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362년전 표류한 히멜의 흔적과 네덜란드 성문화 엿보기와 용머리해안

이바구아지매 2013. 3. 12. 14:23

 

 

 

 

29258

 

 

 

,

 

 

제주로 부는 바람, 바람,바람

 

 

바람과 제주는 바늘과 실의 관계같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제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람곶

제주를 여행하는 여성여행자라면  아슬아슬한 치마따윈 입지 마시길..

마릴린 먼로의  흉내를   잠깐 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셨다면   그조차  말릴 생각이야  없지만, 

게다가 멋내기  모자를 쓰고 제주도로 여행하실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  또한  꼭 말리고 싶습니다.

섬으로 부는 3~4월의 샛바람(동풍)은 제법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계절이잖아요.

하지만  점퍼에 달린 모자라면 안심해도 좋겠습니다.

 

2013.03,01 오후  4시경,  

 우리는 잠깐의 짬을 내어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로  갑니다.

 친절한 제주 오마니와 가나와 셋이서...

 

종 모양으로 우뚝 솟은 제주도의  산방산 앞바다,

그곳에  자연이 만들어 놓은 절경의 오묘한  멋을  켜켜이 쌓아 놓은

  화산분출활동이 활발했던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겠다니 부지런히  가야죠..

우리가  가는 곳은 제주도 남쪽의  용머리해안입니다.

거대한 용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 곳은 

 수천만 년  시간이  만들어 낸 사암바위가  다시  오랜 시간동안  파도에

 부딪고 깎여서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으로 제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

 

 

 

 

그런데 멀찌감치로  배가 한척,  육지로 올라 온 배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았던 풍경,

저건 '히멜의 상선' 아닌가요? 하멜표류기 ? 빠삐용처럼? 

 죽을고비를 몇번이고 넘긴 끝에  결국  조선탈출에 성공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이 다니던 동인도 회사에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13년이 넘는  기간의 고단했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로  제출하게 됩니다.

이 특별한 보고서는 곧  '하멜표류기 ' 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어

  유럽전역을 강타하게 되죠  그리고 동방의 은둔의 나라, 조선은 그렇게 알려지게 됩니다.

한나라의 이미지와 체면따위는 상관없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유럽의 관심을 끌게 된 거죠.

 

빨강머리 앤,

용머리해안 입구에 정박한  하멜의 상선을 보자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만큼이나  벅찬 감동이 요동치지만  드러내 놓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네요.

그럼 오마니께서 철딱서니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언제나 숨길 수 없는  빛깔의 소유자  빨강머리앤,

천방지축 호들갑은 금방  표정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이미 많은 블로거들이  소개 해 놓은  하멜상선  제주도 표류기는 수 많은  포스팅을 통해

나름 줄줄 꿰어찰 정도가 되었지만 , 

 오늘은  또 다른 빨강머리 앤 만의 시각으로 누구에게도 아직 드러내지  않은

새로운 정보를   찾아 보고 싶습니다.

 

 

 

 

앗싸제주, 네덜란드와 인연 시작되다.

 

 

서귀포시 사계리 용머리해안을 소개 해 놓은 표지판 앞입니다.

 

 

<옮긴 사진>

 

네덜란드와 합작하여 재현 해 놓은' 하멜호 '

 

 

 

 

 

362년전 동인도회사의'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 

 풍랑을 맞아  배는 좌초되어1651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에  표류하게 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포수 하멜.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랍니까?

하멜호는 내부수리중이어서 전시관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고 적혀있습니다..이런이런~~

 

너무도 아쉽습니다.

이번 제주행에서는 하멜전시관을 꼭 돌아보겠다고 작정 하고 왔는데  말이죠.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이럴 때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히멜표류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아보는겁니다.

유익한  내용은 공유하면서 말이죠.

 

 

 

<옮긴 사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언덕에 있는 '하멜 기념비'

 

 

 

하멜의 바이올린하고는 상관없다

 

제주도에 있는 하멜 기념비 환영하오 낮선이여

 

 

 

 

하멜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포수(砲手)로, 항해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1668년 탈출하여 《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

 

말하자면 운 나쁘게 먼 나라에서 갖은 고생 다하다가 겨우 빠삐용처럼 탈출해서 자기 회사에 그동안 밀린 봉급 받을려고 13년 넘는 기간의 상황을 상세히 기술한 책. 사실 고생한 걸 티내려고 어느정도 과장을 했을 측면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묘사가 속속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 리얼리티를 보장한다.

 

한국의 생활상을 외국인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 외에도 해외에 조선에 대한 정보를 처음으로 상세히 전파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자료 가치는 상당하다.

 

 

 

 

이것이 원본.

 

아래는 네덜란드=화란 인이 상상한 삽화.(전혀 조선같지 않아)

 

 

 

 

 

 

 

 

노역과 빈곤으로 인해 하나 둘 죽으면서 36명중 16명이 최후에 남았고

 

8명은 탈출에 성공, 8명은 2년후 생환에 성공한다.

 

 

 

 

 

 

 

 

 

 

정발본도 있다.

 

들어올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때는 아니란다.

 

 

 

이게 결코 긍정적이거나 해피한 내용이 아닌데도 코레아 열풍이니 히딩크랑 비교하는 개드립 띠지는 대체....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나중에 흉년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자 노비처럼 부려먹고는 쫄쫄 굶어 죽도록 냅두는 바람에 하멜 일행이 직접 장사하고 구걸까지 해야했다.

  

게다가 하멜이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그들이 남만인(포르투갈)인 줄 알고 있었다가 나중에 하멜을 심문했던 일본측의 통보를 받고서야 네덜란드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고향 말조차 거의 잊고 조정에서도 불려다닐 정도로 자리잡은 벨테브레이(박연)와 길거리에서 끌려다니면서 거의 신기한 '생물' 수준의 구경거리가 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헌데 박연은 "여기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마라"라는 식으로 말하니...

 

사실 하멜 일행도 몇 번씩 탈출 시도를 하고 몇 번씩 또 실패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것을 알고 길막한 뒤 단체로 호소를 하거나, 아는 어부를 회유해 배를 구입하거나...

 

(같은 네덜란드인인 박연은 조선에 최초로 귀화한 유럽인으로, 이 역시 하멜처럼 잡혀서 강제로 군 복무를 하였음. 동료 둘은 병자호란 중 사망. 자신도 끝내 고국에 못 돌아갔다.)


 

 

 

 

 

또한 실록의 관련 문헌.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 효종실록(1653년 기록)

 

 

(여기서 말하는 낭가삭기는 일본의 나가사키를 말하며 외국인의 체류가 보장되는 데지마가 있었음.)

 

 

 

 

 

이하 자세한 개요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 관한 서양인의 최초의 저술로서 당시 유럽인의 이목을 끌었다.

 

1653년(효종 4)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상륙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8명이 탈출해 귀국했는데, 귀국선의 서기인 하멜이 한국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은 잘못 인식되어 전혀 달리 전달된 사례도 있다.

책의 내용과 간행 경위는 다음과 같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로 호크호로 대만(臺灣)의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덜란등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 8월 11일까지도 스페로 호크호는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8월 15일 풍랑은 더욱 심해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떨어져 나갔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을 시도했으나 혹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거듭 선창으로 밀려들어 드디어 스페로 호크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64명의 선원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육지에 오른 생존자 36명은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동안 14명이 죽고, 다시 1663년 생존자 22명은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긴 고난의 억류 생활을 계속했는데, 어느 때는 구걸에 나서기도 하였다. 1628년(인조 6)에 표류한 같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朴燕)를 만났으나 동포를 만난 감격도 잠시일 뿐 고통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부근의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의 억류 생존자수는 모두 16명이었다.

 

탈출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현종 7) 9월 4일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귀환했다. 탈출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책에는 이들의 귀환 사실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끝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때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느라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 전의 일이었다.

 

≪하멜표류기≫ 정본(正本)은 1920년 회팅크(Hoetink,B.)에 의해 발간되었다. 정본의 내용 구성을 보면, 제1부는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제2부는 <조선왕국기 朝鮮王國記>로 되어 있다. 제2부는 한국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교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저자가 거의 14년 동안 군역·감금·태형(笞刑)·유형(流刑)·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고,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서양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최초의 저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책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다투어 번역, 간행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1934년 ≪진단학보≫ 1∼3호에 이병도(李丙燾)가 영역본(英譯本)·불역본(佛譯本)을 저본으로 번역, 전재했다.

 

그 뒤 ≪하멜표류기 --漂流記≫가 일조각(一潮閣)에서 1954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961년 이쿠타(生田滋)가 ≪조선유수기 朝鮮幽囚記≫라는 제목으로 번역, 간행했다.

 

1980년 10월 12일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우호 증진을 위해 각각 1만 달러씩을 출연해 난파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사진출처 대부분은

 

심일, 마음하나 블로그

 

 

 

 

http://blog.naver.com/qnwkkr?Redirect=Log&logNo=120090057006

 

이쪽 링크에 하멜 표류기의 전문이 원문과 함께 자세하게 번역이 되어 있으니 흥미가 가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이번에는  눈을 돌려 맞은편에 있는  볼거리를 향해 ...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신화를  마들어낸  

거스 히딩크감독을 따라  내덜란드관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기는 제주, 네덜란드

. 히딩크감독,  벅찬 감격의 골세리머니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럼

 운화와 풍차와  튤립의 나라  그리고 고흐의 나라로 알려진  

내덜란드속으로  신나게 들어 가 볼까요?

 

 

 

 

네덜란드가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 

  짠 '성문화' 되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아직도 '성문화'는 금기시하고 음밀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

라고 네덜란드가 묻는것 같습니다.

 

 

궁금하세요?

신기하세요?

여기는 제주도 용머리해안입니다.

네덜란드는 

 일찍부터'성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교과과정을 통하여 수업으로 이루어지는 성교육을 통해

콘돔사용법과 피임법 등등을  구체적으로  배워나간다고 합니다.

 

6주로 구성된 성교육 수업은  피임 기구의 원리와 사용법에 대해서 꾸준하게  배우게 되며

피임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시 콘돔이라는 결론도 내리게 된다고 하네요.

성교육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께서  콘돔을 하나씩 나눠 주시기도 하구요.

 

그리고 피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책임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토론식 수업을 통하여 친구들과 함께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자연스럽게 성교육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이런 교육의 결과로 네덜란드 성범죄는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합니다.

 

 

 

 

<옮긴 사진>

 

각양각색의 콘돔이 주렁주렁 , 이 가게가 과연 뒷골목에 있을까요?

절대로 아니랍니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널려있는 '성인용품샵' 입니다.

마약과 마리화나를  경험 해 볼 수 있는 카페가 즐비하며 ...

 

 '야한영화'를 관람하기도 있는데 무려 105분짜리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인의 국적을 취득하려면  이런 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는지 일종의 테스트도 한다는군요

이런 야한 장면은 물론이며 동성간 애정행각 장면도 삽입되어 있는데 

 도저히 봐내지 못한다면 네덜란드인이 절대로 될 수 없을것이라고 말합니다.

 

 

 

참고자료, 인터넷속 나의 생각.

 

<옮긴 사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 SEXMUSEUM

 

1990년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로 가게 되면  특이함을 참 많이 접한다고 하죠.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국가가 관리하는 공창가가 있으며 , 모든 법죄에 대해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이며, 마리화나등 마약이 법적으로 용인되는 나라이며,

동성결혼이  가능하고 낙태를 법적으로 용인하는 나라 또한 네덜란드라고 합니다.

 

 

 

 

 

 

서울의 청량리 588같은,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홍등가

 

세계 유일의 매춘이 합법화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고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의 허브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부터 

이미 알려져 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관광명소이기도 하다는군요.

 

이상 ,네덜란드 '성문화' 유익했나요?

 

제주에도 성을  표현한 작품들이 가득한 '제주 러브랜드'가 있다는 것 아시죠?

금기시 되어 있던 성문화를  대중앞에 끌어낸 국내 유일의 야외 조각공원입니다.

 

 

이제 용머리해안으로 ...

 

 

 

 입장료를.지불하고 이제 용머리해안으로 갑니다.

 

 

 

철썩철썩 ...바람이 파도를 데려 옵니다. 

 

 

오마니, 오마니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제주를 조금 적게 알고 계신  편이죠ㅎㅎ 

(개그 ,거제도에서  보숙이처럼.. )

 

 

 

 

 

해녀의 가게인가요?

 용머리해안 곳곳은 이렇게 제주오마니들이 

바다에서 건진 해산물을  펼쳐놓고 팔고 계시더라구요.

 

 

수천만 년 전부터 시간이  공을 들인 작품들이라는 극찬을 듣는 용머리해안의 기이한  풍경

마치 유령의 나라에 초대되어 온 것 같습니다.

 

 

 

 

화산활동의 놀라운 결과물

 

 

 

 

 

용머리해안, 물때와 날씨영향을 수시로 받는 곳이라  긴장하며  돌아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이렇게 바다가 혀를 내밀고 낼름거리는 바닷길을 30~40분  걸어갑니다.

 

 

 

용머리해안,  시간이 빚어 놓은  지질역사학습체험장 같죠.?

 

 

 

태고 가는  길 ?

 

 

 

 

 

 

이제 저 높은 곳을  향해, 세상을 향해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