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마산여행>가곡 동무생각의 청라언덕을 찾아 마산으로

이바구아지매 2013. 4. 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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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의 

노비산 청라언덕에서 동무생각을~~ ♩ ♪ ♬~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가는 길에

내 집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얀코 어리섞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라고 봄처녀를  노래하고, 고향의 바다를 마음껏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마산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노산  이은상이다.

이은상과 마산은  바늘과 실같은 관계이다.

 

 개나리가 노오랗게 봄물을 들이느라  꼬물대는 소리가  야단스레 들리는 날,

 '가고파'의 고장이라 알려진  마산 노비산언덕으로 간다.

 

이번  마산여행은 대구여행에 이어

  국민가곡 '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청라언덕이 마산의 노비산언덕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그 곳을 찾아 가 보고 싶었다.

 

남도의  3월은 하순을 넘기자 기온이 높아져서  이미 봄을 훌쩍 뛰어 넘어

초여름의 더위가  느껴진다.

여전히  버스여행으로  거제의 고현에서  버스를 타고 , 달려 35개의 아름다운 섬(유인도)을 가진

 통영을 지나고 , 1억 6,500 만 년 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공룡이 백악기와 함께 멸종하여,

화석으로 굳어버린  공룡을 다시 흔들어 깨워 큰길가로 내보냈는지,

 발도장 쿵쿵 찍으며 나와   반기는  고성을 지나

마산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자 곧장  택시를 탔다.

 

내가  택시를 즐겨타는  이유라면  무엇보다

고생하지 않고  목적지를 쉽게 찾아 갈 수 있으며 또한 ,

  그 고장이야기를 문화해설사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맛깔나게 들려 주기 때문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택시를 타고  청라언덕을 가자며  우겨 본다.

노비산(최근에는 제비산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함)언덕으로  가야한다며 

대구에서처럼 청라언덕의 이야기를 꺼내며  택시기사님의 반응을 살폈다.

 

"청라언덕, 

 마산이면 어떻고, 대구면 어떻고 거제도면 또 어떤가요 상관없어요

나름대로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멋지게 가꾸어 나가면 될것을 ..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란 언덕은 모두 다  청라언덕이라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예쁘잖아요 이야기가 있는 파란 청라언덕 ... "

라시며 하늘높이 올라간  뽀족지붕 끝으로 십자가를 달고. 다시  세 개의

종이1,2,3 층으로 달린 독특한 모습의 문창교회를 지나  

구불구불한  오르막 길이 시작되자  

"노비산언덕입니다."

하고 인상좋은 기사님, 유쾌하고  즐거운 여행되라며  기분좋게 손 흔들며 사라진다. 

 

 

 

 

 

 

 

 

이은상의' 내 놀던 옛 동산에 올라 '

 

 

택시에서 내려 구불구불한  언덕을  따라 천천히 오르니 내 놀던 옛 동산이 눈 앞에 아른아른

 노비산자락은 시(詩 )를  모르는  내가슴에도 감성의 싹을 움틔운다.

제법 헉헉거리며 올라온 언덕 위에서 눈 앞으로 펼쳐진 마산을 내려 다 보니

도시를 이웃한 ' 내 고향 남쪽바다'가  봄물결로  출렁이며  시야로 들어온다.

 

 

 

노비산이야기,

 

  눈 앞의 나지막한 앞산  용마산과  용마를 이끌고 가는 노비모양을 한 노비산은 어찌보면

강남갔던 수다쟁이  제비가  지지배배 노래하며 찾아오는

물찬제비의 날렵한 몸매를 닮아

또 다른 이름  제비산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노산문학관 &   마산문학관

 

 

 

노산시비앞에서

 

   마산문학관이 자리하고 노비산언덕은

원래는 '노산문학관'으로 기획되고 또 착공하였지만  노산의 입신과 민주성지 마산의 정서가 

 상충된다는 이유에서 '마산문학관'으로  개칭되었으며,문학관  명칭을 둘러싼

시민단체, 시민, 문인, 시의회 간의 첨예한  갈등을  묻어둔 채

58-8번지 '노비산 근린공원내 들어서게 되었다.

 

 

 

 

 

 

봄은 품은 날씨는  언제나 시야가 조금 흐리게  다가와서

가을이나 겨울만큼 쾌청하지 않아 희뿌옇게 보이지만  도시의 빌딩숲 너머로 

 노닥거리는 바다를 생각하면

상쾌하고 즐거워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먼길 달려 온 수고로 종려나무와 산수유 사이에 길게  놓인  벤취에   털썩  앉아 본다.

 

 

노비산언덕에 둥지를 튼 사람들

 

연두빛  새싹들이 바쁘게 겨울을 밀어내며  땅 위로 고개 내밀자

  노비산언덕을 타고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도

언덕 위의 풍경이 궁금한지  몇몇은 야트막한  꼭대기를  향해  올라본다.

다가가서 옛날의 노비산 풍경이 어떠했는지 여쭈었더니

언덕에 올라서면 앞으로 탁 트인 바다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치가 좋아

모르긴 해도 감성을 멋드러지게 표현하는  시인이 많이 배출되었을것이라   알려주신다.

이은상,  이원수, 천상병, 김남조등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는 문인들이 배출되었으니  

 ' 시인의 언덕'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것이란다.. 

 

 

 

 

청라언덕 위의  '마산문학관'

 

먼길 달려 와  노비산자락을 오르다  언덕아래서  올려 다 보니

 동산 위로 올라앉은 마산문학관이 동무생각의 '청라언덕'처럼  느껴진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라는 소절과 썩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노비산 언덕에서 쑥 캐는 처녀들

 

마산에서 주장하는 청라언덕은 ,

 노비산자락을 타고 내리며 돋아나는 쑥과   봄풀들이 마치 푸른 비단을 낄아 놓은듯

아름답게 보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가곡 '동무생각' 에 나오는 '청라언덕'과 ' 백합같은  내동무'의 대목은

작곡가의 달콤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압제의 고통속에서    

봄이 되면 흰저고리 검정치마를 입은  마산의  처녀들이 노비산언덕에서

     쑥을 캐는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다워

빼앗긴  조국을  사는 그녀들을  생각하며   시(詩)로 담아내었다고 한다. 

 

   

 

이은상

이은상 [李殷相]

 

.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년)은 집 뒤 창신학교 뒷산 노비산(鷺飛山)에서

‘飛’자를 빼고 노산(鷺山)이라고 호를 정했을 정도로 노비산 청라언덕을 사랑했다.

노산의 시 <가고파>에서 ‘내 고향 남쪽바다’를 내려다본 곳이 바로 노비산이고,

<동무생각>의 ‘청라언덕’역시   노비산을 말한다.

 이은상 선생은 대구에서 내려온 박태준 선생과 함께 창신학교 뒷산 노비산 청라언덕에서 합포만을 내려다보면서

 “내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예 시인의 허사로고/ …”라는

<옛 동산에 올라> 중의 옛 동산 역시   노비산 청라언덕을 말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1903년 마산에서 태어나서 1918년 아버지가 세운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23년 마산에 내려와서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박태준 음악교사와 함께 근무하면서

노비산 청라언덕에 앉아서 <동무생각>이란 시도 지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옛 동산에 올라>

 중의 ‘옛 동산’과 <동무생각>의 ‘청라언덕’도 모두 마산에 있는 노비산을 말한다는

사실을 마산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료출처 : 바다사랑실천운동시민연합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지 전 이 곳은 경치가 빼어나서

마산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란다.

 

 

 

 

 

노비산언덕  위에 자리한 '마산문학관 ' 안으로 들어 가 본다.

 

 

 

 

 

와글와글 쏟아지는  '창신학교'이야기

 

창신학교 설립자는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마산지역의 교육가, 사회사업가, 구국운동및 종교지도자로  활동하며 사회에 이바지한

남하 이승규 선생은 100년 전통을 가진 창신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창신학교의

설립공로자(1906년 5월17일 문창교회 내 독서숙)로

1914년 문창교회 장로를 맡았으며,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수감된 창신학교 학생의 석방을 위해 신원보증 등의 활동을 한 사람으로

기독계는 물론 마산사회의 유명인사로 추앙받고 있다.

 

 


이은상과 박태준의 특별한 만남

참잘했어요     창신학교에서 동료교사로 만나게 된 이은상과 박태준은

각별한 사이로  발전 ,창작활동에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으며

 훗날  이은상은  고종사촌 여동생 김봉렬을  박태준에게 소개하여 

 혼인이 성사되어   처남매부지간이 되는

 인연을 맺은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관을 돌아보다 

 

 동요  '산토끼 ' 를  작곡한 이일래선생 역시 

 창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전시관에서 만난  시

 

마산에서의 봄  이석

 

 

 

 

민주성지  마산의  민주항쟁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1960년 3월15일,  독재의 총알에 뜨거운 가슴으로 함성을 외치고,

민주의 깃발을 올리며  거리로 나섰던  마산의 젊은 학생들이

온몸으로 싸워  되찾은 자유와 민권의 존엄이 시로 태어났다.

 

"가도에 뿌려진 붉은 피, 그 피가 봄을 상징해야 하는 슬픔의 봄이었다."

 

1960년 3월, 당시  마산고등학교 국어교사였던   김춘수는 3.15 의거의

   핏방울을  뿌린 어린  학생들의 희생을 보며 시 ' 베고니아의 꽃잎처럼' 을 

 썼으며  이 밖에도  마산 , 창원 시인들의

많은 시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마산에서 발간된 순수한 학생중심의 동인지  '백치(白痴)동인'을 결성한 저력이 있었다.

 대부분의 동인들은 '신춘문예'혹은  ' 현대문학' 을 통해 등단을 하였으며

지금껏 한국문단에 큰 역할을 한 마산의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이어졌고, 백치동인이며  마산을  대표하는  이제하 시인의 

'청솔 그늘에 앉아 '라는 시도   감상할  수 있었다.

 

"청솔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들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다.

혹은

하이얀 햇빛이 깔린

어느 도서관 정원이라 해도 좋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노곤한 그리움이여 ,

 

<중략>

 

 

어느 도서관 앞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 시인의  모습이  눈 앞에 선다.

마산의 봄이 물씬 느껴지는 시를   기억하며

눈을 돌려 또 다른 작품을  훑어보다

 단아한 용모와 맑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의 몰랐던 작가  '지하련'을 만난다. 

 

 

 

 지하련은 누구...

 

       

 소설  '결별'' 도정' 등 불과 10편 이내의 작품이  전하는  북한의  소설가 

단 몇줄로 소개되어 있는  지하련의  작품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마산,창원을 깊숙히  들여 다 보니 현기증이 난다.

 

 

엉엉지하련 (池河蓮),1912 경남 거창 ∼ 1960 평북.

 

북한의 소설가.

 

본명은 이현욱(李現郁), 카프 평론가 임화(林和)의 부인이다. 경남 거창의  천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도쿄 쇼와여자고등보통학교[昭和女子高等普通學校]와 도쿄경제전문학교[東京經濟專門學校]에서 수학했다.

1940년 12월 백철의 추천으로 단편 〈결별〉을 〈문장〉에 발표하여 등단했다. 추천 당시 백철은 "인간적으론 전부터 친숙하게 아는 분이지만 그가 이처럼 훌륭한 작가적인 천품을 갖춘 분인 줄은 소홀하게도 생각질 못했다. 그만치 이 〈결별〉을 읽었을 때의 나의 놀람과 기쁨은 더 한층 크게 신선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체향초 滯鄕抄〉(1941), 〈가을〉(1941), 〈산길〉(1942) 등은, 소시민의 자의식을 섬세한 심리묘사로 그려내면서 그 전망을 모색하는 한편, 일상의 안일한 행복에 잠겨 있던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의식에 눈뜨는 과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남을 보였다. 해방 이후 남편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도정 道程〉(1946)과 〈광나루〉(1947) 2편이 있는데, 〈도정〉은 조선문학가동맹 제1회 조선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집 〈도정〉이 1948년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1947년 가을 임화와 함께 월북했고, 1953년 휴전 직후 피난지 만주에 있다가 임화가 남로당 관련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받은 것에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평안북도 희천 근처의 교화소에 수용되었다가 1960년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출처 <브리태니커>

 

 

사랑해지하련을 논하려면  그녀의  남편 임화를 정확하게 알아야... 

 

 

 

 

 

 

 

임화 [林和]한국 문학평론가

 

1908. 10. 13 서울 1953. 8. 6 평양.

 

시인·문학평론가.

 

일제 강점기 및 8·15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문예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인식(仁植). 필명은 청로(靑爐)·임화(林化 또는 林華)·성아(星兒)·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192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해 이상·조중곤·윤기정 등과 사귀었으며, 문학에 흥미를 느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뒤부터이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KAPF)에 가입해 1928년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해 〈유랑〉·〈혼가 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색인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이듬해 박영희의 후원으로 연극공부를 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유학을 갔으나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에 관한 책만 탐독했고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에서 활동했다. 1931년 귀국해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했으며, 그해 KAPF 제1차 검거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9월경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되었고, 기관지 〈집단〉의 책임편집을 맡아보았다. 같은 해 KAPF 제2차 검거사건 때도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KAPF 해산계를 제출하고,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했다. 1937년 학예사를 대리 경영했고, 〈사해공론〉·〈인문평론〉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1940년초에는 고려영화사 문예부 촉탁으로 근무했고, 1943년 조선영화 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했다. 8·15해방 직후 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으나 이기영·한설야·안막 등이 조직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이 일어나자, 1946년 2월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두 단체를 통합해서 조선문학가동맹 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색인 : 조선문학가동맹). 1947년말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종군작가단으로 서울에 온 벅찬 감동을 시 〈너 어디 있느냐?〉와 인민군이 후퇴해 평안북도까지 쫓겨간 심정을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 나타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문제가 되어 1953년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미제의 고용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자료출처  <브리태니커>

 

 

 

임화와 지하련을 한동안 이야기하며 질문을 끝없이 해댈  '가나'

 

 

노비산의 마산문학관을  제대로 돌아보려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전시관을 나서다가

운좋게  창원시립마산문학관 최광석박사(학예연구사)를  만나  '청라언덕'과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오래전 선교사들이 살았던   

노비산언덕 위의  옛선교사 주택을  알려주었고

마산을 대표하는 작가 이제하를 들려주었으며

조만간 마,창 문인들이 모여 '청라언덕'을 주제로  학술포럼이 있을 예정이라고도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청라언덕기념사업' 을 착실히 진행해온 대구와는 대조적으로 

마산시는  고유한 문화콘텐츠를 사전에  아무런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대구시가 도용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몇 편의 글이 검색되는 정도였다.

 

 

 

 

 

 

 

청라언덕 위의   옛 선교사주택

 

마산문학관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불과 20m 떨어진 곳에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선교사 주택이 있었다.  

 

 

 

 

 

 

노비산언덕이 따뜻해지자  

 이곳을 찾은 어르신도 마음이 설레이는지 언덕에 나와 앉아 쑥을 캐는듯 보인다.

 

 

 

 

제비가  찾아오는 봄의 언덕

 

 

 

 

 

노비산 청라언덕을 찾아 온 가나도   봄을  마시며  쑥을 캐고 싶어  달린다.

 

 

 

 

잔디를 뚫고 쏙쏙 올라오는 쑥이 신기하여 들여다 보는  작은 아이

 

 

 

노비산언덕에서 캔 쑥 ~ 이것이 ' 청라언덕'의 푸른 비단이었을까?

 

 

 

 

 

청라언덕에서 쑥 캐는 봄처녀

 

 

 

 

 

노비산 자락의 마산문학관

 

 

 

 

 

예전의 노비산언덕은 제법 높았다고 하는데  노비산언덕 위로 올라온 사람들이 높은 집을 짓는 바람에

옛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없는  아쉬운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다지만  

그렇더라도 옛모습을 모르고 찾는  여행자들에게는  

두 도시에 있는  ' 청라언덕'을 찾아가서

만나 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노비산언덕이 품고 있는  많고 많은 이야기를 모아 스토리텔링한다면

노비산언덕은 더한층 아름다운 언덕으로 거듭날 것 같다.

 언덕을 오르면서  목가적인 풍경으로  가꾸면  말이다.

여인들이 바구니 들고 쑥을 캐는 봄의 풍경이야말로  

 어쩌면 노비산언덕의 고유한 그림으로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라는 매력적인 풍경 하나가 더 있는  마산 아닌가?

그리고 문학이 펄펄 살아 벌떡이는   동네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 보이는 골목길에서 ...

 

벽화가  그려진  맞은편의 벽에  이 시대 마지막  순수시인, 혹은 기인으로 불리던

천상병 시인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며 시인만의  순수를 생각 해 본다.

 

 살아서  자신의   유고시집< 새> 을 마주한  사람은 

천상병 시인밖에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시인의 생사를  알길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죽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가난했던 시인을  기억하며  

 유고시집을 만들었고, 

 얼마쯤 뒤에 시인은 자신이 쓴  시처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고 ' 

죽음을 맞았다.

 

 

 

 

 

 

 

 

 

 

천상병의 시   귀천( 歸天 )

 

 

 

 

 

 

 

노산동을 내려 오다 만난 세 개의 종이 달린 '문창교회'

 종교지도자이기도 했던  노산 이은상의 아버지  

이승규장로가  기독교 복음을 전했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노비산 자락의 노산동에는  '문창교회'  예배당이 있다.

 

 

1901년 가정 주택을 예배 처소로 하여 마산포 교회가 설립되었다.

 

 

 

 

   마산의 노비산언덕

 대구의 동산언덕

 

두 언덕은 서로  닮은듯,

 아니 닮은 듯,  

 아득한 분위기를  낸다.

 

그곳에 국민가곡  동무생각의 ' 청라언덕' 이 있었다.