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바구아지매 2013. 3. 8. 18:09

 

 

29255

 

 

 

 

2013,03,01

 

 

바람과 비를 맞으며 찾아 간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거리

 

 

 

 

 

 

 섶섬이 보이는 방
       
이중섭의 방에 와서 -  //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아고리와 발가락군-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1916. 4. 10 평남 평원~ 1956. 9. 6 서울.

서양화가.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이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백과사전>







 

 

 

바람 불고 비가 내렸지만   화가의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뜻밖으로 많았는데.

 

 

 

 

 

1951년부터 약 1년간  머물렀던  곳으로  부인과 두 아들(태현5세, 태성3세)와이 살던 4.6m2(1.4평)

초가 단칸방이  아직 남아 있다.

전쟁을 피해  1951년 제주도로 건너온  이 화백 가족은 먹을 것이 부족해 

 날마다 바닷가로 나가서 조개와 게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 화백이 그린  당시의 그림에도 게가 자주 등장한  이유는  게를 잡아먹었던  행동이 늘 마음에

걸려  죽은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찾아 갔던  날,

 마루밑에는 강아지 한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듯

내다 보고 있었으며 

초가집 벽에는 당시 방을 빌려 주었던 주인할머니(김순복 92세) 가 

 살고 계신다는 문구의 글이 벽 중앙에  붙어 있었다.

 

 

 

1951년 이중섭 일가에게 방을 빌려줬던 김순복 할머니(사진 왼쪽)와 이남덕 여사가

 서귀포 이중섭 거주지에서 15년 만에 재회했다. 김 할머니는 이 여사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 반갑다. 여전히 곱다”고 했다. /서귀포=이종현 객원기자

 

 

 

 

 이중섭화백이  가족들과 세들어 살았던 집 마루에 걸터앉아 보았다.

왼쪽부터 제주 오마니, 통영여고 첼린지  동아리 친구들  조윤나, 고아라 ,  김예지

 

 

우리를 제주까지 초대해 주신

제주오마니께서  미술학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시며  이곳으로  데려 와 주셨다.

 

 

 

 

 

 

화가의 거리로 조성 해 놓은  '이중섭거리 '

천천히 언덕이 시작 되는 이 곳에서는 서귀포 앞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나가 보였는데

오마니께서  '섶섬' 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서울신문에  소개 된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화백의 대표작중 하나이기도 .

 

 

 

  파리의 몽마르뜨언덕이 이만큼 운치가 있을까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머문 시간은 고작 1년여 기간에 불과했지만   예술의 거리로, 문화의 거리로  태어나게 

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이 단연  돋보였다.

   

 

 

 

 

축축하게 젖는 빗속이지만   제주도에서 맞은    3.1절을  어이 잊으리

천재화가  이중섭의  향기가 풍기는   작품을   만났으니 크게크게 의미를 부여해도 좋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만큼 하늘과 달과 별도 가까워져서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동기를  유발시켜 주는것 아닐까?

 

 

 

 

 

 

 

 

 

 

화가가 살았던 초가로 가는 길도 검은빛깔의  돌담이었다.

 

 

 

 

 

비를 맞아 윤기를 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이중섭 미술관이 그리움처럼 서 있었다.

 

 

 

 

 

 

우리도 비옷을 하나씩 사 입고  화가를 만나러  갔다. 작은 아이  가나도 함께...

 

 

 

 

 

이중섭거리

마침  3.1절이라 곳곳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발 밑을 내려 다 보니 역시 화가의 그림이 올려 다 보며  방문객을  반겨주었다.

 

 

 

 

다정여인숙,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사실 제주 서귀포에  화가 이중섭미술관과 문화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열살 가나도  이제  화가 이중섭을 제법 알게 되었노라 친구들앞에서면 큰소리 뻥뻥  치겠지 ?

 

 

 

 

서귀포가 비에 젖어들자  몽환적인 신비감이  잠을 깨고 일어나듯 ,,  그런  느낌이 들었다.

 

 

 

 

3.1절,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이중섭거리에서 ...

 

내 걸린 태극기가 비를 맞고 있는 풍경을 보자

뜬금없이  가난한 식민지 나라의  가난한  예술가 를 사랑하여  현해탄을 건너 온  

화가의 아내  이남덕여사 (일본명 마사코)가 이 땅에 살던 모습이 서릿하게 그려졌다.

화가의 아내는 첫눈에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노라 했지만

그 천재성을 인정받기까지  잘곡의  삶은 변화무상한 제주의 날씨만큼 고통속이 아니었을까?

 

 

 

 

 

 

 

 

 

아기자기한 모습의 공방이  다닥다닥  길 양편으로 어께동무 하고 늘어 서 있었다.

 

 

 

 

 

서귀포

 

 

 

 

비가 내리자 우연한 그림한장이 태어났고,

우리가 입은 레인코트가 거리에서 바스락대며

활짝 웃었다.

 

 

 

 

오마니가    또 활짝 웃었다.

 

 

 

 

통영의 딸들은   이중섭 화백을 대단히  존경한다고 했다.

 

 

 

 

그림을 생각하며 걷는 거리

 

 

 

 

그림을 따라 걷는 거리.

 

 

 

최근 몇년째  우리나라는  그림으로  세상을  환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하고 있다.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아름다운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여

이 곳을 찾는 방문자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비를 맞는 골목길이 유난히 반짝였다.

 

 

 

 

 

 

 

 

 

까꼬막길을 오르면서   돌아보니  조망은 더더욱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중섭공방에 들어 가 보고 싶었다.

 

 

 

 

서귀포극장, 영화를 상영하는지는 알어보지 못했다.

 

 

 

 

가난한 화가가 살았다는  초가집의   한평짜리  방안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돌담너머  목련꽃이 망물지고   화가가 살았다는 옛집에는  

가끔씩 그를 추억하며 살고 계시는    할머니가 홀로 살고 계신데

 오래오래 살아  누군가가 찾아와서 화가가 살던 모습을 들려달라 졸라대면

아낌없이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만나보지는 못했다.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화백의 작품과 해설 > _ 옮긴 글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 을 써서 대이상향 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가족

종이에 유채, 41.6×28.9cm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소와 새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소와 어린이

나무판에 유채, 29.8×64.4cm
기진맥진한 소는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지고 가던 지게를 세우고 남자아이가 딱한 처지의 소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앉아 두 손으로 꼬리와 뒷다리를 쥐었다. 무슨 행동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재빨리 소 불알을 훌트면 기운이 버쩍 난다고 한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곤란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히 계산되었으므로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닭과 가족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이라는 주제는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월남한 이산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이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극단적인 예였다. <가족>의 위쪽의 아이에게 긴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을 꽃을 쥐도록 했는데 꽃잎이 뚝뚝 듣도록 했고, 아내쪽에는 새를 배치했다. 셋 모두 앞을 보도록 한것과 달리 아래의 아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도록 하고, 고개를 쳐들어 셋을 보도록 연출했다. <닭과 가족>의 닭은 결혼직후 이중섭이 일삼아 키우기도 했고, 즐겨 먹던 것이다. 두 아이는 병아리가 든 광우리를 들고, 아래 두 사람은 성징이 불분명하여 아이들로 착각하게 하지만 암탉을 안은 듯한 왼쪽은 아내고, 오른쪽은 지아비로 닭에게 어떤 작용을 가하고 있다.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박명자-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 하다. 일어서서 날아오를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후자는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보강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납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어떻게 보든 함의가 풍부한 그림이다. 비슷한 유형의 그림이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고 하는데, 새들 이나 애정 이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까마귀는 6.25 전쟁 전만 해도 흔다던 새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포성과 화약 냄새 때문인지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통영에서 그려졌다고 하는데 평화로웠던 그 곳에서 반갑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릴 소재다. 까마귀를 이루고 있는 붓질을 자세히 보면 날려져 있어서 마치 글씨예술(서예)의 비백과 같다. 그래서 전통 예술의 냄새가 진한 것이다. 대한 미협전에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종이에 유채, 36×27cm, 1951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앞은 거대한 물고기와 노는 두 남자아이를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래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주도 또는 부산 시절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본다. 뒤의 것은 물고기와 게를 앞세운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앞사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는 방법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새을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밖에도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맨 앞과 뒤에 있는 아이들이 잡은 끈인데, 이를 두 번째 아이가 잡아 당기므로 해서 더욱 재미있게 연관지웠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 평면으로 칠하고 테를 둘러 정연해 보이나 억센 붓질로 그렸다.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발 앞에 있는 게를 잡으려는지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아이를 그렸다. 턱을 쳐들고 위를 보도록 해 얼굴이 마치 고개를 뒤로 젖히듯 배치되어 있는데, 몸체는 앞을 향하고 있다. 또한 게가 정확히는 풀빛에 가까운 특이한 색으로 눈길을 모은다. 이런 눈속임 장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중섭의 연출이 그만큼 높은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전체는 매우 거칠게 그려졌는대 칼칼한, 조야한 맛을 우리 미감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횐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또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종이에 유채, 27.5×41.5cm
다친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소 그림에서도 매우 드문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므로 뿔을 앞세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태세다. 거의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흰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 같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 같다.

 

복사꽃이 핀 마을

종이에 유채, 29×41.2cm, 1953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 남긴다. 이 그림은 이곳에서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의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소그림들에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맛이다. 이런 것이 기운생동의 미감이 아닐까?

 

종이에 유채, 41.5×28.8cm, 1953년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 전면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환희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1955년
복숭아꽃이 수 놓여진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감을 두껍게 쌓이도록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말린 위에 전면적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긁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간혹 사용했던 기법이다. 자부와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무덤벽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전람회가 열린 미국공보원의 직원이 간직하던 것이다.

 

종이에 유채, 18.4×32.5cm, 1954년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갈색조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선은 흰 선의 한 자락을 집어들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의 주변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손을 그린 2점 중 하나로,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유채와 연필, 10.5×12.5cm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5×37cm, 1953년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먹과 수채, 10.5×12.5cm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는 즐겨 그려졌던 그림으로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세 명의 남자아이가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원산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와 부모의 약?대신으로 얻어간 그림이라고 한다. 벌거숭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붉은 색조와 초록빛을 띤 물고기의 색이 독특하다. 물고기, 게와 노는 두 남자아이는 거의 같은 상태로 무려 다섯 번이나 그려진 것으로 학인된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거의 같은 소재를 거듭 탐구하듯 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부부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중의 하나. 싸우는 듯한 설정인 도판 11과 흡사하나 아래
암탉의 자태를 보면 교미를 위한 자세다. 두 마리의 닭이 모여 이루는 형태가 꼬리로 인하여 덜 완결되기는 했지만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는데서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으로 된 언어다.

 

여섯 마리의 닭

종이에 연필과 수채, 26×36.5cm
두 마리의 닭을 통해 다툼과 어울림의 여러 정황을 노래한 이중섭은 여러 마리의 닭이 펼치는 드라마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즐기던 소재를 더욱 심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한데, 푸르고 붉은 색깔의 닭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중앙 뒤의 닭을 빼고 오른쪽 닭의 꽁지를 잡고 있는 남자아이를 선으로만 그린 연필화 한 점이 전한다.

 

닭과 게

종이에 연필과 과슈, 29×41cm
앞에서 살펴 본 그림의 왼쪽 위에 등장하는 닭을 그대로 옮겨진 듯 그려져 있고 닭이 굽어보는 쪽에는 게 한 마리를 배치했다. 게 주위에는 복숭아꽃잎을 배치하여 닭이 물고 있는 복숭아와 연관을 지니도록 했고 색채로도 청색과 분홍빛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꾀해 하나의 산뜻한 소품을 완성했다.

 

여인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중섭의 초기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그린 연필화로 전 해에 그려 지유텐에 출품한 것이 엽서그림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굵직한 연필선이 특징인데 훗날 특장이 되는 굵고 거친선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의 개성이 벌써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은 고갱이 자주 그린 태평양 연안지역에서 입는 사롱이라는 치마와 흡사한데, 이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향이라는 서명은 이 그림에서 처음 쓰였다. 훗날 아내가 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소년

26.4×18.5cm, 종이에 연필, 1942∼5년

 

세 사람

18.2×28cm, 종이에 연필, 1942∼5년
8. 15직후에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기 위해서 원산에서 들고 왔으나 늦어서 미수에 그쳤다는 바로 그 그림들이다. 1943년 이래 그 때까지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42년에 그렸던 것을 다시 손 봐 출품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년>은 화면의 거의 다를 차지하는 헐벗은 둔덕 가운데 난 길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가지만 벌린 나무가 있고 아래 구석에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가 있다. 무대는 어느 산등성인 듯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 아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가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스산한 정감이다. 이러한 느낌을 하늘에는 가로줄을, 헐벗은 땅 부분에는 무수한 세로줄을 그었다가는 지우거나, 바탕재인 종이가 패일 듯 힘주어 그음으로써 더욱 강화했다. <세사람>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스산한 감정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숨으려 드는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 단말마와 같은 일제의 등살에 못살게 된 식민지 민증의 내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1940년 말에서 1941년 후반기 사이에 그린 그림 엽서
14×9cm
후배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중섭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드리던 이중섭은 겨울을 맞아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고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를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활을 쏘는 사람들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14cm 1941년 말

 

소와 말을 타는 사람들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1년말
소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다. 1941년 한 해 동안 작은 크기이지만 80매에 이르는 그림을 고심해서 그렸다.

 

환상적인 바다풍경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0년말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를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
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1956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개인전 직전 처음 크게 건강을 상해 병원에 입원했던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마치자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은 서울로 가서 병원을 오가던 그가 다소 안정을 되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가리키는데 크레파스를 그어 마련한 거칠거칠한 질감이 계절 분위기를 잘 살렸다. 그러나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상태로 등장하는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플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희거나 노란 색을 칠한 새가 그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구상네 가족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1955년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어른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어른 여자와 한 아이가 이를 쳐다보고 있고 화면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부러워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과 이중섭이 서로 손을 조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서로의 우정에 대한 표시라 여겨진다. 이중섭이 입고 있는 옷은 이즈음 그려진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옷으로 보인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년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왼쪽의 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한쪽마저 상대방에게 올려놓았다. 싸움이 바야흐로 끝나려는 광경이다. 이런 설정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 소도 이긴 소도 모두 몰골이 형편없어서 싸움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위의 작품과 함께 1955년 5월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것이므로 말년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1956년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검게 표현되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하는 비슷한 일련의 그림 중 하나이다. 화면의 전체에 물감이 칠해지고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고, 하단에 담을 설정해 흰 새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제목은 당시 막 개봉된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린 것 같다.

옛이야기

장판지에 유채, 31×41cm, 1956년
정릉에서 살던 만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한다. 사슴과 학으로 여겨지는 동물과 불로초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이상을 배경으로 한 십장생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운 날씨인 듯 한데 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상투까지 틀고 있어서 의외의 느낌이다. 복고적인 태도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작품들이 꽤 그려졌으나 환영받지 못하여 사장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달밤

종이에 잉크와 수채, 17.5×13.5cm
구름에 쌓인 달을 바라보고 누운 어린이가 나오는 특이한 설정의 그림이다. 달과 구름은 자주 애용되는 전통적인 문화의 한 품목이지만 그것을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재를 소화해낸 방식에서 우리는 전통을 어떻게 잘 살려냈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구름을 처리한 방식에서 그가 소재로만 다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덩어리 구름과 꼬리 구름을 소화한 방식에서 전통적인 미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아래에 자족적인 남자어른이 아니라 누운 어린이를 배치하여 자연과 어린이로 새롭게 끌고 간 점이 이중섭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24.5cm
일본에 건너 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의 하나다. 서귀포에서 살 때
자주 가서 놀던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즐거이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과의 유대를 흐트리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7×39.5cm
두터운 바탕칠 위에 정성들인 선묘로 아이들과 나뭇잎, 물고기를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끈을 설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에는 채색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왼쪽의 아이는 뒤만 보이고 머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라면 그림에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셈이다.

 

꽃과 어린이

종이에 펜과 수채, 17 ×15.3cm 1940년말

 

네 어린이와 비둘기

종이에 연필, 31.5×48.5cm
이 그림이 상당히 큰 규모라서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이중섭의 작품들을 흔히 스케치나 소묘, 또는 밑그림이라고 부르기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근래 들어 이런 그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현상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연필화로 부르고자 하며,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요즘은 덜 하지만 중국, 일본과 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글씨예술(서예, 서도를 가리킴)이 발달한 우리의 경우 붓이나 연필을 구사하는데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이중섭은 1940년대붙터 이를 감지하고 독특한 붓질과 연필구사법을 개발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종이 위에 확신을 가지고 긁다시피 그어댄 선의 맛은 그 자체 독자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꽃과 어린이와 게

종이에 잉크, 9 ×14cm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어린이

종이에 펜과 유채, 19.2 ×12.2cm

 

개구리와 어린이

종이에 잉크와 수채, 10.5 ×25.7cm

 

판자집 화실

종이에 펜과 수채, 26.8×20.2cm
방 하나인 판자빙의 네 벽에서 한 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부를 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지붕과 실내는 약간 비스듬하게 설정해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했다. 그림그리기를 마치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도 봉트까지 쓰기를 마치고 누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자족한 모습이다. 겨울 언저리임을 알 수 있는 풍경과 주변 색깔에 비해 자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란색은 매우 효과적이다. 창조의 기쁨에 다른 곤란은 문제도 아니라는 이중섭의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다.

 

작품

1904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소와 소녀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소묘

종이에 연필, 23.3 ×26.6cm 1941년, 제6회 지유텐 출품작

 

망월

제4회 지유텐 출품작

 

그림엽서

1941년 중반기

 

망월

1943년 제7회 지유텐출품작

 

오지환 시집의 속표지 그림

 

종이에 연필, 26.5 ×33cm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은박지에 유채,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소장

 

동원유원지

종이에 연필과 수채, 유태 19.2 ×26.5cm

 

게와 담배대

종이에 연필과 수채 19.2 ×26.5cm

 

이중섭의 가족 그림들


가족



가족



가족



가족



가족



가족과 비둘기



가족에 둘러싸여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



과수원 가족과 아이들




과수원 가족과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낙원의 가족



닭과 가족




바닷가의 가족



수상네 가족




춤추는 가족



 

 

 

자료출처 , PARK  ART  "섶섬이 보이는 풍경 , 품 추는 가족  " ~~환쟁이난전

 

 

 

 

 
 

 

 

 

 

 

 

 

 

 

 

 

 

 

 

 

 

 

 

 

 

 

 

 

 

 

 

 

 

 

 

 

 

 

 

 

 

 

 

 

 

 

 

 

 

 

 

 

 

 

 

 

 

 

 

 

 

이남덕여사(일본명 마사코)

이중섭 화백의 애정 깃든 대형 팔레트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에 기증.

 

이중섭 화백이 1943년  미술창작협회(자유미술가협회 전신)로부터 태양상을  수상했을 때 부상으로 받은 것으로

 1943년  이화백이 원산으로 귀국하면서 자신이 사용하던  팔레트를 프러포즈 징표로서 이여사에게

맡기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했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이 팔레트를 이중섭 화백의 분신으로 생각해 70년간  소중히 보관해오다 서귀포시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

 

가끔은 섶섬이 보이는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도  담배 은박지에 바다와

하늘을 그리며  유유자적했습니다.

끼니를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그들에게는  게를 그릴 줄 아는 아고라(이중섭 애칭)가 있었고 ,

소라껍데기를 그릇삼아 상을 차릴 줄 아는  발가락군(마사코의 애칭) 이 있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 조선 컴>

 

 

 

 

 

이중섭 화백은 남도의 통영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경매가 35억~45억으로 추정되는

'황소' 작품은 1953년작으로  통영에서 머물며 그린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시의 밀감나무 (120년생)

이중섭 화백이  살았던 초가집 옆으로  밀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는데

 몇알의 감귤을  매단채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제주로 초대해준 오마니,   가끔씩  제주가 많이 그리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