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 내 발자국(일기)

큰 숲 속 작은집에 소나기 내린다.

이바구아지매 2012. 5. 1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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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열나흘.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

뜬금없이  고향집이  물웅덩이로 나타나더니   물무늬 그리며 둥둥 떠 다닌다.

지금쯤 고향집  텃밭에는 밤꽃이 한창이겠지,?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의 꽃이라 불리는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을 거다.

감나무는  푸른  잎새사이로   초롱 같은 감꽃을 피우려고  야단법석들 났겠지.?

 오늘은 종일  비가 내린다니 차 타면 지척인  친정집으로  가 봐야겠다.

가서  엄마랑    동무들이  오순도순 모여  장작불  훨훨 태워  구들장 뜨끈하게 데워진  온돌방에 앉고 누워

세상이야기 나누는 모습 실컷 보고 와야겠다.

내가 가면  엄마는  딸을 보는 반가움은  꼭꼭 숨긴 채  바쁜데 왜 왔느냐고  엉뚱하게  놀라는 척   물을테고

나는   밤꽃 피고 감꽃 피는 모습 보고 싶어 왔노라며  능청을 떨겠지.

 

 

 

 

 

 

 

 

 

 

♣늙은엄마와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큰 숲속의 작은 집으로   달려 가 보기.

 

오래 전 옛날부터  할아버지,아버지 살아오신  고옥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지키고 사는 늙은 아낙네도 이제 쓸쓸하게 늙어버린 집의 붙박이가 되어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꽃같은 나이 열아홉 살에 시집와서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살아온 시간이  자그마치 예순해를 껑충 뛰어 넘어  일흔해로 가고 있다.

비를 맞아 축축한 기분이지만  푸른 동산 같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참새처럼  가볍다.

 

 

 

 

 

 

 

 

 

 

 

너른 동산하나 성큼  다 들여  놓은 집 .

열 집,스무 집,서른 집이 살아도  비좁지 않을 품 너른 집

그 터에 푸르름이 무성하다.

감나무 ,대나무,  밤나무 배나무가 어우러진 그터에  들풀조차  키를 키우니

늙은 엄마 저 너른 집터를 언제 다 호미질 할까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질로 산사태처럼 밀려드는 초록풀들 어찌 감당할까?

차라리 무성한 푸른 풀밭으로 그냥 두고  풀밭사이로 작은  소롯길을  내는 편이 훨씬  낫겠다.

 

 

 

 

바라 만보아도  한숨나는 풀밭투성이에 햇살 좋은 날,혹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 스멀스멀 풀벌레들 기겠다

뱀도 나와 놀고  지렁이도 나와 놀겠다.

개미도  나와  층층히 집  짓겠다.

감나무는 더 키를 키우고

대나무는  대숲으로 우거져 동산에서 내려 온 나무들과 경계조차 무너뜨리고 함께 출렁이며 어우러지겠다.

밤이 깊어 사물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면   도깨비도 나와 한바탕 꽹과리 치며 놀겠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사그락거리는  댓잎사이로 소복한 여인이 밤마슬 나와 한바탕 춤을 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무조건 좋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터 

고향이란 이름표를 단 집.

 

 

 

 

 

 

해마다 요맘때면  남새밭의 마늘은 오월의  바람에  남실대고,

심지도  않았지만 용케도 끼어들어  뿌리내려  꽃을  피운   새빨간 양귀비꽃 몇 송이 마늘밭에서 붉은 토악질을  해대고

 마늘 냄새 풀풀 날아 오르면  발정난 고양이들 참지 못하고  짝짓기로 즐기는  오월의  마늘밭은  찬란한 햇살의 풍요다.  

 

 

 

 

 

 

 

 

 

 

 

 

 

 

 

늙은 엄마  힘들게 대나무 쪼개서  지렛대로 받쳐  세운 고춧대  초여름이면  하얗게 고추꽃도 피우겠다.

 고추모와  기대 세운 지렛대를  보니 마치 도열하는 군인들 같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몇 백 년이나 된 돌감나무 베어냈지만  뭉텅해진  그루터기에서 생명의 새싹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고

키를 키운 감나무도 푸르게 푸르게  마늘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성한 풀이 지겨워서  아예 비닐로 땅을  덮어버렸다

흙도 숨을 쉬어야할 텐데 비닐 속으로 갇힌 흙속의 풀씨들은 다 압사하고 말았을까?

그것도 부족하여 제초제로 흙을 휘이훠이 섞어버렸을까?

그렇더라도 뜨거운 여름날 강한 생명력을 가진 풀들은  비닐 속에서 조차 고개 내밀려고 발악할테지.

 

 

 

 

 

 

 

골목길을 따라 돌아 비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 서서  엄마를 불러 본다

"엄마, 나 왔어 작은 딸이 왔다구  비랑같이 ... 방에  있어 ? 문 열어 봐요 "

아무런 기척이 없다.마루 밑 축담 위에 함부로 벗어놓은 시퍼러둥둥한  슬리퍼가  무척 심심해보인다.

아아  엄마는 외출하는 신발로  갈아  신고 동네 마을회관으로 마슬을 가셨나보다  .

 벽에 걸린 거울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여인이  말똥하게 내다 본다.

그리고  그녀가 말해준다

"이집에서 살았던 착한  소녀는  오래전 이  집을 떠나갔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녀도 나이를   먹어 아마  중년의 여인이 되었을게요  꼭 당신처럼..."

하고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제법 그럴듯하게  들려준다.

비를 맞고 늘어진 꽃밭가의 함박꽃이 고개 무거워서  스러지는 찰나. 

"엄마." 하고 한 번  더 불러보다   방문 열어보니  얇은 꽃이불 하나가  온 방을 지키고 있다.

곧 유월이 되면  꽃밭가는 예전처럼  해당화꽃 활짝 피어나서  집을 에워싸고,  동산을 따라

내달리던 찔레꽃, 아카시꽃이 딸기꽃과, 인동덩굴과 어울려 꽃향기가 풀풀 날고,   꿀벌 윙윙 날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아다니면  큰 숲 속의 작은 집은   초원의 집이 되고 말겠지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오래 전 이 마을로 시집 온 그녀들은 함께 늙어간다.

 

 

 

 

 

 

 

나이를 물어 무엇하리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데  사는 동안   형제처럼 정 나누고  삽시다

사돈이란 격식같은건  이제  따지지 맙시다

사위,며느리는  다  내가 낳은 아들,딸 아니것소

그렇게  이웃되어  살아가는 엄마들의 허물없던 합창

 

어버이날 찾아가서  마당으로 불러 세워 멋진 포즈 잡아보라니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비를 흠뻑 맞으며 감꽃이 피려고  용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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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이 활짝 피어나 비를 머금는 시간

초록지붕이었다 빨강지붕으로  바뀐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고향집

흙빛도 빨강이어서 .감자,고구마, 옥수수가 무척이나  달고 고소했던 땅.

 

 

 

 

 

 

이 작은 마을로 언젠가부터  객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낯선 얼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고,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생겨나서 한 동안 마을 어른들은

그 이상한  행동에 적응하느라  무척  화나고  힘들었을 것이다.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고향은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마을로 찾아든 젊은 그들은 조선소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할 때까지 이마을사람으로 살아간다.. 

비를 맞으며 마을로 찾아 든 '빨강머리 앤' 이미 오래 전  마을을 떠났으니 알턱이 없어 우리는  인사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조선소에 다니는 남자는 바깥일을  하지 못하는  비요일이라  낮부터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가보다.

 

엄마 없는 집을  나와  소나기와 함께  발길을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