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군 '위안부' 의 진실

이바구아지매 2012. 9. 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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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시민모임  창립 10주년을 맞아

"평화인권문화제"- 다가가기 10주년 발자취 담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촉구하는

창립 10주년 평화인권문화제가  8월 31일 ,9월 1일  이틀간에 걸쳐 

경남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열렸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의를 향하는  열 걸음  다가가기 ,라는 주제로 

  생존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95세)가 참석한 가운데  통영거제시민모임(대표 송도자)이 주최하고 통영시가

 후원하는  행사로 ,

이날 행사에는 일본 정부에 전하는 

 탄원엽서전 추모비 건립모금 전달식,축하공연,영화상영  1인 펼침막전,통영거제시민모임 사진전 , 희망발언전  등이 펼쳐졌습니다.

시민모임은 또 일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문화제에 참석한 학생, 시민 등과 함께 통영 항일운동 역사길 다가가기 행사로 강구안-통영우체국-부도시장(중앙시장)통영청년회관-허장완 열사 묘소 구간을 걸으며 잊혀져가는 역사를 찾아가는  의미로운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여고생들에 의지하여  행사 첫날에 참석한 김 할머니는

"내 살아 생전 꼭 사과받고 싶다'

고 말해 행사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뜻깊은 행사에 참가한  빨강머리 앤 ,

지난 8월 15일  일본군 '위안부' 에 관련한 포스팅을 한차례 한 적이 있었지만

다시 한번   꼼꼼하게 다뤄   보고 싶습니디.

이번 포스팅은  일본군 위안부로 가장 많이 끌려 간 지역으로 알려 진   통영에서 이야기를 시작 해 보렵니다.

 

 

 

 

 

통영,거제시민모임 창립10주년을 맞아 ,

10년 동안 활동을 돌아보며 피해자들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함께 해 온 시간들을 공유하여 시민,학생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 나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위해 시민,학생 모두가 더욱 힘찬 발걸음 내딛는 장으로 개최한다는데 의의를 두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1992년 1월 8일,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인   '수요집회'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에 위치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를  행진하며

일본정부가 위안부 존재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때부터였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하마트면 흐지부지 역사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게 된 때는  1990년 네덜란드 얀 할머니에 의해서였습니다.

 얀 할머니는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속에 자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최초로 세상에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

그녀의  용기에 힘입어    일본군 '위안부' 최대 피해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할머니들의 '모임인 '수요집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수요집회는  점차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호응을  얻으며  힘이 실려  지방 소도시인 통영,거제에서도 

시민,학생,청소년등이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통영항,  강구안입니다.

 

 

오래 전  통영,거제의 17~18세

소녀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간 한 맺힌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돈을 잘 벌게 해 주겠다고 꼬드겼으며  인신매매를 일삼는등, 심지어

  그물공장에서 (북신동  조선 저망 주식회사 작업실)

일하고 있던  소녀들을 급습하여  강제로 끌어 갔으며

 빨래하러 가던 14살 소녀도  붙잡아 간  야만적인  일본군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통영 북신동의 그물공장과 통영항

 

 

 

통영의 딸,

김복득할머니 이야기 ...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랜시간 노력하며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김복득할머니(95)

 

그녀의 비극을 돌아보다.

 

18살 어느 날,

거제 옥포에  살고 있는 고모집에  가려고 배를 타러 가던 중  길에서 만난  한 남자가 

  돈을 잘 버는 곳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꼬드겨서  순진하게도 그만  꼬임에 빠져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중국을  거쳐  달려 간  곳이 

 필리핀의  위안소였으며 그곳에서

  지옥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후미코'로 불린 김할머니는  하루에 적게는 열 명, 많게는  수십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위안소로 끌려 온 대부분은 조선여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지옥같은 위안소 생활에서 도망치다 잡히면 당장 총살을

당했던  당시의 끔찍했던 위안부 생활은

훗날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경남도교육청에서 책으로 엮어 경남의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된다고 합니다.

김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로 끌려 가서 오랜 시간 성노예로 고통받고 있던 중  

 한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간신히 삐져니와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  고향으로 운좋게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향집에는    따뜻하게  맞아 줄 아무도 없었으며

 쑥대밭이 되어버린 고향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전이었고  남동생 역시 징집되어 

일본으로  끌려 간 후였다고 합니다.

 

김할머니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나

식민지 조국인 일제치하의 암울한 분위기였지만 그렇더라도  위인부로 끌려 가기 전까지는  

  단란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받으며 예쁜소녀로 자란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김할머니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조국의 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흐르는 시간속인 2012년 08월 31일 강구안에  서 계십니다.

겨우 찾은 조국의  광복은  곧  동족상잔의 아픔  6,25전쟁을 경험하였으며 

휴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등 격동의 시간을 따라 흐르는 강물처럼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써내려간 역사의 기록자이기도 합니다.

 

 

 

 

 

 

김복득할머니와 통영여고생의 아름다운 동행

 

어린소녀조차  지켜주지 못한 못난 조국이었지만, 버릴 수 없는 내 조국,내 고향이었기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악몽과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누구도 해결 해 주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인권문제를 

일본정부와  당당히 맞서 해결 하려고   끝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할머니께서는  1994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신고한 후 명예회복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2004 년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가하여 일본정부에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하였으며

2007년에는 가해자인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 평화의회를  주관하는자리에서

교류회를 통해 피눈물의 증언을 하였으며

.2008년에는 경남여성인권대회에서 전시성폭력분과에서 증언강연을 하였고,

2010년 11월 25일 동경에서 경남도민탄원엽서와 경남지방의회 14곳에서 채택된

결의문 및 50만서명지를 한국,'위안부' 피해자 대표로 일본내각과 의회에 직접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할머니는 의자에서 일어서 정중하게 절하며

"나  죽기 전에 해방을 볼 수 있게 해 달라 "

고 피해자 발언을 하였습니다.

다음 날 오사카로 가서 간사이지부대회에서'위안부' 문제해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단체, 시민들과

함께 증언집회와 교류활동을 가졌으며, 통영거제지역  피해자 여섯분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영상'소망'을 본  

집회장은 눈물바다가 되었으며 한 일본 남자는 무릎을 꿇고 할머니께 눈물의 사죄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 결의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2011년  강구안에서 진행된 1000차 수요집회기념 1000통영,거제시민 정의의 인간띠잇기에 

참석하여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말로 다 못해요  그만큼 했으면 이제 해줄만도 한데,,,

내 죽기 전에  사죄 받으면 이 자리에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건데..."

하고 눈물 글썽이며 피해자 발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김할머니는 또 외로운 자신을  찾아와서 말벗이 되어준 통영여고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평생 모은  2,000만원의   장학금을 내 놓기도 하였습니다.

 

 

 

어린소녀가 흘린  피눈물은  누가 닦아   줄까요?

 

힘 없는 조국은  일본이 강제로 맺은  불평등조약인 '을사늑약'이  (1905)체결됨과 동시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조국의  비극은  어린 소녀들에게까지 미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가 성노리개로  희생되었으며  그 고통과 악몽의 상처는 오늘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용기있는 고백...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

라고 당당히 밝힌 그녀,

 일본으로부터  공식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으로 찾아 가서 수요집회에 참가하는등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 해 주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개인의 자격으로 

  명예회복을 위해 끝임없이  노력하며  오늘까지   온 집념의 '통영의 딸'  김복득할머니,

할머니, 당신의 용기가 자랑스럽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1000 인긴띠잇기1인펼침막전

 

 

 

 

 

열일곱,열여덟 고왔던 소녀들은 이제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혹은  살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어린 딸들이 끌려 가서 당해야 했던 고통과 수모들 ,조국이 지켜주지 못한 어린 소녀들의

한맺힌 눈물이 여러분, 보이시나요?

 

 

 

 

민중의 소리 ...

 

통영고 2학년 박도건(민중의 소리, 역사모임 '도화지 ' 회원으로 활동) 

 위안부 할머니들의 추모 행사에 참여하여  엽서쓰기,추모 기념비 및 위안부 소녀상 건립 모금을 위한  활동을

8월25일부터 진행 해 오고 있다며  참여동기를 분명하게 밝힌 멋진 남학생이었습니다.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다 하루빨리 반성하라 ...'

이 한마디가 가슴 먹먹하게 합니다.

남학생들의 이 한마디가 세상을 바꿔 놓을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내가 참여하는 이 일은 오늘 꼭 해야 하는 역사적인 일입니다"

통영고 2학년 김광민 ('도화지' 경상지역의  회원)

  역사의식이 뚜렷한  아름다운 열덟살  남학생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용어

 

현재 한국 관계법령에는 일본군 위안소에 연행되어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강구안 문화마당의  풍경~ 우리들의 사랑하는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는 사람이 아닌 군수품으로 취급되었다죠?

 

 

 

 

 

이날,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지긴 했지만  그닥  뜨거운 호응은 못되었습니다.

 

 

 

 

 

 

이 일의 주체가 되어 열심히 참여하는  여학생들의 분주한 모습입니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손글씨로 정성들여 쓴  위안부 할머니들께 드리는 편지글과  일본으로 보낼  탄원엽서들.

 

 

 

 

 

 

 

 

Justice...정의

 

 

 

 

"할머니, 당신의 용기가 자랑스럽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밝히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녀들의 참여, 통영,거제의 젊은 힘입니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수요집회가 일본 정부에 요구한 일곱가지

 

하나 , 전쟁범죄 인정

둘, 진상규명

셋, 공식사죄

넷, 법적배상

다섯 , 전범자 처벌

여섯, 역사교과서에 기록

일곱, 추모비와 사료관건립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교과서에 바르게 기록하라.

 

 

 

 

 

두타사 지용스님과 두타사 합창단의 모습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0년동안 노력한  통영,거제시민모임 (대표 송도자)

 

 

 

 

 

 

 

 

 

 

 

 

 

 

 

 

 

 

강구안 문화마당을 취재하는 학생기자  가나양입니다.

 

 

 

 

 

 

 

 

 

 

 

 

일본으로   보낼 탄원엽서들

 

 

 

 

 

사물놀이  추임새 (통영고등학교 국악동아리)

 

 

 

 

 "나 살아생전  꼭 사과받고 싶다"

라는  한맺힌 한마디뿐   목이 메여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   김복득 할머니, 

함께한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살풀이 춤  김정희 (중요무형문화제제21호 승전무전수조교)

 

 

 

 

 

일본군 '위안부' 는  사람이 아닌  군수품으로 분류되었으며

가장 많은 '위안부' 피해자를 낸   한국과 , 중국,타이완,필리핀,태국,베트남,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소녀들은 이제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삶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똑똑누군가가 말하더군요

세계 곳곳에 일본군 '위안부'소녀상을  세워서 반성할줄 모르는  일본인이라면

 고개를  들고 지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구요.

 


 

 

 
1945년 8월 8일 버마 랑군에서 연합군 장교와 인터뷰 중인 중국인 위안부의 모습

 

위안부(한자慰安婦, 일본어: 慰安婦 (いあんふ)) 또는 일본군 성노예(영어: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Comfort Women)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에 징용 또는 납치, 매매되어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

위안부의 대부분은 일본인조선인이었으며 중국인과 타이완인 등도 징발되었다. 그 밖에 필리핀태국, 베트남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용되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에 세계 최초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고 있던 얀 할머니는 KBS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왔다는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얀 할머니의 고백 이후 엘른 판 더 플루흐 할머니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했다. [1]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94년 8월 31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총리)이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담화를 낸 바 있다.[2] 또한 1996년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3] 아울러 이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나 양국간 각종 조약(한일기본조약 등)으로 법적으로 해결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4] 한편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미군을 위해 위안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5][6]

이에 대해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 본인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시위를 개최하고 있다."<위키백과>

 

 

 

 

 

 

 

"한국은 지금보다 더 많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듬어라"

2007년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주도 일본계 3세 마이크 혼다 의원

"일본 정부의 사과가 필요한 이유는 그로 인해 ‘어머니, 친척, 여성, 여자 형제에게 폭력을 저지르지 마라’고 가르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다르푸르, 보스니아, 동티모르 등에서는 전쟁 중에 많은 여성이 성적학대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후세에게 다시는 이러한 만행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 상처로 남아 괴롭히는  무거운 짐 함께 지고 나가자는

창원 토월고  이채린양의  편지글입니다.

 

 

 

 

 

 

일본의 사과를 꼭 받아내시길 바래요

할머니들의 권리를 되찾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항상 응원하고 기도할게요.

 

 

 

 

 

할머니,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어요 ?

저와 같은 나이 또래쯤이었을 때 그런 고통스런  일을 당하였다고 생각하니 ...

 

 

 

 

 

할머니께...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어요

언젠가 저들이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말거에요...

창원 토월고 안영은 올림

 

 

 

 

하루에  30~40명씩? 그러다가 생명이 생기면 의미없는 주사로 몸은 약해지고 ...

정말 울분이 터지더라구요.

 

 

 

 

 일본정부로부터 반드시   용서를 받아내야겠어요

제 편지가 위로가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건강하세요.

 

우연히 사진속에 담게 된  내용들은  모두 창원 토월고 학생들이

 '위인부' 할머니들께  쓴 가슴 뭉클해지는  사연의 편지글입니다.

 

 

                                                                          

 

다음 날 ,

이 아름다운 행사에  창원 토월고등학교    박은미선생님과 학생들이  먼길 달려 와  함께 하였습니다

 

 

 

 

 

 

햇살이 바다로 빠지는 시각,  강구안입니다.

 

 

 

 

 

가릉빈가합창단의 추모의 노래가 애잔하게 들립니다. 

 

 

 

 

 

 

거제옥포고등학교 광개토역사모동아리 학생들

광개토대왕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호령 해 온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상징하고 기리는 정신을

동아리 명칭으로 사용하였다고 보여집니다.

  UCC대회에 응모할 작품까지  준비중이라니  공부하랴 동아리 활동하랴  참 많이  바쁘겠습니다..

 

 

 

 

 

 

 

 

거제옥포고등학교 '광개토역사모 ' 동아리를 이끌어 가는   박미경선생님(역사토론,역사논술지도)과 학생들입니다

'광개토'의 활발한 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

특히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치로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동아리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고합니다.

광개토역사모의 변지은양은  '세종실록지리지'를  줄줄 꿰어 차고 있을 정도라니

역사를 캐내는  학생들 , 아름답지 않나요?

 

 

 

 

 

추모제에서...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께 추모글을 읽는 거제옥포고2 진희경,손주현양.

 

 

 

 

끌려 간 '위안부' 소녀들의 나이 또래인 통영여고,충렬여고 ,거제옥포고 학생들입니다.

 

 

 

이날 10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설명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알게 된 가나입니다.

 

 

 

 

 

'정의의 인간 띠 잇기' ,

 이 땅의 모두가 동참해도  좋겠습니다.

 

 

 

 

 

일본국민 대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에 관련된  끔찍한 범죄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루타', '붉은  수수밭'

같은 영화는 일본군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생생하게 잘 보여준 예라 하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회복을 진정으로 바라는 희망마당

 

 

 

 

 

일본군 위안부란?

정확한 용어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무장관이 규정한 ' 일본군 성노예'일겁니다

 

 

 

 

 

 일본정부로  보내질 탄원엽서들

 

 

 

 

 

일헌법9조 '흔들리는 평화'

 

1945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초안을 마련한 현행 일본 헌법 제9조는 흔히 ‘평화 조항’이라고 불린다.

9조 1항은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무력행사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항은 ‘육해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엄밀히 해석하면 일본이 사실상 군대인 자위대를 보유하는 것 자체가 헌법 위반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헌법 해석을 고쳐가며 헌법 조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워왔다.

현재 일본 정부는 9조 1항이 ‘독립국가 고유의 자위권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석하고 있고, 2항에 대해서도

 ‘자위를 위해 필요최소한의 실력을 보유하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고 해석한다. 대법원 판례도 같은 태도다.

 

정부가 헌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공식 표방하고, 대법원이 판례에서 같은 태도를 취하면 헌법 해석은 바뀌게 된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통영항일운동역사길 다가가기를 출발하며 모두 함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

  더 많이 알려서    살아갈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모두가  동참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기를 기대하며

한국인권의 메카 통영에서 빨강머리 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