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자국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거침없이 패권주의로 내닫고 말았다. 최근 일본의 국영방송인 NHK는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대하드라마로 러일 전쟁 당시의 국가적 자존심을 부활시키려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 수탈 등 주변국의 고통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덮어버리고 있다. ,,,출처< metr>
2011년 9월 15일 (목) 블로거 '백세청풍님'과 함께 가을 속 더위를 정수리에 맞으며
역사의 고장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향한다.
<폐교가 된 송진포초등학교>
정오의 시간,
한낮은 여전히 콩포기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만큼 태양의 힘은 대단하여
우리가 도착한 송진포초등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끈적거리는 땀 훔치기에 바빴으며
학생이 없어 학교가 사라진 공터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본다.
1904년 8월 11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 430번지∼553번지 일대(송진포 국민학교)는 일본해군용지로 편입되었고, 송진포 주민들은 신촌, 궁농(森村) 마을로 강제이주 당했다. 일본해군비밀문서에는 "송진포 지역은 해군기지 설치에 따라 대한제국의 협조를 얻어 설치할 수 있었다. 이는 외부대신 조병직에게 이미 허락을 받았다. 이에 송진포 지역의 인민들은 당연히 철수해야 하며 보상에 대하여 대한제국에 있다" 고 적고 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빌미로 강제로 토지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이다.
풀숲에서 외로운 신사임당상은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고 말해주는 흔적이 되어버린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듯 하다..
<할머니와 백세청풍님과 두번째 만남>
송진포 7~14번지 김금선(88) 할머니댁으로 찾아 가서 인기척을 하자 문방틀이 내려 앉아
닫힌 문이 잘 열리지 않아 방문을 몇번이고 밀어젖히고 마루로 나온 할머니께서
"아이고 지난작에 와서 고맙거로 밭을 쫒아준 그 양반이네 이번에는 새댁이랑 같이 왔네 "
하고 반갑게 맞아 주신다 .
"새댁? 하하하 저는 새댁 아니고 헌댁입니다
송진포에 있었다는 '도고의 러일전쟁 승전기념비' 에 괸련하여
할머니께서 그 당시 생활했던 이야기가 듣고 싶어 함께 온 사람입니다."
라며 말문을 트니 할머니께서 '휴' 하고 한숨 내 쉬며 일제강점기때 송진포 마을의
내력을 들으려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면서
무겁고도 한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셨다.
뜻 밖에 듣게 된
김금선할머니의 슬픈 아리랑이야기
나 열일곱살에 건강한 천희라고 보국대(정신대)로 뽑히가 끌려 가게 되었제
동네에서 첫번째로 끌려갈 판국이었는데 울아부지,어무이랑 가족들이 초상난거 맹키로 울고불고 난리가 났제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몬할끼라꼬.
나 말고도 또래 동네 천희들은 다 끌려 가게 되었던기라 칠천도,송진포,하청,시방,이물섬 천희들까지도
날마다 보국대 갈 훈련을 받고 끌려 갈 날짜는 꼬박꼬박 다가오고 청천벽력이었는기라
그런데 용케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 있었제 시집간다고 날만 받아 놓으면 안잡히 간다꼬 동네 이장이 말해주었고
울아부지는 당장에 소문을 내서 신랑감을 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데서 잘 생긴 총각이 급하게 장가들겠다고
나타났제 그래서 며칠만에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듯 시집을 간기라.
열일곱살에 칠천도에서 나룻배를 타고 송진포로 시집 와서 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서방은 총각이 아이고 유부남이었던기라
본처와 본처소생의 아들이 진주에 살고 있었제 팍 속아삔기라 인물좋고 글 좋은 .서방은 서른한살 되던 해에 우리집 재산인 소를 몰고 나가 3,000원에 팔아가 어데로 가더마는 통 안오는기라 지질하게도 궁상시런 내 팔자제 바람같은 서방은 내 식구가 아니었제 하기사 나라도 책임못진 백성이었는데 그깐 바람같은 남정네야 말할 필요도 없것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꼬 그 말이 딱 맞는기라.
슬프디 슬픈 내 운명이었제
우쨋거나 살아야 하는기라고 함티장사며 별별일을 다 해가
아들 셋 공부시키서 혼인시키고 안 그랬나 .
. 내 친구들은 일본으로 마이 끌리가가 몬 돌아온 친구들도 있고 몸 버리고 망가져서
돌아 온 친구들에게 일본에 갔던 이바구 좀 들리도라쿠모 성(화)을 내고는 입을 다물어삐는기라
하기사 수치스런 이바구 하고잡것나
절대로 몬하제
송진포랑 하청쪽에도 보국대 갔다 온 천희들 많았는데 다 입을 다물고 살다가 죽기도 하고
아직 살아있는 할마시들도 제법 있는기라 말로 안해서 그렇제"
요근방(근처)에 살던 할매도 보국대에 갔다 온 할매였는데 자꾸 나가(치매)는
병에 걸리가 지금은 부산 아들네에 안 있나 "
듣다 보니 참으로 슬픈 거제도아리랑이 아닌가?
우리는 할머니로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이곳 송진포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할머니가 들려 주신 당시이야기로 거슬러 올라 가 보면
1904년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찔러 러일전쟁에서 크게 승리로 이끈 일본의 해전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의 전승기념비가 하필이면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세워졌던 것이다.
거제시 가조도의 작은 섬 취도에 또 하나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머니께 도고의 승전비에 대해서 아는냐고 묻자
평화(해방)가 되자 화가 난 사람들이 도고 승전기념비 탑에 달려 들어 깨뜨리려고 용을 써 보았지만
부셔지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미해군 공병들을 불러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쓰러뜨렸는데
너무 단단히여 처음에는 벼락치는 소리만 내고 끄덕도 하지 않아 두번째 폭약을 설치하여
겨우 넘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실감나게 해 주신다.
왜놈들은 물조차 못먹게 막아 답답골로 간간히 흘러 내리는 물같지도 않는 물을 먹으며
그조차도 부족하여 구정물을 마시며 짐승처럼
살았다며 당시를 생각하니 울컥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기구했던 운명을 이야기하다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일제강점기의 송진포는 도고의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었으며 러일전쟁 승리 기념일에는 대단한 행사가 진행되었다고도 한다.
물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도고' 제독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로
거제시의 동원된 각급학교 학생,기관장, 지방 유지및 통영의
기관장들과 유지들조차 이곳으로 소집되어 참석하는 대단한 행사가 거행된 곳이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철저한 준비가 바로 남해안의 거제도를 해군전진기지로
이용하려고 을사보호조약(1905) 훨씬 이전인 1903년 9월30일 이미 '송진포방비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거제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였다..
남아 있는 도고 동상 하단부
측면길이60cm
높이160cm라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백세청풍님께서 재어보니
가로 세로 1m 40cm 높이 1m 90cm 으로 상단과 측면은 파손되어 있었다.
이제 나즈막한 송진포 뒷산으로 도고의 전승비가 세워져 있었다는 곳으로 올라간다.
<도고 승전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던 곳>
며칠전 이 곳에 와서 우거진 숲으로 인해 확인하기 어려웠다며 오늘은 아예 김금선할머니께 낫을 빌려 와서
숲을 말끔하게 베어낸다
오래 된 역사는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방치되어 사라지게 될까?
미해군 공병대의 힘을 빌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폭발시킨 ... 두 개의 구멍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다이너마이트로도 단번에 쓰러뜨리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게 세워진 구조물이었다는데
우거진 숲을 말끔하게 베어내고 보니
거대한 구조물들이 세곳으로 나뉘어 나자빠져 있다.
나가 떨어진 구조물들
이곳에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도고의 승전비가 50m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니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러일 전쟁 후 도고 제독이 남긴 말
"일본이 도자기나 만드는 야만국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긴 것을 보고서야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다"라는 영국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일본의 러일전쟁 숭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가게 되었다.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어떤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적인 전쟁 영웅 도고 제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본 해군 소장 가와다 이사오가 쓴 "포탄을 뚫고"라는 책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당시의 조선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장군이었고 충성심과 전술전략 운영 능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전술을 금방 잊어 버리고 38년만에 병자호란을 다시 당했다.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일본에서는 그를 존경하여 메이지(明治) 시기 신식 해군이 창설되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
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19세기 말 일본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전술전략"이라는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8년간이나 영국에서 넬슨 장군을 연구하였던 도고 제독의 우상은 언제나 이순신 장군이었다.
러일전쟁 승전 후 도고 제독이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있을 즈음, 미국 해군사관학교 4학년 임관 후보생들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도고 제독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 도고 제독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입니다"
영국의 넬슨 정도만 알던 미국 사관 생도들은 이순신이 누구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러시아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톡 항으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진해 앞 바다의 일본 함대는 진해만에서 대한해협 방면으로 마중을 나가 아직 잠이 덜 깬 발틱함대를 기습하여 격파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큰 전투 경험이 없었던 일본의 병사들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런데, 이 때 도고 총사령관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는데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대부분의 일본 군함에서 간단하지만 엄숙한 신사참배가 있었다. 갑판 위에 자그마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일제히 승전을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때에 제단에 모셔진 신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일본 해군들은 자기네들이 전쟁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원했다. 공교롭게도 이 예식이 행해지던 해역은 그 옛날 일본인 조상들이 무더기로 수장되었던 바로 그 남해 바다였다.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지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혼령이 일본 사람의 존경과 기도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도, 어쨌든 일본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고 그 승리는 일본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러일 전쟁 후 도고 제독이 남긴 말|작성자 애늙은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폭발시켜 날아가버린 구조물들
백세청풍님께서 낫으로 우거진 숲을 말끔하게 정리하자
검색창에서 확인 한 도고 승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을법한 풍경이 사실로 드러난다.
1931년 5월 초부터 부산죽본조(釜山竹本組) 공장에서 기념비를 제작하여 진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죽본조에서는 석공 10명이 진해로 출장하여 진해산 석재로 기념비를 제작하고 5월 23일
진해에서 출발하여 송진포로 선박을 이용하여 기념비를 운반하여 이 곳에 세웠다.
산을 내려와 다시 찾아간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사람의 정이 그리운 할머니가
자꾸만 붙잡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자들이 아닐까?
우리는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곧잘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제 도고의 승전 기념비가 숨어 있다는 거제 시청 문서보관창고로 간다.
<푸른 천막을 덮어 놓은 도고 승전기념비>
우리를 시청 사회복지과 문서창고로 안내한 두 분의 시청관계자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안내를 해 주며 요즘 거제시가 김백일장군 동상 문제로 곤욕을 치뤄고 있는중이라
자신도 모르게 민감해진다고 하여 오히려 미안해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그제서야 웃으며 코믹한 이야기를 해 주며 긴장을 풀었다
"죽은자가 산자를 이긴 이야기로 유명한 도고 승전비" 라고 ..
한줄의 뜻은
오래전 ,죽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거제군수(이봉목)를 사표쓰게 한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이 승전비를 보니 몇년 전 옛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지안 현 퉁거우)의 동쪽인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편에 세워져 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부르는 거대한 비석 앞에 섰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고의 승전기념비는 광개토대왕비에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차이로 초라하게 보일테지만 일본이 욕심내는
국보급으로 기회가 되면 되찾아가려고 무진장 공을 들이는 특별한 돌덩이다.
이런 시기에 일본열도와 맞바꾸자고 당당하게 제의해도 좋으리
그동안 피박받은 세월의 보상과 함께라면 ...
더불어 광개토대왕비는 또 얼마나 탐내고 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몇년전 일본 취재진이 거제시청으로 도고 승전기념비의 취재를 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며 시청관계자가 알려
주기도 하였는데.
혹시 일본인과 동행 취재 온것 아니냐며
조크를 날리기도 하였다.
도고 승전 기념비에 새겨진 친필
接敵艦見之警報聯合
艦隊欲直出動擊滅之
本日天氣晴朗波高
平八郞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린다.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멸하고자 한다.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다.
일본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물리치고 이순신, 영국의 넬슨제독과 함께 일약 세계적인 해군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헤이아지로’ 가 과거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일본 정치권의 우매한 희생양이 될 조짐이다.
“임란 주요해전의 중심에 왜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취도 위령비는 제거돼야 한다.” “도고비석의 모조품을 만들어 고현사거리에 두고 시민은 물론 국민이 밟고 지나가는 행사를 벌이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도고헤이아지로’의 기념비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는 거제시민들은 ‘도고비’ 를 일제잔제청산을 위한 기념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고 헤이아지로’ ,거제를 발판으로 러시아를 물리쳐 전승의 역사를 알리는 영웅이 됐지만 그 이후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의 역사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하며 군신으로 신사에 올려진 ‘도고헤이아지로’ 가 사후에 경남도지사를 국민 앞에 사죄시키고 거제군수를 혼 줄나게 한 일이 있었다. 도고기념비 복원 계획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1905년 2월 22일 러일전쟁 당시 도고는 함대 42척과 병사 3천500명을 거느리고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해 5월 27일 도고는 러시아 해군 사령관 ‘마카로후’ 가 이끄는 무적 발틱함대를(37척과 3천명) 대한해협에서 전멸시킨다.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려 즉시 출동해 적을 격멸하고자 하니 오늘 날씨는 맑고 파도는 높다’ 1932년 송진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본국에서 도고의 친필을 받아 송진포에 세운 기념비를 세웠고 비문의 내용은 도고가 러시아 함대를 물리치기 위해 출전했던 당시 출전문이다.
이 비는 높이 160, 폭 60㎝ 크기로 장목 송진포 초등학교 뒤 100m 지점에 세워졌으나 1947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에 따라 해군사령부에 의해 제거됐었다.
장목 지서 앞 돌 다리로 사용
도고의 비는 해군사령부에서 제거한 이후 방치돼 한동안 행방을 몰랐다.
지난 1970년 향토자료 조사차 거제에 왔던 동아대 김동호 교수가 장목 해동병원 김종석 원장과 도고비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김 교수와 김 원장은 우연찮게 장목지서 앞을 지나다 돌다리로 사용되고 있는 징금다리가 비석과 같이 생겨 거울로 비춰보고 도고 기념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찮은 돌 비석 하나가 결국 당시 거제군수를 사표까지 쓰게 만드는 것으로 기록돼있다.
김동호 교수는 거제경찰서장에게 치욕적인 문화유산도 문화재가 될 수 있는데 돌다리로 사용해서 되겠느냐고 말했고 당시 서장은 장목지서장에게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 교수가 야단이니 비석을 경찰서로 옮겨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도고 비석은 두 동강이가 난 채로 거제시청 뒤편 창고에 보관돼있다.
도고 기념비는 경찰서장의 꾸중을 들은 장목지서에서 돌다리 때문에 욕을 먹게됐다 며 돌다리를 옮기는 과정에 마구 다루다가 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서로 옮겨진 이 비석은 여러 신문과 방송, 잡지에 보도됐고 일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아대 김동호 교수는 일본 사가현 혜월사에 있던 하청복사종을 도고 기념비와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일본측은 이미 동종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엉뚱한 도고 성역화 사업
치욕의 산물인 도고 기념비가 1981년 들어 엉뚱하게도 성역화 사업으로 추진된다. 그것도 전두환 대통령까지 복원을 결정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다.
출처, 거제도 향토사 연구 ...전갑생
거제의 역사, 일제강점기 41년 잃어버린 역사를 돌아보며...
'거제도 한 바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아름다운 일에 우리 함께 동참해요. (0) | 2011.10.12 |
---|---|
그리움의 계절, 가을愛 (0) | 2011.09.26 |
가을 햇살이 , 가을 우체국 앞에서... (0) | 2011.09.15 |
'바람의 언덕'에 가을이 오면 (0) | 2011.08.31 |
휴전을 지연시킨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 포로수용소' (0) | 2011.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