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우리동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이바구아지매 2012. 12. 3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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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서 오신 손님을 모시고 ...

따뜻한연말

 

12월의 매콤한 추위가 달려 들던  날,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시에서   귀한 분들이  거제도를 찾아 주셨습니다.

  동아누리 토크토크 진행자이신 청이님과 남편인 고박사님,

   두 분을 알게 된 인연은 아주 특별합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닷컴/ 동아누리 (카페 여인들의 담소실)에서

알게 된 휼륭한 분들입니디. 

 

 

마샬  멕루한의 미디어 이론처럼  미디어를 통한 사이버 세상의  발달로 지구촌화된 현대사회는  

 눈과 귀의 확장으로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언제든지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신기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고박사님께서는  어린시절  6,25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로  피난을  왔다가  다시  거제도포로수용소

제64야전병원 군의관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거제도로 오게 되었으며   일운면 지세포에서

1년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곳의  작은 어촌마을에 소재한   일운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의  운동장과 이어진 바다로  뛰어  들어 물개처럼  헤엄치고 놀았다고 합니다. 

바닷가로는   희고 고운 모래가 많이 있었는데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다 퍼갔다고 .합니다.

  박사님께 들었던  모래이야기는  당시  모래가 있는 거제도의  어느 바닷가를 막론하고 모래를 다  퍼갔는데

그런 까닭으로

바닷가 풍경이 오랫동안 정말 보기 흉했다는   이야기는  바닷가 사람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작로에서 공을 차고 놀았을 정도로    

차가    다니지  않아 정말 놀기 좋았다고 회상하셨습니다.   

박사님께서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거제도 풍경은  

 토박이인 제가 들어도   흥미롭기만 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떠나간지  60년이   지난   오래전 거제도 이야기는  

  박사님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보태어져  더욱  실감나고 흥미진진하였답니다.

실제로 어린시절에 겪었던  6.25한국전쟁의  포화속을 피하며 

  운명적인 삶을  살아야했던 어린 눈으로 본  폐허와 두려움과  배고팠던 기억을  

    실남나는  이야기로  풀어가시던   모습은

살아 가는 동안  잊을 수 없을겁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만나자마자  곧바로 식당으로 가서   아침겸  점심을   시원한  대구탕으로 먹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땅에 두 개의 조국이 존재하며  생겨난 비극은

 포로들의 전쟁터로 유명해져

몇 번이고  포스팅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미흡하기만 합니다.

그렇더라도  전쟁의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 해 봅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거제도는 몇 년 간  전쟁포로와 피난민등을  수용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바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

1950년 11월<알바니작전> 이란 이름하에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준하였습니다.

초창기에는 약250만평의 광대한 농토와 임야 , 3,000여 호의 주택을 사전 통보나

 어떠한 보상도 없이 징발하여 포로수용소를 건설하였습니다.

거제시  고현,수월지구 주민들은 포로수용소의 설치로 인해 강제로  소개되었습니다.

당시 거제도의 또 다른 비극을 다룬  소개민 이야기는 거제도 출신 

 작가 손영목의 소설'거제도'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는 사람들라면   포로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소개민이 되어 떠나야했던 

  이곳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도  한 번 쯤  헤아려 보셨으면  합니다.

 

한국전쟁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가 대신하였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대구효성초등학교,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중국군의 전쟁참가와 더불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포로가 크게 늘자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육지와의 이동거리가 짧고,  용수문제가 해결되며 보안상 안정적이라는

 판단으로 거제도가  최적지로 결정되었습니다.

1950년11월 27일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곧 360만평 규모로 늘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의용군과 의자포로 300명을 포함 

 포로 17만 3천명을 수용하는 대구모 수용소군도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자   어이없게도

 휴전회담이 거론되었으며   1951년 6월 정전 필사반대를 선언하며 국회에서도

 휴전회담  반대를 결의함과 돋시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 역시  친공과 반공  좌우로 나뉘어 

죽음을 부르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는 .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은  몰라도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하'  라며 고개 끄덕인다고 합니다.

 

전쟁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되었으며,

1954년 1월 23일 인민군 111,754명, 중공군 20,720명 132, 474명의 친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전군 1,216명 중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습니다.

.

 

 

 

 

 

 

 

 

 

고박사님과 청이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거제시 계룡로 61/ 고현동 362번지 전화 055)639~0625)

이곳에는 6,25한국전쟁에 UN 연합군으로  참전한 16개국의 깃발이 언제나 펄럭이고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

 

 

 

 

 

이곳에 서니  오히려 고박사님께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텡크전시관으로 가는 동안  고박사님께서 전시되어 있는  탱크는  러시아제라는 설명도 해주십니다.

바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시네요.

탱크 전문가 같습니다.

 

 

탱크전시관 안

 

탱크전시관  안으로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6,25 한국전쟁에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을 소개 해 놓은 모형을 봅니다.

이  모형들은  에스컬레이트 가운데로   양쪽으로 나뉘어   세워져  있는데

 왼편으로    전범  김일성을 선두로 스탈린, 모택동, 팽덕희,   남일,

오른편으로   이승만 , 트루먼 , 맥아더,   리지웨이,  워커장군  등이 서 있습니다.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재현한   설치물.  

 

이미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남으로 피난하는 평양시민들의

살려달라는  아비규환의 절규가 들리는 듯합니다.  

 

 

 

흑백사진으로  본 끊어진  죽음의 다리 대동강 철교

 

 

 

 

 

못써디오라마관에서 만나는  6,25한국전쟁 3년 1개월  역사의 기록 

 

 

 

 

1952년 5월 7일

도드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를 당한  치욕스런사건이 발생하자  포로수용소 지역 내의 주민 1,116세대를

소개시키고 출입을 통제하던 유엔군 헌병검문소가

1917년 가설한 연초면 연사리의 MP다리(현 연사교) 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두 개의 조국이 존재하였으며 반공과 친공으로 나뉘어져

친공포로들은  수시로  폭동을 일으켜 투쟁과 학살을 일삼아  

2천여명의 포로가 이 기간동안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포로의 몸으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들겠지만

당시 포로들이 남긴 그림이며  사진들이    

그들의 자유로웠던 생활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로들은  또  앞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직업 교육도  받았다고 합니다.

 

 

 

 각종 악기를  다루고 있는 포로들도 많았는데

고향의 가족들이 보고 싶을때는 이렇게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요?

포로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기자,  작가, 교사등   전문직의 포로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여러분야에서  일정한 역활을  맡아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민군 복장을 한 밀랍인형

 

눈보라 휘날리던 영하 30~40도를 오르내렸던 징진호전투를 생각 해 보면 

 옷차림이 너무 추워 보이며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여자포로들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을 정도로  악명높았던  여자포로 300명도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간호경력이 있었던   일부는  제 64야전병원의 간호원으로 활동 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자포로들을 사진으로 보면  깨끗한 복장과   구두를  신은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국군이나 일반인들보다  품격있는 대접을 받은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허기지고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자  차라리 포로가 되어 밥이나 배불리  먹어보고  싶다

고 말했을정도였다고 합니다.

 

 

 

북으로 떠난 여자 포로들

 

 

이들은 포로송환당시 전원 북으로 송환되었다고 합니다.

거제도포로수용에 수용되었던 내 반공, 친공포로들의 이야기는  당시 포로였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지금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여자포로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습니다.

북으로 간 그녀들 대부분은 지금쯤 세상을 떠났을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당시 고작 17~18세 정도의 나이로 본다면 지금도  몇몇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어야했던 어린 그녀들이 돌아갔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녀들은

보이지 않는 충성도를 인정받고   특별한 대접을 받았을까요?

  그녀들 중 누군가가 생존해있다면  그녀들의 삶도 몹시  궁금해집니다.

여자유격대 혹은 빨치산으로 불리었던 그녀들

 

 62년전 무서웠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어    애틋한 사연을  남긴 '리처드 p  뉴튼'

같은 군인도 있었습니다.

 

 

 

 

 

사진속의 군인은  리처드병사가 아닐까요? 

 

 

 

 

 

 

 

중공군 포로들이 만든 '사자상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중공군 포로 2만명도 있었으며

포로막사 앞에는  사자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사자가 길함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고 합니다.

남의나라 전쟁에 끌려와서 억류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함에서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만들어 놓았던 사자상을 재현 해  놓았습니다.

이곳에 서니   중국 작가 하 진의 '전쟁 쓰레기 '가

생각났습니다.

 

 

 

 

포로 미니어쳐를 배경으로  ...

 

 

 

 

 

너무 추워서 손을  호호불면서  짚차 위에  앉아 보았습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이런   짚차가  몇 대나 있었을까요?

 

 

 

 

잠깐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포로체험을  해 보았는데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무서웠다는

여자포로의 표정은 어떠했을지 잠깐 생각 해 보았습니다.

 

 

 

 

78수용소 게이트 및 위병소

78슈용소는  1951년 9월 17일 인근의 포로수용소인 76,77수용소와 함께 대대적인 반동 숙청을 실시한 

9,17 폭동을  주도했던  수용소입니다.

이 폭동으로 무려 400명의 반공청년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제 76 거제도 포로수용소 (1966년)'

 영화 포스터입니다

이한옥 감독

신성일,태현실,장동휘 주연.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비극은  

  문학, 영화, 음악등 다양한 장르로 녹아들어  끊임없이 작품으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제 64야전병원의 흔적입니다.

 

 

 

 

미 제64야전병원의 옛모습 <옮긴 사진>

 


포로들의 건강 관리를 위하여 수월과 해명 마을 사이 주작골 입구에 미 제64야전병원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2개의 별관이 있었는데 한곳에  2,500개의 침대가 있었습니다.

별관 부속병원은 요양소이며  64야전병원의  대부분은  미군 군의관들이었으며   

한국군 군의관과 간호원들도  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턱없이 부족하자  포로 중에서  의사 출신과  간호 경험이 있는

여자 포로를  뽑아 간호원으로 채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곳은 엉뚱하게도  포로들의 접선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병원에 입원하여 정보를 교환하거나  막사와 막사간의 

 연락과 지시를  병원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군들이나 한국군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64야전병원 군의관들  <옮긴 사진>

 

고박사님, 

 군의관이셨던  아버님께서도 빛바랜 사진 속에 혹시라도  계실지 모르니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곳에서 운명하여  이 땅에 묻힌

 미해군 소속 군의관  Gerald A, Martin   대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64야전병원 내부를  조형물로 설치 해 두었는데

  언제 철거해버렸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이 사진은 작년에 찍어 둔 사진입니다.

 

 

 

 

 

64야전병원의 조형물을 보며  계단을 따라 다른곳으로 이동합니다.

겨울햇살이지만 한낮의 햇살은  찬란하게  빛을 주렴처럼  펼쳐주니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청이님...

서울이 함락되자 인민군들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도 가르쳐 주었는데 지금까지도 생각이 난다며

몇소절 흥얼거렸는데    기억력도 참  대단하시더라구요

고작 5~6세 나이에   귀동냥한  노래일 뿐일텐데  말이죠.

 

 

 

탱크박사님,

 

 

고박사님께서는 이 탱크에 관하여  정말  자상하게  설명 해 주셨는데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금방 다 까 먹었답니다.

고박사님께서는 대여섯살 나이에 남으로 달리는 기차의 지붕에 매달려  잡을 곳도 없이 

  엎드려 달리셨다는군요.

혹여  굴속이라도 지나갈 때면   천정에 닿을까봐  더 바짝  엎드려야 했는데  

당시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어느  책에서 보았다고 하네요.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달고 살아야했던  고통의 시간을 되새기는  모습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px및 무도장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이 곳은  포로송환을 끝낸 후  포로수용소의 기능이 끝나자

소개민이 되어 떠나갔던 주민들이 돌아와서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를 무너뜨리고  논밭으로

되돌리는 고된 작업을 해야만했던 소개민들의 아픔과  땀과 눈물이  맺힌 곳이기도 합니다.

 

 

 

포로수용소의 흔적

 

 

 

 

 

 

 

 

 

 

 

 

미국 해군 소속의 군위관 Gerald A, Martin대위의 순직 기념비와 경비초소  

 

 

 

 

 

 

 

1951년9월27일에 순직한   Gerald A, Martin 대위

 그의 뜻을 기리고자 당시 미군 동료들이 세운 순직 기념비입니다. 

 

 

 

 

 

 

거제도의 겨울날씨도 만만하게 볼 추위가 아닙니다.

 

 

 

고박사님과 청이님

 

 

 

 

 

 

경비대장   집무실 

 

 

 

 

 

 경비대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면  예전의 페치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벽면에 인근 학교의  미술교사가 그렸다는

포로들의 생활상이 뱍화로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관심있는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다시  벽화를 그렸으면  좋겠습니다.

 

 

 

 

 

↑탱크전문가 고박사님께서 탱크 바퀴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아래사진은 흥남부두에서  '메레디스 빅토리호'를 타기 위해  안간 힘믈 다해 오르는 피란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내 입구에서  동쪽

흥남철수작전시  피난민 14,000명을 태워  3일간의 항해끝에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하여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조형물 앞에 서신 박사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대충 돌아보고  다른곳으로 이동하며 입구에서

 

 

 

이번에는 차를 타고    계룡산 전망대로 올라  삼성중공업을 내려 다 봅니다.

 

 

 

겨울햇살은  언제나 심술을 부리며 조금의 햇살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따뜻해서 포도농사가 잘 되겠다시는  박사님,

사실 저는 거제도의 겨울도 무지 춥게 느껴집니다.

 

 

 

 

카페 베너에서

 박사님의 묵직한 캐논카메라의 성능이   궁금한 남편이 자꾸만 질문을합니다.

우리는 달콤한 케잌과 커피를 마시면서 짧았던 여행을 기쁘게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아쉽게도 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