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휴전을 지연시킨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바구아지매 2011. 8. 30. 17:33

 

 

.

 

28855

 

 

 

 

그러니까 이미 지나간 시간, 정확히 따져본다면 8월 14일경의 추억이야기라고 해야겠군요.

먼 나라 오만에서 오신 '오만과 편견'님과 함께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돌아 본 날의 이야기입니다

빨강머리 앤 오만에서 오신 귀한 손님께 거제도포로수용소 존재의   의미를   야무지게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오늘은 함께 한 날의 소중한 시간을 돌아보며  전쟁의 상처가 할퀴고 지나 간 아픈 우리역사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거제도포로수용소 이야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경상남도 거제시 시청로  302번지에 소재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입구 매표소에서 동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반공 역사의 교육장 으로 알려진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동쪽에 자리잡은   '흥남철수작전 (1,4후퇴 )기념조형물을 만나 봅니다.

흥남부두에서 메레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자유를 찾아 남으로남으로 피란길에 오르는 풍경입니다.

영하 40~50도를 오르내린 흥남부두에서 엄마를 떨어지지 않겠다고 조막손으로 포대기를 꼭 잡은 금순이가 눈에 뜁니다.

 

 

기적의 배로 알려 진 '메러디스 빅토리호'로 올라 간 두 젊은이는 

  사다리를 타고 배로 기어 오르는 피란민들의 손을 잡아 주는

실제상황을  재현 해 보기도 합니다 .

리얼하게 조형물을 만든이를 극찬하는 오만과 편견님

"정말 휼륭해 잘 만들었어 기막히게 잘 만든 작품이야 표정도 아주 진지하고..."

라며 연방 감탄합니다.

 

 

 

빨강머리 앤, 피란길에 엄마의 손을 놓치고 그만  겁나서  울고 맙니다 .

피란길에서  만난  친절한 오만과 편견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며  슬픔을  달래 줍니다.

 

전쟁은 지옥같은 두려움이며 ,  슬픔이고  배고픔입니다 .

물론 우리는 전쟁의 실상을 겪어보지 못한 전후세대들인지라  전쟁의 고통을 직접 피부로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반복된 교육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부모,형제,일가 친척들을 통하거나  혹은

피란을 온 후 마땅히 갈곳이 없어 ' 마당 깊은 집'에 모여 함께 살게 된  가족같은

그들이 들려 준 전쟁이야기는 눈앞에서 본듯 그려지기도 하였습니다.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360만평  규모에  들어선 거제도포로수용소 당시의 모습을   조형물로 재현 해 놓았으며

영상으로도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

세계는 대한민국은 잘 몰라도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들먹이면 '아하'  라며 고개 끄덕인다고 합니다.

대규모의 <수용소군도>가 있었던 거제도.

 

거제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 국민들도 그저 중국군 포로와 인민군 포로를 수용했던 곳으로만

알고 있을 뿐 거제도가 또 다른 전쟁터였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지 못하고 있어

포로수용소가 어떻게 세워졌고 포로들은 어떻게 생활하였는지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거제도는 몇년간  전쟁포로와 피란민등을  수용하는<수용소군도>로 바뀐 적이 있었습니다 .

1950년 11월<알바니작전> 으로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처음에는 약250만평의 광대한 농토와 임야 , 3,000여 호의 주택을 사전 통고나

 어떠한 보상도 없이 징발하여 건설하였습니다.

거제도민 고현,수월지구 주민들은 포로수용소 건설로   소개민이 되어 고향을 떠난 아픔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당시 거제도의 또 다른 비극을 다룬  이야기는 거제도 출신  작가 손영목의 소설'거제도'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게되면    포로들에게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내어 주고 소개민이 되어 떠나야했던 

  이곳 사람들의  슬픔 또한  생각 해 보는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것입니다.

 

한국전쟁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가 대신하였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대구효성초등학교,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중국군의 전쟁참가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포로가 크게 늘자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최적지로  거제도가 결정되었으며

1951년1월 27일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인민군과 중국군은 1951년 1월부터 거제도에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장평,와치,용산,문동,양정 일대와 수월, 해명, 연초면 임전, 송정리,남부면 저구리,다대마을 등에 설치되었습니다.

수용소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4개의 구역으로 되어 있었고 각 구역은 8개의 수용소로 갈라져 있었으며  한 수용소에  6,000여

명의 포로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포로의 수는 북한군 156,000명 중국 20,000명 여자포로 3,000명등

모두 176,000 명을 수용하였습니다.

이 때 포로수용소의 규모를 100만평 더 늘려 360만평으로  되었습니다.

 

 

 

 

 

휴전을 지연시킨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포로수용소'

 

  거제도포로수용소 내부에서는 이념전쟁이  피비린내를 날리며 연일 일어났습니다 .

 처음부터 반공,친공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공포로,친공포로라는 성향으로 갈리면서  남북의 이념전쟁으로 격렬하게 치달았습니다.


 

포로들의 복장은 미 군복,군화,머자를 지급받고 옷의 등쪽이나 바지에 P' W 를 써서 포로임을 나타냈습니다.

1953년2월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과 곡물들이 소비되었으며 포로들은 1인당 635kg의 쌀을 배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생선,쇠고기 국,돼지고기국,소금에 절인 쇠고기,육고기와 야채류,마른 계란이 지급되었습니다.

그 밖에 담배(1일 12개피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 모가스,디젤,땔감,석탄 등의 물품이 포로들에게 지급 되었으며

한 막사에 60명씩 수용되었습니다.

폭 50cm,깊이 30cm 의 복도를 설치했고, 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침실 막사를

 만들었으며.포로들은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고 ,6시 30분 집합 점호, 오전 11시 30분

 점심 식사, 오후 1시 작업, 오후 4시 일과 종료,5시 저녁 식사,

오후 8시 소대별 점호 후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저녁 식사 후 8시에서 3시간동안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으며 포로수용소 내의 행정업무와

사무들을 자체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행정 사무처리 막사, 야전 병원, 방송 막사,

전화교환 막사, 우편처리, 전기 시설 막사 등의 시설도 있었습니다.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인간적인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사회로 나갈 경우를 대비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기술을 익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재봉틀로 바느질하는 법은 물론이고.

 

 

 

막사에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가 함께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립이 심각 해  그들 사이의 알력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휴전 협정은  1951년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되었지만  포로분류 심사과정에서 포로들의 유혈폭동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휴전협정을 시작한지 만 2년의 시간을 끌다가  1953년 7월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이후 8월 5일 희망 포로를 교환하고 1953년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송환을 거부하던 

 포로들을 순조롭게 송환하면서 포로수용소는 그 기능을 다하였습니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오판으로 우리민족의 비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광복 후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념차이로 1948년 남(南)과 북(北)에서 제각기 각각 정부를 세울때

남농북공(南農北工)의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이 말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을 함축한다.
북에는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즉 전력이 풍부한데다가 일제(日帝)가 남긴

공업생산시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실제로 그러한 이점을 활용해 한때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앞선 바 있고 6·25전쟁 전후복구사업에서도 남한을 앞질렀으며,

그래서 김일성은 1960년대 중반까지 남한에 대해 계속 공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에게 “이 밥과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주겠다.”고도 장담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의 국민 총생산은 남한의 30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900달러정도로서 그들의 삶은 기아와 궁핍 그자체가 되고 말았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하루 두끼먹기’가 일상화 되었고, ‘衣’생활과 ‘住’생활은 아프리카 빈곤국 수준이다.

정치전문가인 브레진스키에 따르면, 김일성 독재체제는 단일 이데올로기, 단일권력체계, 단일정당과 폭력적 경찰기구, 독점적 언론매체를 갖고 여기에 더하여 이 모두를 관리하는 김일성 주체사상이 그것들 모두 위에 드높히 존재한다. 주체사상은 그 이론에 갖은 화장술을 다하여 치장했지만 요컨대 황당한 사이비 종교적 관념이다. <울산매일.  김동수 관세사 울산포럼 대표>

 

 

 

오만에서 오신 '오만과 편견'님,  거제토박이 '빨강머리 앤' , 그리고 제주도에서 오신 '해국'님...참으로 대단한  인연입니다

과연 지구촌의 우정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포로들이 일으킨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포로수용소를 이야기하며  흥분하기도 했으며.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며 두손 꼭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라고 노래 불러 보지만

과연 통일의 그날은 오기나 할지...

 

 

 

당시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무도회장

 

 

 

 

포로수용소의 흔적앞에서 우정의 손을 꼬옥 잡아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쇠사슬,  철조망으로 둘러진 이 땅의 비극.

 

 

 

 

 

 

미국 해군 소속의 군위관 Gerald A, Martin대위의 순직비 앞에서

 

1951년9월27일에 순직한   Gerald A, Martin 대위는 64야전 병원에서 근무한 군위관이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국땅에서 죽어간 젊은 군위관을  생각 해 보며   

 이 곳을 찾을때면 언제나 목이 메이고 먹먹해집니다.

 

휴전을 지연시킨 또 다른 전쟁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참고자료... 블루씨티 거제 09월호

 

좋은 사진 선물로 보내주신   해국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