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때때로 그 무게감이 버겁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먼저 가신 분의 빈 자리는 남은 이에게 큰 여운으로 남는다.
유승흠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에게 고 유일한 박사(유한양행 창업주)는 부친못지않게 강렬한 혈육애를 남겼다. 그는 유 박사의 조카다.
"세상을 살면서 배워야할 가치나 신념은 백부의 선행을 보면서 체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언제나 욕심을 줄이고 근면절약하라고 하셨죠."
#1. "의사가 돈 벌려고 하면 안 된다."64년, 유 이사장이 이제 갓 스물로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을 때다. 유 박사는 유 이사장과 남동생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로 불러 유한양행 주식 500주(당시 액면 500원)를 건네며 "엿 사먹지 말라" 농담했다.
이후 유한양행 주식 500주는 배당과 무상주를 안겨줬고 시가도 올랐지만 그는 단 1주도 팔지않고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그에겐 돈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있는 주식이다. 백부는 부친보다 무려 24살 위였다. 큰아버지라기보다는 사실상 할아버지 같았고, 유 박사 역시 그를 손자처럼 대했다.
유 박사는 그에게 "의사가 돈 벌려고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 돈이 우선시돼선 안 된다는 뜻에서였다. 요즘 성적이 우수한 청년들이 하나같이 의대에 목을 매는 게 유 이사장은 안쓰럽다.
"고액연봉을 받거나 안전한 길을 가겠다고 의사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임상의사는 머리보다 심장이 뛰어야 하고 학교성적보다는 낮밤,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환자를 끝까지 돌볼 수 있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직업인데 말이죠."
그가 의학과를 마치고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거제도로 내려가 1년간 자원봉사를 한 데는 백부의 영향이 컸다. 흙벽돌집에서 전기도 없이 지역사회 보건사업을 했지만, 그에겐 지금도 소중한 추억이다. 현장에서 얻은 문제의식이 연구에도 도움이 됐다. #2. "대동강 물도 먹을 만큼만 퍼라.""조부 때부터 기독교였고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셨기 때문에 근검절약 정신이 아주 강했어요. 조부는 대동강 물도 먹을 만큼만 퍼서 먹으라 하셨죠. 백부도 사업을 통해 거부가 되셨지만 단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았습니다."
경상도 예천 사나이였던 조부(고 유기연)는 스무살에 "성공하기 전엔 찾지 말라"며 괴나리봇짐을 들고 집을 나가 평양에 정착해 사업을 일궜다. 서북지역 항일독립운도 재정담당이었다. 요주의인물로 일제에 소위 찍히다 보니 평양에서 살지 못하고 제2의 고향을 등졌다.
"정신여학교 교사였던 큰 고모는 태극기를 수놓아 강을 건너 만주에 독립운동자금을 전해주셨다고 합니다. 만주에 학교도 세우셨는데 그게 일본 역사서적에 나와있더라고요."
#3. "회사돈 말고 내돈으로 기부하라."고 유일한 박사는 해방 전 미국 학업을 마치고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설립해 자금을 모은 후 귀국,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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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일한 박사 |
이후 유한양행이 번성하면서 유한학원을 설립하고 개인 주식을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환원에 힘썼다. 기업일선에서 은퇴할 때는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했다. 이외에도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해 기업 경영사의 미덕으로 남아있다.
젊은 시절 유 이사장은 이런 유 박사의 선행에 발품을 보탰다. 돈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종종 했던 것.
"당시 연세대 의대 학장이었던 김명선 선생이 회사에 돈 달라고 찾아와요. 그럼, 묻지도 않고 개인돈을 풀어 주시곤 했어요. 대체 무슨일인가 했는데 유학생들 여비지원금이었더라구요. 백부 장례식에 왠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제게 그러더군요. 50년대에 미국 유학갈 때 본인이 김명선 선생을 통해 유 박사에게 여비 100달러를 지원받아 갔다고요. 그 때 달러가 어딨고 100불이 얼마나 크고 귀한 돈이었습니까."
유 박사는 밥 한 끼를 사도 회사 돈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늘 개인 돈을 기부했다. 이 원칙은 유 이사장에게도 불문율이다. 사업가가 아닌 그는 백부처럼 큰 기부를 할 수 없지만 생활 속 작은 기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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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한국의료지원재단 출범식에서 홍보대사인 배우 황정음씨와 유승흠 이사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4. 대한민국 바퀴벌레 수가 줄어든 이유유 이사장이 유한재단 이사와 유한양행 비상근이사를 맡았던 80년대 후반의 얘기다. 바퀴벌레가 워낙 많았다. 유한양행이 바퀴벌레 잡는 컴배트를 수입판매하면 국민보건 향상에 일조할 수 있었지만 이사진들이 반대했다.
유 이사장은 이사진들을 한 명 한 명 설득해서 컴배트 수입을 관철시켰다. 유한양행의 수익에도 크게 기여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바퀴벌레를 없애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의 별명은 마당발이다. 의사치고는 드물게 사회생활을 폭넓게 했다. 예방의학 자체가 생활 속에서 사람사는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봐야 가능한 학문이란다. 고 장기려 박사가 사회복지법인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할때 유 이사장도 일조해 이사로 활동했다. 사회복지법인 한국재활재단도 창립때부터 참여해 장애우 복지향상에 힘을 보탰다.
#5. 1명의 거부보다 100만명이 기부해야이러다보니 의학계에서는 유 이사장이 지난 4월 출범한 한국의료지원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게되자 기대가 크다. 의료와 관련된 기부금을 끌어모으고 살뜰하게 관리하는데는 유 이사장이 적임자라는 목소리다. 그만큼 어깨도 무겁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한국의료지원재단은 국민성금을 모아 각각 복지와 저소득층 의료비지원에 배분한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료비지원위원회가 수혜자를 직접 심사해 배분하기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투명하게 볼 수 있다.
그는 백부처럼 큰 사업가가 아니다. 때문에 큰 돈을 기부할 재간은 없다. 하지만 나눔문화를 전파해 보다 큰 기부를 엮어나가겠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실제로 한국의료지원재단은 한명의 거액기부자보다 100만명의 소액기부자를 의료취약계층과 연결시켜주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유 이사장은 "내 돈이 누구에게 어떻게 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부의지가 그만큼 반감될 수 밖에 없다"며 "한국의료지원재단은 금융권 수수료를 제외한 전액을 의료비지원단체나 의료기관에 지원하고 지원내역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지원재단은 지정 모금기관이기 때문에 소득공제 혜택도 받을 수 있다. 개인의 경우 소득의 30% 안에서 기부를 하면 100%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